궈량촌 돌 틈 사이에 숨어있는 이야기들

2012. 5. 28. 08:00중국 여행기/하남성(河南省)

위의 사진에 보이는 관경대는 한꺼번에 15명 이상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있는 곳입니다.

그 이유는 다리로 연결해 놓은 바깥 부분은 촛대 모양으로 따로 떨어진

절개 부분에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화 봉송대처럼 생긴...

여기에 올라서면 건너편 절벽장랑을 아주 잘 볼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곳에다 관경대를 만들어 놓고 즐기는 민족인가 봅니다.

위험하게 생겼으면 아예 출입을 금지하던가 해야지 만들어 놓고

여러 사람 한꺼번에 올라가지 말라니...

오늘 우리와 함께 올라온 중국 단체 여행객이 아주 요란스럽게 마을을 휩쓸고 다닙니다.

 

어디 옆에서 한 번 바라볼까요?

절벽과 떨어진 크랙이 보이시죠?

중국이라는 나라는 가끔 지진이 발생하는 나라잖아요.

그런데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모르겠네요.

 

어디 이 마을의 다른 즐거움도 찾아볼까요?

네.. 그랬습니다.

난간도 만들지 않고 사람의 출입을 허용하는 관경대도 있습니다.

사진 찍는 사람의 왼발이 버티기에 들어갔네요.

더는 끝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자세로 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인들은 저런 곳에 서서 기념사진도 찍더군요.

생과 사를 초월하여 살아가는 아름다운 나라가 중국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 드느뇨.

잠시 짧은 시간 호흡하다 가는 게 인간이 아니 드느뇨~

 

작은 마을이라 생각해 밥은 먹을 수 있을까 염려하여 비상식량도 준비하고 떠났습니다.

그곳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면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혹시 돌아오는 버스는 몇 시에 막차이며 못 나오게 되면 잠은 그곳에서 잘 수 있을까?

좌우지간 두려운 마음을 안고 떠났습니다.

 

아무리 두려워도 그곳에도 사람이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 부부는 두려움보다 설렘을 안고

시골 시외버스를 타고 들어왔네요.

  결국, 여기도 중국의 여느 관광지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또 하나의 세상을 보았습니다.

 

이런 곳을 보면 존경을 해야 하나 아니면 미련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고 해야 하나 도무지

판단할 수 없으며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중국이 땅이 넓은 나라라고 하지만 그 인구에 비하면 그리 넓은 나라가 아닌가 봅니다.

우리 남한의 거의 100배에 달하는 넓은 국토로 세상에서 4번째로 큰 나라이기에 집을 짓고

살아가기에는 큰 불편이 없을 거라는 편견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멀리 아래 보이는 저곳을 당겨보았습니다.

갈림길이 보입니다.

왼쪽 아래로 보이는 길이 바로 궈량촌으로 올라오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굽은 길이 난핑으로 가는 길로 지금은 난핑에서 이곳으로 올라오는 길도 있어

절벽장랑을 따라 굳이 올라오지 않아도 된다는군요.

  

그러나 일부러 오지까지 찾아가지 않더라도 이런 불편한 곳에 살아가는 사람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평야 지대도 많지만, 이런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이 땅의 문제만이 아니라

역사상 무수한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런 세상을 등지고 싶어 숨어들어 살아가다가

이렇게 된 곳도 많을 겁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연기가 나고 침대 시트를 널어놓은 곳 앞에 절벽이 보이실 겁니다.

아까 난간도 없는 곳에서 사람이 모여 사진을 찍었던 장소입니다.

지금도 몇 사람이 그곳에 있군요.

 

이제부터 전설의 고향 이야기를 알아봅니다.

그러니 아주 오래 전인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그때는 神들도 무척 많이 살고 있어 앞산에도 뒷산에도 그리고 물밑에도 동굴 속에도

무지하게 많은 신이 살고 있었을 시기입니다.

우물 속에도 화장실에도 신이 없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을 겁니다.

물론, 제대로 된 신도 있었지만, 잡신도 많고 중국이니까 당연히

짝퉁 신에 불량품 신도 있었을 겁니다.

 

중원에는 진한(秦漢) 시대가 시작되었을 시기였을 겁니다.

중원이라는 곳은 원래 살기 좋은 곳이라 주변에 사는 모든 민족이 서로 째려보고 노리기에

개나 소나 황제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 여기저기서 작당하여 무지하게 치고받았을 때.

 

진협(晋陜) 일대에 살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을 찾던 중 태항산 속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는데 이곳 태항산은 산세가 험악하기에 난을 피해 숨어들기만 하면

제 목숨만큼은 평생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잖아요.

사람이 자꾸 모여들다 보니까 자연히 마을이 생겼고 그 마을을

궈량춴(郭亮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말로 곽량이라고 하면 사람 이름 같지 않나요?

맞답니다.

바로 이 마을 이름인 곽양은 사람 이름에서 유래했다 합니다.

 

전한의 야심가인 왕망(王莽) 시대(BC45~AD 23년)에 자신이 옹립한 平帝를 독살하고

제위를 빼앗아 국호를 新으로 하고 한참 오만방자하게 거들먹거릴 때였다고 하네요.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동한의 장수 궈량은 농민 봉기군을 이끌고 이곳에 진을 치고

왕망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합니다.

