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아 칸, 그곳은 아버지를 위한 사원

2008. 12. 29. 16:14동남아시아 여행기/시엠립 배낭여행

오후 2시에 니악 뽀안을 출발하여 2시 10분에 프레아 칸에 도착했다.

바로 니악 뽀안의 옆 가까이에 있다.

프레아 칸의 넓이는 앙코르 톰, 앙코르 왓에 이어 세 번째로 규모가 큰 곳이다.

이곳은 참배를 위한 사원이 아니고 실제 사람들이 거주한 사원이란다.

 

프레아 칸은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를 위해 처음에 따솜을 만들었으나

나중에 더 큰 이 사원을 만들어 봉헌했다고 한다.

이제 왕권이 더 강화되었다 이 말이지?  어머니를 위해 따프롬을 만들었고.

자신은 후대에 효자로 칭송을 받았으나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은 더운 이곳에서..... 도대체 뭐냐고?

토목공사로 국가 경제부흥에 힘을 기울였다고 말하겠지?

 

프레아 칸이란 "신성한 칼"이란 의미로 참파 왕국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건국 초부터 전해 내려온

신성한 칼을 이 사원에 모셔왔다는데서 유래되었단다.

직사각형으로 규모가 대단히 크다.

툭툭은 우리를 북문 입구에 내려주고 서문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가버렸다.

북문 입구에서 한적한 길을 걸어 들어간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왜 이리도 부모님에게 효성이 지극했을까?

그가 왕권계승자의 적통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이곳도 가문과 족보를 따졌단 말인가?.

 

당시 앙코르 제국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뿌리를 둔 한 종족인 참 족이 베트남 중남부 지방으로 진출하여

세운 참파 왕국으로부터 여러 차례 침공을 받고 시달림을 받았으며 수리야바르만 2세 이후 두 번째로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수도이며 왕궁이 있던 앙코르 톰 까지도 유린도 당했을 정도로 앙코르 제국의

존망이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여 있었단다.

 

그야말로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두 나라 간에 대대적인 전면전이 벌어졌다.

우리는 사라진 참파 왕국을 소홀히 생각하는데 사실은 앙코르 왕국보다 더 일찍 번성하였으며

한때는 앙코르와 자웅을 다투던 큰 나라였단다.

그들도 이곳과 같이 힌두교의 신들을 모셨으며 왕의 이름을 바르만으로 사용하였다.

비록 베트남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지금의 월 족인 베트남과는 전혀 다른 국가였다.

 

당시 지방의 장군이던 자야바르만 7세는 민병들을 이끌고 톤레삽 수전에서 참파의 공격을 물리치고

오히려 베트남까지 침공하여 참파 왕까지 사로잡는다.

참파는 그냥 조용히 그곳에서 살았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공연히 이곳을 공략하다가 완전히 말아먹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긁어 부스럼이 아니라 생명까지 위협받게 되었네.

 

이 수전은 삼국지의 적벽대전이나 살라미스 해전, 트라팔가 해전에 버금가는 큰 전투였다고 우길 거지?

배가 열 세척은 넘었으니 울돌목의 명량대첩과는 비교되지는 못하겠지만....

결국 그는 수전을 대승으로 이끌고 왕으로 자의 반 타의 반(?) 추대를 받는다.

정말 모두가 추대를 했을까?

자야바르만 7세가 왕권에 대한 야망이 있지 않았고?

 

국교를 불교로 개종을 하고 대대적인 개혁과 국론의 통일, 지방 호족들의 단속 그리고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받아 왕권을 굳건히 하고 자신이 하늘로부터 왕권의 부름을 받았다고 알리기 위하여 부모를

미화시키는 작업인 용비어천가를 부르게 된 게 아닐까?

"짐이 부처다~~" 하고 말이다.

 

따라서 이런 사원을 지어 봉헌하게 되었다.

용비어천가의 의미와 같은 개념이 아니겠는가?

조선의 이성계는 글로써 조상님들 미화 작업을 하였지만, 자야바르만 7세는 신전으로 했다는 것뿐이다.

북문 입구의 해자 위에 유해 교반을 의미하는 다리가 있으나 대부분 훼손되고 말았다.  

 

그는 앙코르 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장군이었으며 동시에 전략가이고 동남아시아의 맹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결국 재임 시 너무 많은 토목공사로 재정의 위축을 가져오고 많은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을 겪으므로 결과적으로 후대에 부담을 주고 앙코르 제국이 사라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왕이 되고 만다.

 

다리 아래에는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이 지역은 물 웅덩이만 있으면 아이들이 놀고 있다. 

 

물 웅덩이는 아이들의 놀이터이며 또 한 그들에게는 반찬거리를 잡는 그런 곳이다.

아이들은 카메라를 든 佳人을 보자 오히려 사진을 찍어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바수키를 잡아당기는 신들의 손에 암리타 냄새라도 맡으려고 도마뱀이 있구나... 

도마뱀과 바수키는 사촌간인가?

이 놈아~~ 거기는 나쁜 신들인 아수라가 있는 자리인데...

이것이 만들어 진지 800년이 다 되어 간다.

이제 200년만 더 있으면 불로 영생 2차 암리타가 나오는 1.000년이 되어 간다.

