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소쇄원(潭陽 瀟灑園)

2022. 5. 30. 04:00금수강산 대한민국/전라남도, 제주도

멋진 누각이 주변의 자연과 아주 썩 잘 어울린 모습입니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 한 곳이라는 소쇄원(瀟灑園)입니다.

소쇄원은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원림이라네요.

 

이 원림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였던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1519년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자 시골로 은거하러 내려가 지은 별서정원(別墅庭園)이라고

하는데 이때 양산보의 나이는 겨우 18세였다고 하네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의 비정한 맛을 보았나 봅니다.

 

당시 조광조는 남곤(南袞) 등의 훈구파에게 몰려 전라남도 화순 능주로 유배되자

양산보는 낙향하여 향리인 지석 마을에 숨어 살면서 이 계곡을 중심으로 원림(園林)을 조성하고

은둔생활을 시작했다지요.

소쇄원은 양산보의 은둔생활 기간 중인 1520년부터 1557년 사이에 조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18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의 풍상을 모두 겪었나 봅니다.

 

별서정원이라고 하면 세속의 싸움이나 당파 싸움에 연연하지 않고 평소 살던 살림집과는

떨어져 자연으로 돌아가 전원이나 깊은 산속에 들어가 조그만 집을 지어 안빈낙도를 꿈꾸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지은 정원이죠.

소쇄원은 자연미와 구도 면에서 조선 시대 정원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곳 중 한 곳입니다.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듭니다.

선비의 대쪽 같은 절개의 마음이라도 표현하려고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겠다는 결의라도 보는 듯하네요.

 

대숲을 지날 때 바람 소리에 댓잎이 바스락거리며 내는 소리는 은둔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혼탁한 세상의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막아서려고 하는 듯 고요함 속에서 머리카락이 쭈삣 서는

기분도 들며 이 대숲은 바로 혼탁한 인간의 세상에서 고고한 신선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소쇄원은 명승 제40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정구역 4,399㎡, 보호구역 11만 7,051㎡라고

하며 소쇄(瀟灑)라는 말은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로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梁山甫)의 호(號)가

소쇄옹(瀟灑翁)이라고 합니다.

소쇄원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그런 기분이 들지 않나요?

 

아마도 그가 겪었던 혼탁한 세상의 모습을 보고 여생은 맑고 깨끗하고

부끄럼 없이 살려고 했나 봅니다.

양산보가 추구했던 삶의 지향점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가 부러우면서도 공연히 세상 모두를 움켜쥐려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네요.

 

양산보는 시대적으로 급변하고 혼란한 시기에 벼슬길에 올랐다네요.

당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찼던 중종의 신임 속에 신진사류를 대표하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추진했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갔고...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전라도 능주로 유배당하자 그를 따르던 젊은 학자들은

모두 실의에 빠지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당시 17세였던 젊은 제자 양산보(梁山甫)는 유배지까지 따라와 그를 모셨다고 합니다.

그해 겨울 스승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사망했는데 이때 큰 충격을 받은 양산보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현세에서의 공명과 영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에 별서를 짓고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매정하고 무서운 일을 겪고 나니 벼슬에 대한 동경도 삶에 대한 회의도 들었나 봅니다.

 

양산보는 지금의 광주호 상류의 창암촌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그는 15세가 되던 해에

상경하여 조광조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1519년 17세에 현량과에 합격했으나

숫자를 줄여 뽑는 바람에 낙방했다네요.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그가 창암촌 옆의 산간 계곡을 택하여 조성한 별서가 바로 소쇄원이라고 합니다.

 

소쇄원은 정원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그림 자료가 남아 있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원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소쇄원도(瀟灑園圖)가 현존해 있다네요.

정말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겠지요?

 

소쇄원도는 1755년에 제작된 목판화로 1548년 하서 김인후가 쓴 소쇄원 48 영이라는

소쇄원의 경관을 노래한 시가 상단에 새겨져 있으며, 계류를 중심으로 조영 된

정원의 시설과 세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오곡문을 통해 흘러드는 계곡물을 중심으로 평면에 목각한 것이네요.

 

이 목판은 가로가 35㎝, 세로가 25㎝로 양각으로 판각되었는데 1755년 4월 하순

(숭정 기원후 삼을해년청화 하완간(崇禎紀元後 三乙亥年淸和 下浣刊)에 제작했다는

판각기가 새겨있어 소쇄원의 원형(原形)을 참고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겠네요.

 

소쇄원의 내원은 광풍각과 제월당을 중심으로 대봉대, 연못, 애양단 담장, 계류, 화계를 비롯해

나무 홈대(飛溝), 물레방아 등의 시설로 구성되어 있답니다.

광풍각은 소쇄원은 가장 주된 두 개의 건물로 후면의 단 위에 지은 제월당과 짝을 이루고 있네요.

 

 

두 건물의 이름은 송나라 때 명필로 이름난 황정견(黃庭堅)이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사람됨을 평하여 이야기할 때 흉회쇄락여광풍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 즉 '가슴에 품은 뜻의

맑음이 마치 비가 갠 뒤에 해가 뜨면서 부는 청량한 바람(光風)과도 같고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霽月)과도 같다'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지요.

벼슬길에서 환멸을 느낀 양산보가 스스로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모습을

자기가 거처하는 곳의 이름으로 정했군요.

광풍각은 소쇄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뒤편에 짝을 이루는 제월당이 있습니다.

광풍각의 한가운데에는 방이 있는데 호남 지방에 많이 지어진 정자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광풍각의 건너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 위쪽에 위의 사진 왼쪽에 보이는 초가지붕을 얹은

정자가 있는데 대봉대(待鳳臺)라고 하는 정자로 대봉대는 글자로 풀어보면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라는 의미로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지은 조그마한 정자인데 그런데 모양새가

봉황을 맞이하기에는 조금 초라하지 않나요?