  

곽량촌은 해발 1.297m이며 산서와 하남 두 성 사이에 있는데 산이 높고 절벽이 험하고

협곡이 깊고 수목이 우거져 있고 지형 자체가 천혜의 요새와 같기에 적은 병사로도

많은 적을 물리치기에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여러 차례 관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를 거듭하다 태항산(太行山)까지 밀렸지요.

관군은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궈량이 이끄는 농민군을 쉽게 진압하지 못하자

궈량의 부장 조우쥔(周軍)을 매수했다네요.

세상 어디나 이렇게 일신상의 이유로 변절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요.

남들은 변절이라 하지만, 그것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본인은 구국의 용단이고 민족과 조국을 위한 일이라 강변합니다.

신내림을 받았다고 하려나요?

 

태항산의 지리에 밝은 조우쥔은 산문을 봉쇄해 궈량의 군사들을 고사시킬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워낙 험한 곳이기에 들고나는 문만 봉쇄하면 그 안에서 자연히 굶어 죽거나 제 발로 기어 나와

항복하게 되지요.

그러나 가파른 절벽 위에다 배수의 진을 친 궈량이 꾀를 냈습니다.

물론 지금 궈량촌으로 오르내리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절벽장랑은 없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양식이 바닥나는 등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지만, 사병들에게 북을 치게 하고

절벽 끝 나무에는 산양을 묶어 놓았습니다.

북소리가 날 때마다 산양은 북소리에 놀라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동작을 반복했답니다.

 

멀리서 절벽 아래에서 올려다본 조우쥔과 관병들은 궈량이 큰 싸움을 준비한다고 착각해

잠시 공격을 미루게 되고 궈량은 이 틈을 타 재빠르게 절벽에 밧줄을 걸고 병사들을

아래쪽으로 내려보낸 뒤 산서(山西)성으로 피신시켰다네요.

이곳이 바로 산서성과 하남성의 경계지역입니다.

 

어때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나요?

사실 중국은 아무리 시골 구석진 곳의 이야기라도 그 자체가 영화의 소재로 아주 잘 어울리는

나라이기도 하기에 지금도 바라보기만 해도 몸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의 아찔한 절벽인데

여기가 어디라고 밧줄 타고 절벽을 내려와 도망을 한다는 말인가요?

저 같으면 밧줄 타고 내려오다 기절해 죽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래픽으로 처리해 주실 거죠? 감독님!

 

며칠 뒤 산양은 먹지 못해 결국 굶어 죽었습니다.

환장하게도 먹지도 못하고 수시로 북소리에 놀라 뛰어다니다 보니 기진맥진한 산양은

저절로 죽어버린 게지요.

자연히 북소리도 그쳤겠지요.

죽은 놈 뭐 만저 보기지 죽은 양에 북을 쳐본 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런데 북을 쳤다는 그 사내는 어찌 되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누구 하나 물어보지도 않고 답도 없습니다.

 

북소리가 그치자 정탐병을 보낸 조우쥔은 그제야 궈량의 현양뢰고(懸羊擂鼓)라는 지략에

속았음을 깨달았는데 현량뢰고(懸羊擂鼓)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남을 속이기 위해 북을 쳐

양이 놀라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말이라네요.

이래서 또 하나의 중국에서 사자성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에요.

 

조우쥔은 적이 모두 탈출하고 죽은 양 한 마리만 남았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하도 기가 막혀

피를 토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비명횡사해 버립니다.

죽음은 산양 한 마리로 족하지 지는 왜 죽는답니까?

정말 싱거운 사람이네요.

지금 절벽 아래 조우쥔이 묻힌 곳을 조우쥔장(周軍場)이라고 부른답니다.
 

궈량춴이니 현양뢰고니 조우쥔장의 이야기는 모두 이렇게 마을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후세 사람들은 궈량의 용기와 지략을 기리기 위해 궈량이 주둔했던 절벽도

궈량야(郭亮崖 : 곽량애)라 부릅니다. 
바로 이 절벽을 따라 마을 사람이 정으로만 절벽 바위를 쪼아 길을 낸 겁니다.
어찌 보면 엽기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인간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궈량은 이렇게 태항산 기슭 깎아지른 절벽 위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난을 피해 모여든 사람들이 자연히 촌락을 이루고 살아가며 만들어진 자연부락입니다.

현재는 약 80여 가구에 300여 명의 주민이 살아가고 있다네요.

 

사람의 힘만으로 마을 주민이 직접 길을 낸 궈량동(郭亮洞)은 세계적으로도 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알려지며 특이한 모습의 도로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네요.

이 터널이 완공되기 전에는 옛날부터 마을에서 외부와 통하는 길은 오직 협곡과 절벽 위를

이어주는 천제(天梯)라는 사다리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다 보니 사고도 자주 일어나고 오르내리는 일 자체가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하고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천제라는 사다리가 있는 자리는 전망대에서 절벽장랑을 바라보고

절벽 위의 제일 오른쪽 끝에 있다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곽량에서 계속 가면 애상인가가 나타나고 그 길로 가면 남평으로 가는 길입니다.

남평은 절벽 아래고 곽량을 절벽 위의 마을로 이제는 이 길도 차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길을 걸어야만 절벽장량의 전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모습을 담기 위해서는 절벽 길만 걸어서는 안 됩니다.

절벽장랑이라는 터널길도 걸어보아야 합니다.

이곳은 원을 그리며 궈량촌과 난핑촌을 모두 돌아보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