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통의 정수를 만끽한 꾸어위(郭峪 : 곽욕)촌

2012. 5. 5. 08:00중국 여행기/산서성(山西省)

곽욕촌은 당나라 초기에 제법 큰 마을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데,

그 당시에 이미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 작은 마을이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어를 중시한다면,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겁니다. 

또한, 이 마을은 명대 이후 기본적으로 광산업을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어 번성한 곳이기에 돈이 제법 돌아

많은 도적 떼가 수시로 노렸기에 마을마다 엄청난 성벽으로 둘려 싸고 자구책을 구한 모양입니다.

이에 따라 특정 성씨의 씨족 마을인 집성촌이 아닌 소위 집성촌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렇군요?

결국, 돈이었습니다.

인류가 발명한 우수한 발명인 돈이 역시, 인간을 짐승보다도 못한 동물로 만든 게 또한 돈이었네요.

 

이번에는 은진사원(恩進士院)이란 곳을 살펴보렵니다.

이 집은 중국의 거상 중 한 사람인 왕중신(王重新)의 조카인 진사시험에 합격한 왕유시(王維時)의 집이라 하네요.

집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며 두 곳은 그냥 거주하는 공간이고 나머지 하나는 먹물 먹었다고

공부만 하는 곳으로 구분하였다 합니다.

먹을 아주 가까이했다는 문관이라 상인방에 호대를 원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냥 원형이 아니라 아주 예쁘게 국화 문으로 장식했군요.

 

명나라 숭정 12년인 1639년에 지은 집으로 원래 크기는 1.800 제곱미터의 넓은 저택이었다 합니다.

엄청나게 큰 패루식 문을 안채 앞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패루식 문에는 아름다운 조각의 문당 석고나 돌사자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영벽의 조각 또한 깊고 중후하게 만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는 곳입니다.

중국이 건물보다 간판을 더 크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오래전부터 대문을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든

조상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진(陳), 왕(王), 장(張)씨 등 세 가문이 곽욕촌의 대부분 성씨였으나,

지금 곽욕촌에는 46개에 달하는 많은 성씨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하네요.

세상 어디나 마을이 있으며 그 마을마다 사연이 없는 곳은 하나도 없지요.

그 마을마다 모두 존재 이유가 있을 겁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있어 장사꾼이나 일을 하러 다니는 사람으로 흥청거릴 수 있고...

소금이 생산되고 쌀농사가 잘 돼도 흥청거리고...

그러나 요즈음에는 아주 외부사람 콧김도 쐬어보지 못한 깡촌이라고 몰려들기도 하지요.

 

이 집은 문이 잠겨있으나 한때 대단했던 집으로 여겨지네요.

청소조차 하지 않아 상인방에 쓴 글조차 알아볼 수 없이 폐가가 되었지만....

문당호대가 네 개나 되는 대단한 집이었을 겁니다.

왜 입장료를 받고 문은 걸어 잠가놓았습니까?

이런 모습이 이 마을의 참모습이네요.

 

 

이 마을은 철의 생산 근거지라고 하니...

이미 우리는 황성상부에서 철에 대한 박물관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가 이 마을 주변이 철광석이 많아 생산되는 곳이고 그 철을 제련하는 공방이 많았기에

이 지역에는 무척 부유한 마을이었던 모양입니다.

위의 사진이 철을 만들기 위해 작업 모습을 마네킹으로 재현해 놓은 모습입니다.

예전부터 철과 소금은 소중하게 생산해 나라에서 주로 관리했지요.

조조도 권력을 잡은 뒤 처음으로 염철관영(鹽鐵官營)이라는 정책을 펴 소금과 철은

국가가 관리하는 정책을 폈지요.

 

곽욕촌은 선비의 고장이라고 하는 마을로 대대로 유명한 선비를 많이 배출한 마을이라 합니다.

주변에 서문흥촌이라는 명문가의 마을이 가깝다 하네요.

황성상부(皇城相府)와 가까운 곳에 있는 선비의 고장이라는 꾸어위(郭峪 : 곽욕)촌은 황성상부보다도

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시골이라 합니다.

