오~ 나의 情人이시여~

2013. 5. 24.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이곳에 만든 뎀은 한때는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고 잔도를 수몰시킨 댐이었을 겁니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다고 옛일은 하찮은 일이라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그게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역사를 수몰시키는 일이란 게 밝혀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중국 여행을 하다 보면 아무리 작은 계곡이라도 댐을 만들어 물을 모아 전력생산을 하고 물을 막아

보를 만들어 물고기를 키워 단백질 공급을 합니다.

우리 눈에는 비록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렇게 하는 게 이들에게는 삶의 지혜일 겁니다.

 

워낙 세상의 전기를 모두 빨아들여야 속이 시원할 중국이 아니겠어요?

예전에 공자의 후손이 살았던 저택에서 공부의 업무시설로 나가는 문앞에 만든 탐이라는

탐욕의 동물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중국은 워낙 많은 인구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픔이 있을 겁니다.

그래도 이제는 더는 사용하지 않아 잔해만 남은 잔도의 자취가 무척 애잔해 보입니다.

탐에 대해 더 일어보시려면 클릭하세요. 꽁푸(孔府 : 공부) 계탐도에서 본 탐이라는 동물 (daum.net)

 

꽁푸(孔府 : 공부) 계탐도에서 본 탐이라는 동물

공자의 고향인 취푸에 가면 꽁푸(孔府 : 공부)의 외채와 안채를 가르는 문의 조벽에는  한 마리의 동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상상의 동물이지만, 그곳에 그린 동물은 틀

blog.daum.net

 

그냥 저렇게 방치하지 말고 저곳도 잔도로 보수해 개방하면 좋지 않을까요?

다리를 건너가 봅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예전에 잔도가 지나간 길 위로는 이제 새로운 중국의 모습이 보입니다.

 

어제 우리가 버스를 타고 진령산맥을 넘어 보계라는 도시에서 한중으로 올 때 지나온 길입니다.

그러니 그 길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위치만 다르지 방향은 같은 길이네요.

다만, 터널을 뚫고 다리를 놓고 포장을 했으며 넓게 만들어 자동차가 달릴 수 있게 했다는 점이 다르겠네요.

 

여기는 제법 온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저 앞에 석문이 보입니다.

저 석벽을 뚫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을 정을 두드렸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을까요?

덜수의 말에 의하면 여기에서 일할 때 발목에 족쇄를 차고 매일 정으로 돌을 쪼아 석문을 만들고

길을 다듬었다 합니다.

당시 덜수의 모습을 상상해 그린 그림이 한중 박물관에 걸려있습니다.

 

어느 날 덜수의 손에서 망치가 힘없이 툭~ 하고 떨어지는 그날이 덜수 발목에 채웠던

족쇄가 풀리는 날이었을 겁니다.

덜수는 이곳에 끌려온 후 이렇게 생을 마감한 후에야 여기를 벗어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또 다른 덜수 2가 그 자리를 이어서 발에 족쇄를 차고 덜수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또 돌을 깨기 시작했을 겁니다.

 

돌이나 흙이 굴러 떨어지는 곳은 이렇게 지붕을 만들어 놓았네요.

아! 얼마나 많은 땀방울이 잔도 위에 떨어졌을까요?

또 얼마나 많은 한숨소리가 이 잔도 위에 들렸을까요.

잔도는 이렇게 한숨과 눈물과 마지막에 잔도공의 피를 먹고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석문잔도라는 글이 보입니다.

그러나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네요.

지금 우리가 보는 이 길이 바로 옛날부터 있었던 오리지널 잔도입니다.

 

한중에서 잔도라고 하는 곳은 댐 위에 만든 최근에 수몰된 후에 만든 가짜 잔도입니다.

어제 포스팅한 곳에 보았던 그 모습의 잔도 말입니다.

그곳은 수몰된 원래 잔도보다 80m나 위에 만든 신설 잔도라는 말이겠네요.

 

전국시기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이곳 포사(褒斜)잔도는 당시 중원과 익주를 잇는

대단히 중요한 통로였을 겁니다.

당시 사람들은 진령(秦嶺)산맥을 지나기 위한 길이 필요했을 겁니다.

고립을 벗어나 서로 교통하며 지낼 바로 사랑의 길 말입니다.

문명이 교류하고 인간과 인간의 교통이 이루어졌던 길 말입니다.

 

계곡을 따라 깎아지른 듯한 석벽 면에 구멍을 뚫고 가로막대를 박은 다음 그 막대 위를 나무판을 덮어

 잔도를 만들었을 겁니다.
비록, 부서지고 깨어지고 잔도 바닥의 나무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 자리가 예전의 모습이지요.

그렇다고 저 구조물이 옛날의 모습은 아니겠지요.

옛날에 시멘트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바로 이 자리에 만들었을 텐데요.

 

어느 책에 보면 저 모습이 진짜 잔도의 모습이라 합니다.

왜?

잔도의 바닥을 나무로 덮은 모습은 잔도가 한참 만들어진 한참 후 의 일이라 합니다

최초의 잔도는 바로 석벽에 구멍을 내고 나무나 돌로 박고 징검다리처럼 그 위를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게

진짜 잔도라 합니다.

그 후 안전하게 다니기 위해 가로 막대 위로 판자를 깔았다고 하더군요.

 

그 후 수레나 안전한 통행을 위해 그 가로막 돌 위나 나무 위에 판자를 덮어 지금처럼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합니다.

그 말이 맞는 말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조형물은 너무 오바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잔도가 무슨 고속도로입니까?

