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1. 08:00ㆍ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오늘은 석문잔도에서 본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야기가 무척 지루합니다.
석문잔도 풍경구는 사실, 그냥 다리 같은 잔도만 보면 되는 곳입니다.
佳人의 이야기가 지루하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오늘은 그냥 패스하시기 바랍니다.
중국을 대표하는 글자를 한마디로 말하면 漢이라는 글자일 겁니다.
한자(漢字), 한문(漢文), 한족(漢族) 등 중국과 관련된 수많은 단어에는 한(漢)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는데 그 기원은 한 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漢)나라에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게다가 한나라는 바로 여기 漢中에서 시작했다고 한나라가 되었지 싶습니다.
중국인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글자가 漢이라는 글자일 겁니다.
그런데 그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오늘 우리가 두리번거리고 구경하는 漢中에서
시작했다고 봐야 하니 여기가 바로 중국의 시작이며 정신적인 지주인 셈입니다.
오늘은 한중의 대표선수라고 하는 명물인 잔도를 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유방이 한중에서 힘을 키워 이 잔도를 통해 진창도를 지나 진령산맥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가 항우와 결판을 냈을 겁니다.
한중왕으로 쫓겨올 때도 이 잔도를 통해 들어오며 항우의 추격을 막으려고
잔도를 불태워버렸을 겁니다.
한중시에서 북서쪽으로 18km 떨어진 곳에 있는 석문잔도 풍경구(石門棧道風景區)로 갑니다.
석문잔도는 한중시에서 북쪽 진령산맥으로 이어지는 입구에 있는 협곡의 잔도입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면 무척 험한 길이 맞습니다.
공명이 북벌을 하며 장안으로 나가는 길을 여러 가지로 놓고 고민했을 겁니다.
중원인 장안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은 무척 좁고 험한 길인 위연이 주장한 자오곡이었고,
사마의 중달도 만약 이 길로 공명이 군사를 이끌고 넘어왔더라면 위나라는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장안이 함락당했고 장안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했던 길입니다.
그러나 공명은 5차에 걸친 북벌을 감행하며 한 번도 자오곡을 염두에 두지 않았지요.
왜?
그 길은 워낙 길이 협소해 많은 군사가 일시에 이동하기에 어려웠고 적은 위나라 군사의
매복만으로도 촉군의 진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때 위연은 5천 의 군사만 주면 먼저 그길을 통해 장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공명은 끝내 거부했지요.
그리고 방어하는 처지에서 숨기에 좋아 매복군이 협곡 위에서 공격하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라 여겼을 것이고요.
그래서 1차 북벌에서는 많은 군사가 가장 빨리 북으로 나갈 수 있는
왼쪽의 기산도로 진출했나 봅니다.
천수를 우선 점령한다는 말은 바로 서량군의 진출을 막기 위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
뒤가 열려 있다면 언제나 불안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는 공명이 북벌을 계획하기 전에 남방을 미리 정리하려고 남정을 떠났던 일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요?
그때 칠종칠금이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만들었지요.
물론 칠종칠금은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이지요.
지금은 석문잔도라고 부르지만, 사실 포사(褒斜)잔도가 맞는 말일 겁니다.
춘추전국시기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포사잔도는 당시 중원에서
촉(蜀)으로 들어가는 주요 통로로 만들어졌을 겁니다.
아니라고요?
반대로 촉에서 중원으로 나가는 길이라고요?
그럴 겁니다.
석문잔도는 아래로 내려가며 금우도와 연결되었으니까.
금우도의 재미있는 사연은 나중에 그곳에 가면 이야기할까 합니다.
왜 석문잔도는 한중의 대표선수일까요?
역발산기개세라는 명문가문 출신 항우의 암수에 걸려 홍문의 연에 초대되어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쫓겨 바로 이곳으로 줄행랑친 시정잡배 출신인 유방이
여기 한중에 왔고 한중왕으로 봉해졌다 합니다.
