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화신 서태후 6 - 서태후, 날개를 달았습니다.

2011. 8. 23. 00:04佳人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여인 열전

11월 1일 자희와 황태후인 자안은 양심전, 동난각에서 수렴청정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양심전은 옹정제부터 8대에 걸친 황제의 집무실이며 수렴청정을 했던 곳이고

마지막 황제 푸이가 퇴위서에 서명을 했던 곳으로 청나라의 역사를

모두 겪은 건물이 되었습니다.

 

서태후라고 부르는 이유도 자희태후가 기거했던 곳이 바로 자금성의 서쪽에 있는

서륙궁에 있는 저수궁에서 기거를 했기 때문입니다.

채화전은 개인 식당으로 사용했고 양심전에서 수렴청정을 하며

서쪽에서 놀았다고 서태후라 부릅니다.

 

반대로 자안태후는 동쪽에서 기거하였기에 동태후라고 불렀답니다.

노는 물이 다르기에 부르는 일 또한 달랐지요.

그리고 재원은 처음 정했던 연호인 기상(祺祥)을 동치(同治)라고 바꾸게 되는데 동치란

같이 다스린다는 의미로 두 궁의 황태후와 어린 황제가 함께 나라를 다스린다라는 의미라 합니다.

이렇게 같이 권력을 나눈다는 의미는 나중에 하나는 불행해져야 합니다.

세상에 권력을 함께 하는 일은 나폴레옹도 '여자와 권력은 함깨 나눌 수 없다.'라고

웃기지 마라고 했잖아요.

 

이때 자희의 나이가 겨우 스물일곱...

佳人은 스물일곱에 무엇을 했던가?

여러분은 스무일곱에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신유년에 일어난 일이라 신유정변이라 하며 이때부터 48년간 자희의 "생각대로 하면 되고."의

세상이 시작되는 해입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는 힘의 역학관계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냅니다.

그리고 그 힘이 벽에 부딫히면 어떻게 풀어가야 하느냐를 이미 느낌으로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작금의 현실이 이미 청나라의 힘은 서구 열강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비록 무리한 요구지만, 서구 열강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반면 대내적으로는 세력을 규합하여 태평천국군과 소수민족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자신의 심복을 키우고 반대하는 자를 제거하며 자신의 위치를 점차 강화시켜 나아갑니다.

점차 이런 일이 먹혀들어가자 강한 힘을 바탕으로 거침없이 독재의 길로 접어듭니다.

그녀가 행복해 할수록 나라는 불행해집니다.

 

동치 12년(1873)

관례에 따라 18세가 된 황제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자희태후는 2선으로 물러납니다.

18세라는 의미는 이제부터 성인으로써 혼자 세상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나이라는 의미겠지요.

그러나 동치제는 띨띨한 녀석이라 만사가 시원치 못합니다.

 

어쩝니까?

자희는 황제의 사생활에 모두 끼어들어 밤 놔라 대추 놔라고 했고 동치제의 마누라인

후비와 갈등을 겪기도 햇습니다.

결국, 황제는 미복을 하고 태감을 앞세워 홍등가를 전전하다 드디어 몹쓸병에 걸려

이듬해 12월 세상을 하직합니다.

누구는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고 하더군요.

 

평소 동치제와 자희 사이에는 모자간의 정이 없었다 합니다.

동치제는 오히려 자안태후에 문안인사를 할 때는 그곳에 머물려 대화도 나누었지만,

생모로 추정되는 자희와는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니 아무래도 괴이하고 이상한 일입니다.

후대사람은 이런 이상한 관계를 친자와 생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서태후가 권력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사실 동치제가 권력이 넘어 왔어도 두 사람은 자주 다투었고 그때마다 이미 자희의 사람으로

채워진 궁에서 황제는 껍데기 뿐이었습니다.

손발이 다 묶인 상태에서 동치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색잡기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죽었기에 동치제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나라의 불행은 서태후의 행복입니다.

사실 동치제의 황후에게는 임신한 아이가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게 아들인지 딸인지 알수도 없고 설령 아들이더라도 황제의 자리를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마냥 비워둘 수도 없습니다.

결국, 며느리는 이 일로 말미암아 자살을 하게 됩니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천륜도 어찌하지 못하나 봅니다.

그게 자살이라고 공식 발표는 했지만, 서태후의 성격으로 보아 타살 일 수도 있다는게 정설입니다.

 

규정에 따라 황제보다 항렬이 아래인 자들 중에서 나이가 찬 황위 계승자를 선택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자희는 태황태후가 되어 계속 수렴청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래 항렬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자희는 충복인 태감과 사병들로 궁정 내외를 지키게 하고 왕손과 대신을 궁으로 불러 들입니다.

이미 무력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보고 대신들은 들어왔으니...

 

혁흔은 혁위(도광제의 장자)의 손자인 부륜을 황제로 세우자 했으나 자희에 의해 거절 당하고

순친왕 혁현의 아들인 재첨을 게승자로 지목합니다.

사실 이것은 미리 혁흔과 짜놓은 각본이었답니다.

 

재첨을 선택한 이유는 동치제인 재순과 항렬이 같으므로 자신이 황태후의 신분을 유지하며

계속 권력을 휘두를 수 있고 더군다나, 재첨의 나이가 겨우 네 살이었기에 적어도

향후 10년은 권력의 보험을 든 셈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이런 결정이 잘못된 결정이라는 것을 알지만, 방금 들어올 때

궁 내외를 창칼을 번뜩이며 지키던 무장 병사를 본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창검에 의해 쉽게 결정되는 게 맞나 봅니다.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