 

위의 집은 서도세택(西都世澤)원이라 부르는 집입니다.

우리가 만났던 황성상부의 스타였던 진정경의 5 세조였던 진천우라는 사람이 살던 집입니다.

문을 걸어 놓아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네요.

대청에는 사량팔주(四梁八柱)로 4개의 대들보와 8개의 기둥으로 만들어 넓고 높다 합니다.

말로만 하면 뭐합니까?

그 모습을 보여주어야지요.

 

대문의 높이가 위압적이고 기둥 양쪽의 문당석고의 크기가 사람 키보다 크게 만들어 기를 죽이는군요.

집안으로 말을 타고 직접 들어갈 수 있게 한 주마문(走馬門)으로 만들었네요.

기둥에는 아름답게 조각을 하고 처마를 바치는 기둥의 주춧돌에는 참외를 조각해 멋을 부렸답니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 되게 하여 아주 아름답다고 하지만, 입장료는 받고 문을 걸어놓아 욕만 하고

돌아섰는대 이런 집도 보여주지 않을 거면 왜 돈은 받고 그러느냐고요?

 

곽욕성을 얼마나 넓고 튼튼하게 쌓았는지 말을 타고 성 위를 오갈 수 있다고 합니다.

성의 서남쪽 귀퉁이에 성안의 물이 밖으로 흐를 수 있는 서수문(西水門)이 있고 그 때문에 성안의 모든 거리는

동북쪽이 조금 높고 서남쪽이 조금 낮게 설계되었습니다.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명나라 때 도적들로부터 스스로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안전하게

살아가고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성을 쌓으며 곽욕촌이 탄생하게 되었답니다.

성벽의 옆에는 보조용으로 3층 높이에 628개의 창문을 갖춘 움막을 만들어 실제 사람이 거주하기도 했답니다.

이런 움막은 멀리서 보면 마치 벌집처럼 생겼다 하여 곽욕성을 다른 말로 봉와성(蜂窩城)이라고도 불렀답니다.

 

곽욕성은 성문이 3개, 망루 10개 움막 18개가 설계되어 있고 성의 귀퉁이에는 누각이 낭창하게 솟아 있습니다.

그중 물가로 난 성문은 동쪽으로 난 동문으로 곽욕촌의 정문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세 문 중 자세가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성문 위에는 경양(景陽)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어 다른 말로 경양성이라고도 한답니다.

 

비록 지금은 성벽이 일부 허물어지고 사라졌지만, 남아 있는 성의 모습으로 보아 그 규모가 대단히 크고

웅장한 모습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곽욕촌의 서남쪽에는 홍수방지용으로 수문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서수문이라 합니다.

그리고 곽욕촌의 길은 이 서수문을 기점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길이 세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그 이름을 前街, 中街, 後街라 부릅니다.

 

세 갈래의 길을 지나면 上街와 下街가 있어 곽욕촌을 바둑판처럼 나눕니다.

모든 거리의 길 양편으로는 회백색의 벽돌로 지은 명나라 때의 2층 건물이 줄지어 있습니다.  

곽욕촌은 옛날부터 장사가 빈번했던 곳으로 많은 장사꾼들이 이곳을 지나갔기에 그들을 위한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진 상업중심지였답니다.

아마도 무척 흥청거렸을 곳입니다.

 

위의 사진은 노사원(老獅院)이라는 이름의 집입니다.

노사원이란 대문 앞에 커다란 사자상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정말 엄청나게 큰 돌사자가 드나드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네요.

호대 위로는 이 집 출신 중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했던 사람의 이름 등 여러 가지를 새겨두었습니다.

 

청나라 때 지은 노사원은 황성상부에서 만나본 진정경(陳廷敬)이라는 사람의 부모가 살던 집이라 합니다.

사합원 양식으로 지은 집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겠지만, 지금도 사람이 사는 집으로 보였습니다.

 

집으로 오르는 계단을 일곱 개로 만들었고 네 개의 정원을 둔 집입니다.

일곱 개의 계단 위에 대문을 만든다는 의미는 주인의 지위와 권력이 대단했다는 의미라 합니다.

