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의 여행, 순천 낙안읍성(順天 樂安邑城)

2022. 6. 27. 04:00금수강산 대한민국/전라남도, 제주도

 

사적 제302호로 지정된 순천의 낙안읍성을 찾았습니다.

순천 낙안읍성(順天 樂安邑城)은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읍성으로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이라고 봐야겠네요.

 

 

1908년까지 존속하였던 낙안군의 중심지로 임경업 장군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곽과 내부 마을이 거의 조선시대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라고 합니다.

우선 읍성의 동문인 낙풍루를 통하여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정동은 아니고 동남향이라고 보이네요.

 

 

해마다 5월에는 낙안민속문화축제, 10월에는 남도음식축제가 열리기도 한다고 하네요.

전통 한옥들이 있으며 현재 실제 주민들이 거주 중으로 현재 대한민국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네요.

 

 

이 지역은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점차 넓혔다고 하네요.

 

 

읍성의 전체 모습은 사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고 동, 서, 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 밖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가 있다네요.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네요.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요.

순천 낙안읍성은 미 CNN이 선정한 한국 최고 여행지 50선에 뽑히기도 하였던 곳이랍니다.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곳이지요.

 

 

낙안은 문루마다 사계절과 농사에 관련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남문은 쌍청루라고 불렀는데 이는 여름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하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동헌은 감사, 병사, 수사, 수령 등이 지방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군청이나 면사무소에 해당하고 건립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객사보다 다소 작다고 하네요.

동헌 서쪽에 내아로 가는 협문이 있으며 삼문과 양편에 각 창고가

하나씩 설치되었다가 1990년 복원되었다네요.

 

 

동헌의 출입문 역할을 했던 낙민루입니다.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유명한 누각이라고 하네요.

2층 누각 가운데는 낙민고라는 북을 매달아 억울한 사람이 울리는

신문고와 같은 역할을 했다지요.

 

낙안읍성의 각 문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편에는 장승(벅수)과 솟대(짐대)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정월이면 훼손된 장승을 새로 세우고 장승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예전엔 길 양편에 수많은 장승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어 이곳을

장승거리 또는 벅수 거리라고 불렀다네요.

 

 

읍성은 부, 목, 군, 현 등 행정 구역의 등급에 따라 크기에 차이가 있었고,

크기는 주민의 수와 관계있었겠지요.

조선 시대 내륙 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읍성이 있었고, 해안 근처에는 거의 모든 고을에

읍성이 있었고 크기는 큰 읍성은 900미터 이상이었고, 중간 규모는 약 450~900미터였으며,

작은 것은 300미터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남부 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전국 곳곳에 설치되었다지요.

 

 

이들 읍성은 조선 말기까지 존재했으나 1910년 일본의 읍성 철거령 때문에

대부분 철거되었다네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읍성 중 대표적인 것은 정조 때 세운 수원읍성이라고 하지요.

또한 낙안읍성, 비인읍성, 해미읍성, 남포읍성, 동래읍성, 보령읍성, 진도읍성, 경주읍성, 거제읍성,

홍주읍성, 언양읍성 등이 있는데 낙안읍성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 중 하나라고 합니다.

 

 

1983년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행정 구역상 3개 마을(동내리,

남내리, 서내리) 85여 가구의 약 300여 명이 100여 채의 초가집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고요.

관광용으로 세트화한 민속촌이 아니라 실제 남도 사람들의 삶이 배어 있는 것이랍니다.

 

 

그러나 낙안읍성이 현재와 같은 역사 마을로 등장하는 계기는 인조 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 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이 바로 임경업 장군의 선정을 기리는 비각입니다.

 

 

성벽은 위의 서진에 보듯이 활을 쏠 수 있도록 사방 30센티미터 정도의 총안이 있고 근총과 

원총으로 나누었는데 이런 지혜는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방어 방법이지 싶습니다.

 

 

태조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김반길 장군이 흙으로 축조한 것을 인조 때

돌로 다시 쌓아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고 세종 때 석성으로 축조했다는 설도 있다네요.

 

 

성곽의 길이는 남북 약 310미터, 동서 길이는 남쪽에서 약 460미터, 북쪽에서

약 340미터로 성벽의 둘레는 약 1,410미터이며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4~5미터,

면적은 약 13만 5,360제곱미터라네요.

성벽의 두께는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데 아랫부분은 7~8미터로

윗부분 3~4미터의 2배 정도라고 하고요.

 

 

성벽은 큰 돌을 양쪽 바깥에 쌓아 틀을 만들고 잔돌을 사이에 채우는 방식으로 만들었다네요.

아래쪽부터 커다란 깬돌을 올리면서 틈마다 작은 돌을 쐐기로 박았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석재가 작아지고 있다네요.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낙풍루, 남문은 쌍청루

또는 진남루, 서문은 낙민루라 부르며 북문은 폐쇄했다고 합니다.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이 성문을 감싸고 있네요.

 

 

성곽을 따라가면 치성이라 불리는 외부로 돌출된 성곽이 있는데 당초 12개를 계획했는데

4곳만 완성되었으며 성벽 외곽에 부분적으로 해자를 설치했다고 하고요.

 

 

한민족 고유의 성 축조 기술을 따른 치성은 초소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거나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만든 것이죠.

 

 

낙안읍성의 기본은 행정 도시로 세조 12년(1466) 낙안군이 편제된 이래 1910년 폐지될 때까지

군 청사가 있는 고을로 현재의 벌교읍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에는 이 근방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낙안읍성의 인구는 1,000명 정도로 추정한다는데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전통 마을 인구의

4배 정도에 해당한다고 하니 일반 마을에 비해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아

중세의 도시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네요.

 

낙안읍성의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