그는 여기서 몰래 숨어 힘을 키우고 군비를 비축한 다음 진창도라는 험한 길을 따라
진령산맥을 넘어 방심하고 있던 항우와 결전을 벌여 승리를 쟁취하고
진시황에 이어 두 번째로 천하제패를 했다지요.
위의 사진을 보시면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渡陳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밝을 때 잔도를 보수하고 어두울 때 진창도로 건너간다는 말이지요.
이 말의 의미는 겉으로는 잔도를 보수하는 척하며 몰래 진창도를 통하여
북진했다는 의미일 겁니다.
유방은 자신의 능력과 힘을 알았기에 전면전보다는 이렇게 상대를 암심시킨 후
몰래 힘을 키워 일거에 진격해 적의 뒤통수를 치며 예봉을 꺽고 천하를 품은 사람이라죠?
유방은 한중이라는 곳이 뒤로 호박씨 까는 곳이죠.
위의 사진을 보시면 지금 부지런히 잔도를 통해 군사가 몰래
중원을 향해 북진하는 중입니다.
호박씨 깠던 일은 옛날이죠.
이렇게 하여 유방과 항우가 오강에서 만난 이야기인 오강자문(乌江自刎)이라는
이야기를 나타낸 것이네요.
항우는 유방과의 전투에 패하며 쫓기는 신세가 되고 결국 더는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며 오강에서 스스로 목을 베어 자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일 듯합니다.
자문(自刎)이라는 말이 스스로 목을 벤다는 말이니까요.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당시 항우와 유방의 전력차이는 비교불가가 아니었나요?
이런 유래가 있기에 공명은 5배의 국력 차이를 알면서도 북벌을 계획했나 봅니다.
유비도 유방을 흉내 내 베끼기 마케팅에 들어갑니다.
우선 홍문연을 먼저 베꼈지요.
바로 부성연이라고 하는 부성의 연회가 지금의 면양 부락산에서 열렸습니다.
서천의 주인인 유장이 자기를 도우려(?) 군사를 이끌고 서천으로 들어온 유비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연회를 열어주었죠.
이때 연회에 초대받은 유비의 장수인 위연이 연회장소에서 칼춤을 추며
기회를 보아 유장을 참살하려고 했잖아요.
위의 사진을 보면 왼쪽의 방통이 시나리오를 쓰고 가운데 항충이 묵인하고
오른쪽 끝에 앉은 위연이 주연을 맡아 칼춤을 추었지요.
지금 위연의 오른손이 뒤에 숨긴 칼을 잡고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은 홍문연은 주최자가 사고 치려 했지만, 부성연에서 초대받은 자가
역으로 주최자를 참살하려는 깜찍한 일을 꾸민 게 다른 점이라고 봐야 하겠네요.
앙증맞은 위연의 모습으로 보세요.
방통이 위연에게 처음 이 책임을 맡기자. 위연이 뭐라 했는지 아세요?
"이 나이에 내가 하리?"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니 한중은 사실 한나라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라 봐야 할 겁니다.
한중이라는 땅은 한나라의 꿈과 희망인 동시에 절망으로 끝난 한이 서린 그런 땅이 되었네요.
유방이 시작했지만, 창업하고 키워놓았더니만, 세월이 흐르며 점차 기울어져 갑니다.
그리고 비실거리는 한실을 재건하고자 유비가 촉한(蜀漢)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공명이 선제 유비의 유지를 받들어 여기 한중(漢中) 지역에 주둔하면서 한 제국 부활을 위해
북벌을 감행하다 죽으며 더는 한나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잖아요.
이런 점에서 한나라는 한중 지역에서 시작하여 한중 지역에서 끝났다고 봐야 하겠지요.
한중은 지리적으로 바로 진령산맥(秦嶺山脈 : 친링산맥)의 뒤에 숨어있습니다.
이 산맥이 얼마나 험한지 옛날부터 촉도난(蜀道難)이라고 불릴 정도라 합니다.
중원에서 한중으로 들어오려면 바로 이런 험한 산을 넘어야 한다네요.
오죽했으면 조조도 여기를 계륵(鷄肋)이라고 했을까요.