물론 아홉 개가 최고의 숫자지만 그것은 황제 외에는 시용하다 걸리면 역모죄에 해당하기에 경을 칩니다.

돌사자의 크기가 3m 정도에 이릅니다.

양쪽으로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씩이나...

사자를 문 앞에 네 마리나 두고 개 부리듯 살았던 집안이군요.

 

대문 위에 벼슬한 것을 새겨놓아 자랑질한 게 보이시죠?

잘났습니다,

정말 잘난 집안입니다.

이곳은 집이 좁아 석패방을 따로 만들 수 없기에 눈물을 머금고 대문 상인방에 만들었습니다. 

진 씨 가문이 중도장에 황성상부를 만들기 전에는 이곳이 바로 진씨가문의 본거지였던 곳입니다.

그러나 진씨가문이 황성상부를 만들고 옮겨감으로 이곳은 작은 시골 마을로만 남아버렸습니다.

 

3층에 달하는 목조 간판과 청석을 깔아 만든 계단, 검은색의 문틀과 대들보는 세월이 흘러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진 씨 가문이 당시에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었나 말해줍니다.

곽욕촌은 예로부터 경제가 활성화를 이룬 번화한 상업요지여서 많은 사람이 이곳을 나들었다고 하네요.

그 때문에 곽욕촌의 복잡한 거리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편의시설들이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동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많은 사람이 이곳에 눌러앉아 살았고 그 때문에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도

많아지게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외부의 적으로부터 안전해지면 마을 사람도 공부에만 전념했고 더 열심히 했나 봅니다.

 

선비가 많이 난 최고의 시기는 진사 15명, 거인 18명이 난 명청(明淸) 시기였다고 하네요.

이 작은 마을에 이 정도의 사람이 중앙에 진출했다 함은 이곳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한

마을인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아니겠어요?

지금도 문을 나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글 읽은 소리가 낭랑하게 들리고 누각 위에 훈장이

아이들에게 고사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런 좋은 환경으로 말미암아 마을 사람 모두 편안한 생활을 누렸으며 상업의 교역 지점으로 많은 부도

축적하여 후손에게 공부를 가르침으로 당나라에서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곽욕촌에서 배출한 영재가 많아

과거에 급제한 사람만 80여 명에 이르는 과거 전문 원조마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박사마을이니 뭐니 하며 그런 마을이 있잖아요.

 

대체로 중국의 문은 처마 아래를 올려다보면 위의 사진처럼 기둥이 삐죽이 나와 있습니다.

이 기둥을 호대(戶對)라 한다는군요.

호대가 몇 개인가가 그 집안의 세력을 의미한다 합니다.

이 집은 네 개이네요.

 그리고 네모난 것은 무관의 집이고 이 집처럼 둥근 것은 문관의 집을 의미한다 하네요.

 

그리고 호대와 더불어 문당(門堂)이라고 있지요.

대문 양쪽 옆에 만든 사자상이나 북 모양의 돌입니다.

이 또한 집안에 악귀를 막고 복을 비는 의미로 만들었으며 이는 크기로 그 집안의 가세를 짐작한다 합니다.

이런 게 결혼할 양가의 집안 내력이 되었다 하네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마을은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된 후통을 그대로 볼 수 있고 오래된 마을을 돌아볼 수 있는 점은 좋으나

마을이 지저분하고 더럽고 냄새가 무척 심합니다.

골목마다 화장실을 밖에다 만들어 화장실 냄새가 진동하여 다니기가 곤란합니다.

 

오죽하면 나올 때 매표소에 들려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다녔다고 입장료 50원이 아깝다고 말하고 나왔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한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한국말로 하고 나왔고 그들은 그곳에서 태어나 살고 있기에 그 냄새를 전혀 느낄 수 없었을 겁니다..

이 마을에서는 후통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냄새에 강한 사람은 정말 제대로 된 후통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적극 추천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 마을을 걷고 있노라니 마치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 골목을 돌아가면, 학동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닐 것 같고, 서당 앞을 지나노라면,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지금은 교통마저도 불편한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리했을 것입니다.

세월은 이렇게 흘러가고 세상은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나 봅니다.

나그네는 그냥 골목길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과거로의 여행을 시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