 

봉황을 기다린다는 이름의 대봉대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 나무를 심었습니다.

이는 이곳에서 안빈낙도를 꿈꾸며 살아가는 주인장인 양산보에게는 이곳을 찾는 손님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듯합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현판은 제월당에 걸린 것으로 김인후는 소쇄원 48 영에서 대봉대의 풍광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데 몇 구절만 보면...

 

작은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小亭憑欄
오동나무 대에 드리운 한여름의 녹음을 보네
桐臺夏陰
해 저문 대밭에 새가 날아들고
叢筠暮鳥
작은 못에 물고기 노니네

小塘魚泳

 

소쇄원은 계곡물이 암반을 타고 흘러드는 곳에 세운 원림으로 그런 계곡의 자연을 다듬어 만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계곡 정원인 계원(溪園)의 모습을 잘 보여주네요.

특히 담장으로 계곡을 가로막아 정원의 구획을 분명히 하면서도 담장 아래로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교각을 세워 담장을 만든 오곡문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매우 세련된 조경 기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으로부터 내 정원으로 흘러들어오는 물길을 인공적으로 막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도록 하는 주인의 유유자적하는 마음씨를 엿볼 수 있네요.

사실 어디까지가 정원 안이고 어디까지가 밖인가를 나누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까요?

 

내원과 외원을 가르는 담장에는 위의 사진에 보듯이 애양단(愛陽壇)이라는 돌에 새긴 글자가

보이는데 아마도 이곳 담장은 겨울에도 햇볕이 잘 드나 봅니다.

공연히 그곳 담장에 기대어 서면 마음마저도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 듯합니다.

그러니 애양단의 담장으로 음의 기운인 나쁜 기운을 막아

밝은 양의 기운으로 바꾸려는 마음인 듯합니다.

 

오곡문(五曲門)이라고 쓴 글이 보이네요.

오곡문 구역은 오곡문 옆의 담 밑 구멍으로 흘러드는 계곡물과 그 주변에 암반이 있는 공간으로

오곡문(五曲門) 문 옆의 담 밑 구멍으로 흘러드는 계곡의 물과 그 주변에 암반이 있는 공간인데,

오곡이란 암반 위에 계곡물이 '之'자 모양으로 5번을 돌아 흐른다는 뜻이지 싶습니다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라는 글이 보입니다.

이 글은 김인후가 쓴 글이라고 하네요.

삼국지에 삼고초려의 려는 작은 오두막이라는 의미니 처사 소쇄옹 양산보의 초라한

오두막집이라는 의미겠지만 그러나 정말 멋진 별서정원이 아닌가요?

 

광풍각에 누워 머리맡으로 계곡 물소리(枕溪文房)를 듣는다.

대숲에서 울리는 바람 소리(千竿風響)를 들으며 넓은 바위에 누워 달을 본다(廣石臥月).

걸상 바위에 조용히 앉아(榻巖靜坐) 바둑을 두고(床巖對棋) 도는 물살에 술잔을 띄운다(洑流傳盃).

바위 위로 물이 흘러내리고(危巖展流) 계곡에는 대나무 다리가 위태롭다(透竹危橋).

바로 위의 사진에 보이는 정자가 광풍각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지어지는 별서정원은 엄청 높은 담장을 두르고 안으로 천지개벽하듯

새로운 세상을 만든 한정된 중국의 정원과는 다르고, 또 자연의 모습은 온 데 간 대 없이 모두

자기만의 오밀조밀하게 미니어처 세상을 만든 일본과도 다르게 자연을 그대로 살리고

약간만 다듬은 우리나라 고유의 정원입니다.

 

소쇄원은 우리나라 고유한 정원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내원조차 크게 수식을 가하지 않고 조영하기 때문에 전혀 화려하지도 인공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 정감이 가고 눈길이 머무르지 않나 생각되네요.

 

소쇄원의 ‘소쇄’는 본래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하고 있으며, 양산보는 이러한 명칭을 붙인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하였다네요.

 

왕대나무 숲 속에 뚫린 오솔길을 따라서 올라오면, 입구 왼편 계류 쪽에 약 18m의 간격을 두고

두 개의 네모난 연못인 방지(方池)가 만들어져 있고, 과거에는 물레 방아가 돌고 있었다네요.

이것은 장식용으로 오곡문 옆 계곡물이 홈대를 타고 내려와 위쪽 못을 채우고, 그 넘친 물이

도랑을 타고 내려와 물레 방아를 돌리게 되어 있어, 이것이 돌 때 물방울을 튀기며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모습을 건너편 광풍각에서 감상하도록 설계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오곡문 구역은 오곡문 옆의 담 밑 구멍으로 흘러 들어오는 계류와 그 주변의

넓은 암반이 있는 공간을 말한다지요.

계곡의 물이 들어오는 수문 구실을 하는 담 아래의 구멍은 돌을 괴어 만든 두 개의 구멍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담장을 쌓은 낭만적인 멋은 소쇄원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느낌입니다..

 

자연을 이용하여 약간의 인공을 가미한 우리나라 전통적인 정원을 보았습니다.

소쇄원을 보고 나오면서 드는 생각은 당쟁으로 암울하고 힘든 과정에서도

자신만의 맑고 깨끗함을 유지하려는 마음을 살짝 엿볼 수 있어 좋았다는 느낌이 드네요.

돌아서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고 마음마저 상쾌해집니다.

이런 아름다운 곳을 눈으로 구경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는 일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