기원전 206년 4월 항우는 내심 관중 지역의 왕이 되기를 바라고 있던 유방을 한중왕에
봉하고 진령산맥 너머로 보냈으니 유방이 얼마나 섭섭했을 것이며 후일을 도모했을까요?
결국, 이런 불만이 유방을 이듬해 진창도(陳倉道)를 통해 관중 지역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통일하게 했는지 모릅니다.
쇠는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진다 했나요?
후일 소하(蕭何)의 진언에 따라 유방은 배장단을 만들고 한신을 대장군에 임명하는
거창한 의식을 치릅니다.
바로 그 장소가 여기 한중에 있기에 어제 슬쩍 들여다보았습니다.
유방은 “왕께서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려 한다면 반드시 좋은 날을 골라 재계(齋戒)하시고
단장(壇場)을 하신 후 의식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라는 소하의 말에
그대로 따라 한신을 얻었지요.
유방이 항우와 비교해 뛰어난 점이 바로 훌륭한 참모를 두었고
참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는 점일 겁니다.
항우는 명문가 출신에 유방의 조폭 출신과는 처음부터 비교 대상이 아니었지요.
항우와 비교하면 모든 게 열세였던 유방이 천하를 얻게 된 이유는 바로 인재를
알아보고 등용해 썼다는 점이죠.
그날 한신을 대장군에 앉힐 때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혔다 하니 한신은 뻑~ 소리나게 갈 수밖에요.
이게 삼고초려처럼 아랫사람을 견마지로를 다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바로 삼고초려도 유방이 한신을 대장군으로 모시며 치렀던 의식을
베끼기 했다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소하는 바로 서서나 수경 선생인 셈이고요.
그러면 개나 말처럼 신 나게 달리다가는 어떻게 되죠?
맞습니다.
그놈은 개나 말처럼 지쳐 과로사로 죽지만, 부린 사람은 목적달성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한신은 토사구팽당했으며 공명은 과로사로 죽게 되네요.
모든 여건이 항우의 발꿈치 때만도 못했던 유방이 항우를 넘어선 것은 사람을 부리는
기술이 뛰어났다고 봐야 하며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잖아요.
소하의 건의에 따라 항우 밑에서 빌빌거리던 한신을 친히 자신의 옷을 벗어 입히며
거창하게 대장군 취임식까지 열어가며 수하로 모시니 한신은 나중에 사냥이 끝나고
가마솥에 삶아지는 사냥개가 되는지도 모르고 힘을 다해 유방을 위해 한평생을 살았다고 하잖아요.
비록 작은 구멍가게를 하더라도 이렇게 사람을 부리면 사업도 번창할 것 같습니다.
고생하는 직원을 위해 추운 날 입고 있던 자신의 오리털 점퍼라도 벗어 직접 입혀줍시다.
그 직원 사이즈에 맞는 옷을 미리 사서 입고 와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 직원은 회사를 위해 견마지로를 다 할 거예요.
이렇게 유비는 유방이 했던 일을 하나씩 그대로 재연하듯 따라 했던 따라쟁이였나 봅니다.
유비가 한중을 공략하고 한중왕에 오른 것도 유방 따라 하기라 봐야 할 겁니다.
왜?
그래야 천하가 유비가 유일한 적자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이게 다 공명의 지시에 따른 일이라 봐야 하겠지요?
그다음 유비가 죽은 후 공명은 여기에 진을 치고 석문잔도와 진창도를 보수하며
8년 동안이나 때를 기다리다 드디어 북벌을 실행에 옮겼으니 이 또한 유방의 기를 받아
천하제패를 그렸을 겁니다.
공명의 발명품인 새로운 운송수단이라는 목우유마도 만들며 말입니다.
위의 사진이 목우유마를 만드는 모습입니다.
공명은 이곳에 공방을 열어 목우유마를 많이 만들었다네요.
그 결과 좁은 잔도를 통하여 군수물자를 옮길 때 우마차 보다는 외발로 된
목우유마가 무척 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공명이 하지 못한 것이 아래 사람 부리기에 실패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워낙 워커홀릭이었기에 모든 일을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정해 처리하다 보니
과로사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지 않았을까요?
