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불국세계,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

2022. 6. 6. 04:00금수강산 대한민국/전라남도, 제주도

화엄사는 구례의 대표적인 명소 중 한 곳이라고 생각되네요.

화엄사는 역사적, 학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절 자체가 2009년 사적 제505호와 명승 제64호로

지정되었으며, 경내에는 2022년 2월 현재 국보 5건, 보물 8건,

천연기념물 2건이 지정되어 있는 사찰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구례 화엄사를 찾았던 이야기를 하렵니다.

구례에 있는 화엄사를 찾았던 날은 벚꽃이 한창 피었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화엄사는 규모가 웅대하고 우아하여 유서 깊은 불교문화의 요람으로 손꼽힌다지요?

 

우리나라의 척추에 해당하는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해 지리산에서 끝나죠.

그 끝자락인 이곳 지리산에 백제 성왕 22년(544년)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緣起) 조사가

사찰을 지었다고 사적기(寺蹟記)에 전하고 있으며 화엄경의

두 글자를 따서 절 이름을 지었다고 하고요.

 

또 다른 자료는 1979년 황룡사지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통일 신라시대인

754년(경덕왕 13) 황룡사 연기조사의 발원으로 화엄사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했다고도 되어 있다네요.

좌우지간, 화엄종(華嚴宗)을 선양하였던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라고 하네요.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

그런데 지리산은 한자로 지이산(智異山)이라 쓰지만 읽을 때는 왜 지리산이라고 하지요?

여러 고문헌에 지리산은 음 그대로 지리산(地理山)이라 쓴 기록도 많다고 하네요.

또 지리산을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는데 이처럼 지리산, 두류산 등

그 이름 또한 다양하다고 하네요.

 

화엄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의상대사가 ‘화엄십찰’을 불법의 도량으로 삼으면서

화엄사는 화엄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 되었고 의상은 670년(신라 문무왕 10)에 화엄사를

중수했으며 장육전(丈六殿)을 짓고 화엄경을 돌에 새겨 벽에 둘렀는데,

이때 비로소 화엄사는 화엄경 전래의 모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화엄(華嚴)이란 불법이 너르고 커서 끝이 없다는 광대무변(廣大無邊)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온갖 꽃으로 장엄하게 장식한다는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네요.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차례로 지나 보제루를 끼고 돌면 화엄사의 웅장한 가람배치가

한눈에 들어오고 중심지역으로 들어서면 눈앞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대웅전이 아니라

바로 각황전(覺皇殿)입니다.

각황전은 국보 제67호로 국내에서는 목조건물로 최대 크기라고 합니다.

크기는 물론, 비율자체가 안정되어 매우 조화롭고 위엄과 기품마저 느껴집니다.

 

정말 대단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네요.

의상대사가 화엄사를 중수하며 각황전을 지으며 처음 이름은 장륙전(丈六殿)이라고 했다네요.

그 후 임진왜란을 겪으며 대부분 소실되는 바람에 조선 숙종 25년(1699년)에 다시 공사를 시작해

4년 만에 완공한 건축물로 숙종이 직접 각황전(覺皇殿)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화엄사가 일반적인 다른 사찰들과 차이점을 든다면, 보통 절이라면 탑이나 대웅전이

가장 큰 건물이기 마련인데, 이 화엄사는 각황전이 압도적으로 크네요.

물론 각황전 역시 부처상이 있는 금당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러한 크기 차이 때문에

가람의 배치가 지나치게 비대칭적으로 변해 우리 같은 일반인이 보아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게다가 각황전 앞의 석등과 그 아래의 서 오층 석탑은 삐뚤게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 앞 아래에 있는 동 오층석탑 역시 정 중앙에 있지를 않고 삐뚤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더 이상한 점은, 중문격인 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과 각황전을 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보제루를 여느 절과 달리 밑으로 못 지나가고 동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랍니다.

여기에는 대단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하네요.

 

절의 방문자가 보제루를 오른쪽으로 멀리 돌게 되면 각황전은 멀어지고

대웅전은 상대적으로 가까워 지지요.

그렇게 되면, 원근감에 의해 각황전과 대웅전의 크기 차이가 많이 줄어들기에 보제루를 돌아

삐뚤게 배치되어 있는 각황전과 대웅전, 탑과 석등 전부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되면

그 순간 마치 일직선상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네요.

 

따라서 서쪽의 오층석탑, 석등, 각황전이 일렬로 놓이고, 동쪽 오층 석탑과 대웅전이

일렬로 놓이게 되는 탁월한 시각적 배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가람배치는 대웅전 앞에는 동쪽과 서쪽에 5층 석탑이 쌍둥이처럼 서 있는데

비대칭으로 서 있는 독특한 형식이네요.

 

각황전 앞의 석등은 국보(1962.12.20 지정)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636cm이랍니다.

기단부, 화사석, 상륜부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의 팔각 석등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가장 크다고 알려졌습니다.

 

크기만이 자랑이 아니라 조각 솜씨를 보면 아름답기까지 하네요.

각황전과 아주 잘 어울리는 모습이 아닌가요?

 

이 석등은 기단보다 상륜부가 크고 폭이 넓어 비례가 맞지 않고 조각수법도

조금은 세밀하지 못한 느낌을 주지만, 전체적으로 거대한 크기에서 오는 장중함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네요.

 

대웅전은 보물 제299호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 벽암 대사가 중건했다고 하네요.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졌으며 기둥은

배흘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으며 기둥 위와 사이에는 공포가 짜여져 있는

다포계 형식이라고 합니다.

17세기 건축물이 남아 있어 중요 문화제로 지정되었겠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동쪽에 있는 5층 석탑은 보물 제132호로 높이 640cm라고 하며

대웅전의 높은 석조 기단 아래에는 2개의 석탑이 동, 서로 서 있는데, 언뜻 보면 쌍둥이로 보이지만,

양식과 조각수법이 다르고 서로 마주 보며 대칭을 이루고 있지 않아 원래 쌍탑으로 건립된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네요.

 

앞에 보이는 서쪽의 탑은 보물 제133호로 높이는 같고 2중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이 놓여 있는데

기단과 탑신부 표면에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네요.

 

위의 사진은 원통전 앞에 있는 사자탑입니다.

이 탑은 아래 기단의 면석에 갓기둥과 버팀 기둥이 없는 불단의 형태로 몸돌은 마치 네모난 기둥처럼

우뚝하게 길며 각 면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각황전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잠시 올라가면 국보 제35호인 4 사자 3층 석탑이 나옵니다.

높이가 550cm에 이르는데 사적기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연기조사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일종의 불사리 공양탑이라고 하나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조성연대가 7세기 중엽까지

올라간다고 볼 수 없다네요.

이 석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으나 상층기단이 특이하게 사자상으로 되어 있어

이형석탑(異形石塔)에 속한다고 합니다.

네 마리의 사자는 각각 희로애락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화엄사라고 하면 또 유명한 게 하나 더 있지요.

맞습니다.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홍매화지요.

 

화엄사의 귀염둥이라고 해야 하나요?

화엄사를 찾는 모든 여행자는 홍매화 앞에서 사진 한 장 정도는 남기지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佳人의 눈길을 끌었던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석축으로 그냥 지나치고 지나갈 수 있는 평범한 석축이지만,

돌의 모양에 맞추어 6 각형으로 다듬어 쌓은 돌과 그 주변의 돌은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다는 느낌입니다.

 

화엄사가 있는 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