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지

2022. 8. 19. 03:57금수강산 대한민국/경기, 인천

 

제암리.

아마도 우리 민족이 영원이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긴 곳이 아닐까요?

오늘은 마음의 상처를 남겼던 제암리 3.1 운동 순국유적지를 찾았습니다.

 

 

1919년의 3·1 운동은 개신교가 한국 민족주의 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겠네요.

개신교는 천도교-불교와 함께 3·1 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독립만세시위 중 상당 부분이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주도됐다고 봐야겠지요.

 

 

그만큼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한 피해도 많았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경기도 화성시의 제암리 교회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일제 경찰은 1919년 4월 15일 오후 제암리 교회에 신자들을 모이게 한 후 문을 걸어

잠그고 교회에 불을 지르면서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며, 이 때문에 23명이 목숨을 잃었다지요.

위의 사진이 제암리 교회로 그때의 모습이 아니고 새롭게 단장했네요.

 

 

이는 4월 5일 발안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제암리 교회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이라고 생각됩니다.

 

 

1905년 8월 제암리 이장이었던 안종후의 주도로 설립된 제암리교회는

동족 부락이라는 특성 때문에 유난히 강한 단결력을 지녔는데 3·1운동 때도

이 같은 성격은 그대로 나타났다고 하네요.

 

 

일제 경찰은 이어 이 짓도 모자라 제암리의 가옥 30여 채를 불태우고

5백 m 떨어져 있는 고주리에서 천도교 신자 6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이 같은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 일대에서는 사람과 가옥, 가축, 의류, 곡식 등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10여㎞ 밖까지 퍼져 나갔다고 전합니다.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이 일어난 후 신자나 일반인들은 일제의 보복과 감시 때문에

사건 현장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희생자들의 시신은 사건을 전해 들은 캐나다 의료선교사 스코필드 박사가

며칠 후 불탄 교회에서 유골을 수습하여 인근 공동묘지입구에 묻을 때까지 방치됐다고 하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인물이 스코필드 박사이고 그 뒤로 보이는 것이 그가 타고 온 자전거입니다.

 

 

그냥 묻힐뻔했던 제암리 일은 이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가 수원역까지 기차를 타고

그곳에서 삼엄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자전거를 이용해 이곳까지 달려왔고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이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답니다.

 

 

스코필드는 참혹한 현장의 모습과 기록을 생생하게 국외로 보내

일본의 비인도적인 침략행위를 알렸답니다.

위의 사진에 당시의 스코필드 박사의 행적을 담은 모습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당시의 생생한 실상은 아마도 묻혀버렸으지도 모릅니다.

 

 

제암리 교회는 1919년 7월 자리를 옮겨 다시 건립됐고, 1938년 현재의 위치에

기와집 예배당이 만들어졌지만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은 광복 후까지 기다려야 했다지요?

 

 

1959년 4월 사건 현장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된 (3·1 운동 순국 기념탑)이 세워졌고,

1970년 9월에는 일본의 기독교인과 사회단체들이 속죄의 뜻을 담아 보내온

1천만 엔의 성금으로 새 교회와 유족회관이 건립됐다네요.

 

 

또 1982년 9월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유해 발굴작업이 실시돼 교회 옆에 마련된

묘소에 안장됐으며, 다음 해 7월 기념관과 새 기념탑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고 그런 사실이 남아있기에

우리는 그런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후손에게도 알게 하기 위해 이어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제암리 3.1 운동 순국 유적지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