수하에 믿고 맡길 장수 하나 변변히 없었습니다.
물론, 강유라는 젊은 피를 수혈했지만, 검문관에서의 방어를 빼고는
사실 그 활약은 미미했잖아요.
처음 천수성에서 등장해 공명과 마주하며 그의 활약을 그린 이야기를 읽을 때
청출어람이라 생각했지요.
공명을 뛰어넘을 이거 물건이네~ 라고 생각했지만, 그 후 강유의 활약은
그만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지 못했을 겁니다.
여기는 중원이라는 곳에서 거리상으로는 먼 곳이 아닙니다.
약 500km 떨어진 곳이지만, 중국에서의 500km란 그리 먼 곳이 아니죠.
다만, 그 사이를 가로막은 진령산맥이 워낙 험하기에 왕래가 없어
처음에는 서로 멀뚱거리며 살았을 겁니다.
역시 한중의 자랑은 유방으로부터 시작하나 봅니다.
위의 벽에 만든 조형물이 눈에 띠이네요.
참사기의(斬蛇起義)에 대한 것을 만들어 놓았네요.
이는 유방이 젊은 시절 여산으로 가는 도중 구렁이를 만났답니다.
위의 사진처럼 유방은 칼을 들어 비암을 단칼에 베어 죽였답니다.
그때 노파가 나타나 울면서 적제(赤帝)의 자식이 나타나 백제(白帝)의 자식인
내 아들을 죽였구나!"라며 울부짖었다 합니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장차 자신이 진나라를 멸하고 새 나라를 세운다는 계시로 생각하고
나중에 기의 했다는 이야기를 여기에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실, 당시 유방은 날건달로 살아가던 때가 아닌가요?
여기도 용비어천가가 있었다는 말인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오늘은 두보가 지은 시 한 편 보고 갑니다.
茅屋爲秋風所破歌(모옥위추풍소파가) -가을바람에 띠 지붕 날아가
八月秋高风怒号,卷我屋上三重茅。茅飞渡江洒江郊,高者挂罥长林梢,下者飘转沉塘坳。
南村群童欺我老无力,忍能对面为盗贼。公然抱茅入竹去,唇焦口燥呼不得,归来倚杖自叹息。
俄顷风定云墨色,秋天漠漠向昏黑。布衾多年冷似铁,娇儿恶卧踏里裂。
床头屋漏无干处,雨脚如麻未断绝。自经丧乱少睡眠,长夜沾湿何由彻!
安得广厦千万间,大庇天下寒士俱欢颜,风雨不动安如山。
呜呼!何时眼前突兀见此屋,吾庐独破受冻死亦足!
팔월이라 가을 되어 거센 바람 불어와 띠로 이은 세 겹 지붕 둘둘 걷어가니,
강 건너 날아간 띠 강기슭에 흩어졌네.
높은 것은 나뭇가지 끝에 걸리고, 낮은 것은 바람에 쓸려 진창에 빠졌네.
남촌 아이들 노쇠한 날 얕보아 뻔뻔스레 내 앞에서 도둑질을 일삼네.
보란 듯 띠를 안고 대숲으로 사라지나, 입술 타고 입은 말라 소리도 못 치네.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어 탄식하니, 잠시 후 바람 자고 먹구름 드리우며 가을 하늘 아득히
어둠이 짙어가네.
오래 덮은 베 이불은 쇠붙이처럼 차고, 잠버릇 나쁜 아이 이불 속을 발로 찢네.
자리마다 비가 새어 마른 곳이 없는데, 삼대 같은 빗발은 그칠 기미가 없네.
난리를 겪은 후로 밤잠마저 줄었으니, 눅눅한 자리에서 긴 밤 어이 세우나.
어찌하면 천만 간 커다란 집을 지어, 가난한 선비들과 기쁜 얼굴로 풍우에도
끄덕없는 편안함을 누릴까.
아아! 언제나 그런 집을 지을까. 나는 얼어 죽어도 그리만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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