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아 칸 - 유적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2008. 12. 29. 16:21동남아시아 여행기/시엠립 배낭여행

압사라의 요염한 자세에 佳人은 한 눈을 팔고 있다.

비록 이곳 부조가 깊지는 않지만 예술적인 조각 솜씨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가슴에서 배꼽으로 이어지는 몸의 변화까지 육감적으로 표현했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지 모른다고......

눈을 지긋이 감고 춤의 삼매경에 빠져있는 압사라에 정신을 놓고 있는 중....... 

 

그렇게 맑고 덥던 날씨가 순식간에 폭우를 몰고 왔다.

오늘이 여행 6일째로 하루도 쉬지 않고 비가 내린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佳人의 발에서 쉰내를 나게 한다.

쉰세대의 쉰내.....

밝은 날 햇살은 비치고 비는 폭우처럼 내린다.

 

요염한 압사라 자태에, 佳人 마음만 흔들리고.

찾는 이 많지 않고, 컴컴한 유적 더미 속에서.

창 밖으로 쏟아지는, 소낙비 소리를 듣는다.

처마 밑에서 비 피하며, 나그네는 하염없이 서성이네.

 

잠시 컴컴한 유적 속에서 상념에 빠져 본다.

여기는 정말 많은 압사라 부조를 새겨두었다.

이런 방법이 죽은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방법인가?

 

신전에서 비를 피한다.

지금 우리가 피신해 있는 곳은 바로 왕만이 출입했다는 동쪽의 전용 출입문 아래다.

우선 쏟아지는 비를 급하게 피한다는 게 나도 모르게 예전의 내가 드나들었던 그 문 아래란 말인가?

 

그러나 이곳 지붕은 믿을게 못 된다.

잠시 후 돌 틈 사이로 비가 흘러내리며 이리저리 피해도.

내리는 비 보다 틈사이로 쏟아지는 비의 양이 더 많다고 생각된다.

 

잠시 후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합류하며 함께 동문 본관 입구에서 비를 피해 본다.

세월의 흐름에 이미 유적의 지붕은 모두 틈이 벌어져 내리는 빗줄기에 속수무책이다.

 

저 앞에서 장사를 하던 아주머니도 갓난아이를 안고 우리에게로 비를 피하러 들어온다.

아주머니 여기도 이미 만원이구먼유~~ 

그래도 함께 비를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빨랑 들어 오슈~~

 

잠시 후 퍼붓는 비를 뚫고 이번에는 맨 발로 아이도 달려온다.

"아이야~ 이미 너는 다 젖었단다.

여기에 와서 비를 피하나 그냥 내리는 비를 맞으나  마찬가지야~~"

 

그래도 뛴다.

다 젖은 몸을 피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만은....

비는 억수로 퍼붓는다.

밀림 속에서 내리는 비는 우리들의 시야마저 가려 버린다.

 

한 40분 쏟아지던 비는 신기하게 멈춘다.

비 올 때 제일 걱정스러운 게 카메라다.

그래서 비닐봉지에 넣고 렌즈만 빼꼼히 나오게 하여 사진을 찍다 보니 네 귀퉁이에 그만.... 

 

제일 나중에 들어온 이 녀석이 비가 그치기도 전에 제일 먼저 튀어 나간다.

이런 습도가 높은 지방에서는 빨래를 해도 잘 마르지 않는다.

제일 빨리 말리는 방법....

정답은?

그냥 입고 무조건 돌아 댕긴다.

빙고~~

 

신전에서 비 맞아 봤수?

나 맞아 봤수...

그것도 3일 내내 비슷한 시간에....

비가 그치니 한결 시원하다.

이래서 더운 지방이라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곳에도 큰 나무가 유적과 합의 동거를 요구하고 있다.

바로 동문 입구에서 본관을 향하여 보면서 커다란 나무와 어우러진 유적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다.

 

이곳의 유적 중 부모에게 바친 유적은 모두 지상에다 단층으로 그냥 세웠다.

신전과는 다르게 높이 세우지 못한 것은 더 크고 높이 세우면  신들이 짜증을 내기 때문일까?

아무리 효자일지라도 감히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쑥스러웠나 보다.

 

 

우리가 비를 피했던 동쪽 본관 출입구.

그곳은 바로 자야바르만 7세 전용 출입문이다.

문 입구가 상당히 높고 넓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문은 작아지고 마지막에는 허리를 숙여야만 통과할 수 있게 만들었다.

비록 아버지는 왕이 아니었으나 자식이 왕이 되면 죽은 아버지도 호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뒤에 아무리 효도를 받으면 무엇하나?

 

지금이라도 부모님에게 전화라도 한 통화라도 올려드리는 게 효도의 첫걸음이다.

추운 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자.

보일러 댁에 아버님 놓아드리는 우는 범하지 마시고....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는 휴대전화가 없었단다.

아직도 카메리 렌즈에 비닐봉지가.... 

 

우리는 위 사진의 사원 본관 건물 왼편을 돌아 외곽으로 걸어 서문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곳에는 사람의 인적조차 없다.

그런데 앞쪽에 압사라닷~~

 

갑자기 저 멀리서 왠 압사라가 걸어 나오는 게 아닌가?

오잉~ 자세히 보니 울 마눌님이다.

마눌님~ 佳人이 잠시 헛 것이 보였구먼유~~

 

그런데 어디 갔다가 그리로 나오는가요?

울 마눌님은 무섭지도 않은가 봐~~

혼자서도 잘 돌아다닌데.

 

폐허로 변한 이곳의 사암과 라테라이트가 금방 내린 폭우로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풍긴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곳의 외곽은 아무도 없다....

방금 내린 비에 흠뻑 젖은 유적과 울창한 나무들....

 

이곳 주위에는 건립 당시에는 하나의 도시형태였으며 사원 내부는 많은 수도승들과 제자들이 교리를

공부하는 곳이란다.

 

아래 보이는 사진을 보면 죽은 나무의 뿌리가 유적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다.

저 나무는 죽어서도 유적을 놓지 않고 끝까지 버티기 작전으로 들어갔다.

그래~ 끝까지 함 해 보자는 게지?

 

오히려 그 덕분에 그 부분만 무너지지 않고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세상의 일이란 정말 순리대로 이해하기가 이렇게도 어려운가? 

 

프레아 칸이란 명칭은 건축 당시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유적 중 하나란다.

건립의 유래를 표기한 산스크리트어에는 자야스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는데 이는 자야바르만 7세의 원래

이름이었다고 하면 자야스리나 프레아 칸은 신성한 칼이라는 의미란다.

그는 참파 왕국과 전쟁 후 파괴된 왕궁을 복원하는 동안 이곳에 임시로 거처를 삼았다고 한다.

  

아래 지도는 프레아 칸에서의 이동 경로다.

 

사원 외부는 아무도 없어 무척 조용하다.

이런 곳을 호젓하게 거닐 수 있다는 게 프레아 칸의 매력이지 않겠는가?

복잡하고 어두침침하고 냄새나는 내부보다는 이곳에 방문한다면 본관 외부로도 한번 걸어보자.

3시 30분까지 1시간 20분 머물렀다.

갑자기 폭우가 내려 30분 정도는 유적 안에 갇혀있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만족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만족이 항상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또 달려 나간다.

그러나 그 만족이란 놈은 항상 우리 뒤에 있다.

공연히 헥헥 거리며 뛰어다니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