 

고푸라 문 양쪽에 비쉬누 전용 자가용인 가루다가 엄청난 크기로 멋들어지게 담벼락에 스파이더 맨처럼

딱 붙어 장식되어 있다.

마치 담벼락에 누가 오래 붙어 있나 내기하듯이....

 

비쉬누의 9번째 마지막 화신이 바로 부처다.

그래서 부처는 비쉬누의 자가용인 가루다를 평생 렌터 카로 탈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

그 아래와 위로는 수많은 부처가 벽면을 가득 장식하고 있다.

월담하는 자...

담장 밑으로 구멍 파는 자...

모두 부처님이 혼내주신다.

 

탑문을 통과하니 크기를 짐작하기도 어려운 나무가 밑동만 남기고 잘려 있다.

 

내부로  들어가는 테라스에는 사자와 나가와 영혼이 없는 수문장인 드바라팔라스가 지키고 있다.

남자 수문장이 지키는 곳은 대체로 남자들을 위한 곳이다.

이곳도 아버지를 위한 곳이라 겸손하게 단층 건물로 지었다.

 

이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이곳 프레아 칸의 출입문 입구를 지키는 드바라팔라스의 목은 모두 잘렸다.

집단해고라도 당했나?

아마도 아유타야 왕국 샴족의 침입 때 그들에게  당했을 것이다.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 드바라팔라스는 맨발이다.

佳人 : "신발이라도 빌려 줄까?" 

사이즈가 맞지 않는단다.

신발보다 더 급한 게 무좀약이란다.

 

돌로 짜 맞춘 문틀이 엄청난 두께로 견고하게 보인다.

 

온화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 하는 벽감 속에 압사라의 모습....

자야바르만 7세 때 만든 압사라 부조는 주로 벽감을 이용하여 깊게 파고 마치 조각품을 벽속에 장식품으로

넣어 놓은 듯 만들어 수리야바르만 2세 때 만든 벽면을 이용한 부조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초기 때 붙여 놓은 모습에서 점차 부조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내부로 들어오니 마치 미로처럼 얽혀있다.

창문 사이로 보이는 외부 풍경.... 

 

이곳의 요니는 한 번에 링가를 3개씩이나 모실 수 있는 슈퍼 요니가 있다.

그런데 왜 불교로 국교를 바꾸었다는데 쉬바 신은 남의 집에 셋방살이를 하시나?

이들이 말하는 불교로의 개종은 우리가 생각하는 국교의 변화와는 다른 모양이다.

 

완전히 다른 종교가 아니라 힌두교의 여러 신 중 비쉬누의 화신인 부처를 믿는다고 생각하기에 뿌리는

결국 힌두교라는 의미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비쉬누 신의 추종자다,

초기의 쉬바 신을 모신 것에서 비쉬누로 바뀌고 자야바르만 7세는 비쉬누의 화신인 부처를 숭배했다는 것뿐이다.

 

佳人이 들어가니 문 옆에 서 있던 수문장 드바라탈라스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 사람아~ 무얼 그리 놀라나~~~ 자네 또 졸다가 그랬지?"

"고객님이 이용하실 길은 그냥 쭉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잔소리하지 마시고..."

여기도 따프롬처럼 나무의 공격에 신음하고 있다.

 

한쪽 벽면을 보자.

돌을 쌓아 놓은 틈 사이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이곳에 파인 홈은 아마 부조물을 붙였던 자리로 생각된다.

면도칼이 있었다면 틈 사이로 넣어 보았을 텐데.

 

중앙 성소에는 스투파 탑이 자리하고 있다.

옛날, 사원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아버지를 형상화한 관세음보살이 이곳에 있었단다.

아버지가 관세음보살이면 마치 자야바르만 2세는 부처의 화신인 양 국민들에게 오인하게 하려고?

 

중국에 불교를 대대적으로 전하고 운강 석굴이나 낙양 석굴을 팠던 북위도 담요라는 고승이 불교를

국교로 접목하기 위해 북위의 왕인 문성제를 설득하기 위해 문성제부터 5대 조상이 모두 미륵이었다고

함으로 문성제는 자신이 부처라는 망상에 빠져 불교를 국교로 정했다고 하지.

 

방향을 왼편으로 틀어 원래 왕의 전용 출입문인 동쪽으로 향한다.

 

여기도 나무에 짓눌려 흉물스럽게 파괴된 모습이다.

나무를 잘라내어 정리를 했다고?

뿌리도 없는 나무가 잘린 부분에서 다시 잎을 틔운다.

더 이상 잘라내지 못한 이유는 유적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는 오히려 유적이 나무의 은덕으로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문틀 위의 부처상은 대부분 훼손이 되었다.

아마 자야바르만 7세 사후에 힌두교로 개종을 하며 생긴 파괴가 아닐까? 

여기도 고개만 들고 쳐다보고 다닌다. 

 

내일 프레아 칸을 더 들여다보자.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지도자가 부모님을 너무 사랑하면 민초들은 힘이 더 든다.

부모에게 하는 효도란 살아생전 해야지 죽은 후에 이렇게 효도를 한다 함은

민초들 등골 빼먹는 일이다.

죽고 나서 묘를 크게 써서 효도하려고 하지 말고 살아생전 전화라도 자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