마차와 말이 시속 100km의 속도로 달리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공명이 잔도를 통해 물자를 나르기 위해 우마차는 다니기 어려워 만든 게 바로 목우유마입니다.

이렇게 말이 달리면 공명이 왜 목우유마를 만들었겠어요?

공명이 바보입니까?

지금 벤허라는 영화의 마차경기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기라도 하려는가요?

그러나 중국에서 처음으로 말이나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잔도는 여기였다고 합니다.

 

길을 내다가 위의 사진처럼 큰 바위산을 만나면 옛날에 저 바위산을 뚫을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우공이산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그러면 사진처럼 그 석벽을 따라 돌아가는 길을 내기 위해 석벽에 구멍을 내고 잔도를 만들지 않았겠어요? 

 

이렇게 고생하며 만든 잔도는 주로 나무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훼손되기 쉬울 겁니다.

수천여 년의 세월 동안 몇 번이나 훼손되었다가 다시 고쳐 지어졌을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네요.
이를 수시로 고치고 보수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는 생각을 하니 인간의 삶이 참 모질고 퍽퍽했을 것 같습니다.

 

어디 잔도만 사라졌겠어요?

잔도를 따라 석벽 위로 수없이 많은 글과 그림도 물에 잠겼을 겁니다.

아니라고 하네요.

 

 석문십삼품(石門十三品)이라는 유명한 석각은 1970년대 이곳 댐 건설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나

 지금 한중박물관인 고한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내일 한번 구경하고 가렵니다.

그러나 예술적 가치가 조금 떨어진다거나 수준이 미치지 못한 작품은 대부분 포사잔도의 원형과 함께 

영원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위의 사진은 조조가 여기 한중에 있을 때 썼다는 글인 곤설이라는 글입니다.

이 또한 지금 석벽을 뜯어 한중박물관에 보관했다는군요.

원본을 말입니다.

내일 고한대를 가면 꼭 사진으로 찍어 보여 드릴게요.

진짜 조조의 친필 원본 말입니다.

 

한중개한업...

한중에서 한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말일 겁니다.

 

소담정(笑談亭)이라는 정자가 회랑으로 이어지네요.

소담이라는 말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말이 아닐까요?

소담이라는 말은 명대 양신(楊愼)이라는 사람이 쓴 임강선(臨江仙)이라는 삼국지연의 서사에 쓴 글에 나오는

말로 그 글의 제일 마지막 줄에 일호탁주희상봉, 고금다소사, 도부소담중

(一壺濁酒喜相逢, 古今多少事, 都付笑談中)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의미는 "탁주 한 병 놓아두고 기쁘게 만나

고금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웃으며 나누는 이야기에 부처 보리라."

라는 의미라 하네요.

오늘 우리도 佳人과 더불어 삼국지연의에 빠져 웃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어떻겠어요?

탁주는 준비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악비 모친이 악비 등에 글자를 새겼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지요? 

잔도는 사랑과 문명의 이동보다 오히려 전쟁이라는 것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오고 갔을 것입니다.

이곳을 서로 먼저 점령하려고 했을 것이고 또 유방이나 위연이 했던 것처럼 지나온 잔도는 불살라 버렸을 겁니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었습니다.

유방이 한중으로 도망올 때 불을 질렀지만, 다시 이듬해 중원으로 나가기 위해 또 수리합니다.

우물물에 침을 뱉고 떠났지만, 나중에 다시 돌아오면 그 우물물을 먹어야 합니다.

세상이 인간만이 하는 어리석은 행동이지요.

개는 우물물에 침을 뱉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적벽대전에서 인생 최대로 패배의 쓴맛을 본 조조는 잠시 숨을 고른 뒤 61세가 되던 해 다시 군사를 모아

장로가 다스리던 한중 땅을 공격했습니다.

그 목적은 여기를 교두보로 삼아 지금의 청두인 익주를 삼키기 위한 일이었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이루어지겠어요?

8개월 정도 지나자 그게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너무 험난한 길임을 알게 되었지요.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것보다 더 힘들자는 이백의 촉도난을 몸으로 느낀 거라고 봐야 하겠지요.

조조는 무척 현명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조조는 잠시 장안으로 돌아간 사이 이번에는 유비가 올라옵니다.

이미 우리가 정군산에서 그런 유비를 만났지요.

황충이 하후연을 단칼에 보내며 조조의 재 집입도 마음속으로 계륵이라 생각했기에 승리할 수 없는 전투를

조조는 한 겁니다.

유비는 한중왕에 오르는 기쁨을 보았습니다.

유방 따라 하기가 아주 재미있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유비는 천하가 손에 들어오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조조가 "짚신이나 짜던 애송이"라고 비하했지만, 어디 그런 욕이 배째고 들어온답니까?

맨날 2부 리그나 조기 축구회만 전전하다 드디어 유비도 번듯한 프랜차이즈를 갖고 프리미어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명함에 한중왕이라 반듯하게 새겨 금칠로 도배하고 길거리에 서서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막 뿌렸을 겁니다.

이것으로 삼국지의 이야기가 제대로 된 삼국의 출현이라 해야 하겠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포사계곡을 이어주는 다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리 이름이 정인교입니다.

정인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겠어요?

 

사랑하는 나의 情人이시여~

어디로 가시나요.

당신의 情人은 여기에 있습니다.

난 늘 당신에 빚을 지고 살았습니다.

언제나 佳人은 당신에게 빚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정녕 당신은 佳人 곁을 떠나시렵니까?

 

여기에 이런 정인교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님과 함께 이런 출렁다리를 건너보시는 것은 어떻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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