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23. 09:00ㆍ중국 여행기/윈난성 여행 2016
비가 계속 내리니 운무마저 걷히지 않습니다.
화창한 날이 그립지만, 그런 날은 볼 수 없는 풍경을 볼 수 있으니 이런 날도 걸을 만합니다.
걷는 중간마다 쉼터가 있어 잠시 비를 피했다 갈 수 있고 간단한 요기도 하며 갈 수 있네요.
트레킹 시작 두 시간이 지나자 반대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옵니다.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지나려는데 우리끼리 하는 말을 들고 한국인이냐고 반가워합니다.
세상에...
이런 운무 자욱한 창산 허리를 걸으며 같은 한국인끼리 중국어로 인사하다니...
오늘 트레킹 시작하고 처음 만난 사람입니다.
그만큼 비가 내리는 날은 이 길을 걷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이겠죠.
비가 많이 내리니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도 많습니다.
물소리조차 요란합니다.
어느 날 쿠빌라이는 군사를 이끌고 이 엄청난 창산을 넘어 따리 고성을 들이닥쳤다지요?
그때까지는 이곳 따리는 바이족만이 알콩달콩 살아갔다네요.
중원과는 다른 나라였다지요?
지난번 이곳 따리를 집어삼키려고 들이밀다가 10만여 명이나 되는 병사가 얼하이에서 고기밥이 되었다지요?
그동안 절치부심 이곳을 노리다가 1253년 12월 12일 드디어 2차 침공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먼젓번의 침공 때 쓴맛을 본 지라...
결국, 따리의 이웃사촌인 리장 나시족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 도움이란 바로 김밥 옆구리 작전으로 쉽게 접근 가능한 샹관이나 샤관을 피해
기상천외한 방법이며 단순 무식한 방법인 창산을 말을 타고 넘어와 따리 고성의 옆구리로 들어온 것이라네요.
어느 누가 그런 방법을 상상이나 했겠어요?
쿠빌라이는 이 어려운 일은 또 해냈지 뭡니까.
그동안 주요 침투로라고 예상하고 상관과 하관만 눈이 빠지라 지켰던 따리국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지요?
요게 바로 따리에게는 12.12사태라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을 말을 타고 넘었다고요?
이곳에 길이 있는지 어찌 알고요.
이들이 넘었던 길이 지금 이곳에서 관광용으로 개발해 말을 타고 오르내릴 수 있는 이런 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혹시 이곳 마부들은 그때 이 산을 넘어 들어온 쿠빌라이의 후손이란 말인가요?
아니면 그때의 상황을 느껴보라는 의미로 관광객을 말에 태우나요?
사실 수전에 약한 몽골의 기마병이 아닌가요?
작은 내라도 건너려면 오금이 저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그러나 이런 산은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나 봅니다.
그랬나 봅니다.
룰루랄라~ 노래 부르며 넘었지 싶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뒤에는 아주 대단한 길잡이가 있었다네요.
그들이 무슨 수로 이 산길을 알고 넘었겠어요.
저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곳 따리 공략에 고심하던 차에 리장의 나시족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치권을 얻기 위해 쿠빌라이와 딜을 성사시킵니다.
그게 바로 스스로 앞장서서 침공 루트를 알려주는 일이지요.
그동안 이곳을 드나들며 바이족과 장사를 했던 이들이기에
이곳 지리는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이런 일 덕분에 리장의 목 씨는 자자손손 오래도록 중원의 보호 아래 리장을 다스리며 해피하게 살았을 겁니다.
그래서 한동안 이곳에 사는 바이족은 나시족과는 혼인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나시족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을 겁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형님 동생 하며 살갑게 대하고 살았던 이웃일지라도
제 살길 찾는다고 그런 짓도 서슴지 않았네요.
이때부터 모든 상권은 리장으로 넘어가고 차마고도를 통한 모든 교역의 집합지로 리장은 승승장구했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이곳 따리보다는 리장이 더 번창하고 관광객마저 야속하게도 따리보다는 리장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이곳 따리에 평남국을 세웠던 두문수라는 사람 말입니다.
그는 회족이지만, 자신을 도와 새로운 세상을 였었던 바이족과 힘을 합쳐 과거 쿠빌라이의 충견이 되어
창산을 넘는 비밀 침투 루트를 알려준 나시족에 대한 철저한 응징에 들어갔다지요?
지금은 세상의 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리장을 완벽하게 파괴함으로 그때 입었던 원한을 갚았다나요?
배신은 복수를 부르고 그 복수는 피를 부릅니다.
역사란 리장 고성 입구에 돌고 도는 대수차처럼 돌고 도는가 봅니다.
세상의 역사란 힘 있는 자만의 기록입니다.
사라진 나라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오기 전에 장강의 줄기였던 진샤지앙(금사강: 金沙江)은 어찌 건넜을까요?
그때의 흔적을 보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런 자료사진에서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잖아요.
바로 이렇게 한 마리의 양을 통째로 벗겨 네 군데 발을 단단히 묶고
목 부분으로 바람을 넣고 묶어 튜브로 만들어 넘어왔을 겁니다.
이렇게 만들어 물놀이하는 기분으로 도강했지 싶네요.
건너오다가 묶었던 곳이 풀리기라도 한다면?
팔자소관이려니 해야 하지 않겠어요?
마지막 한마디를 하고 죽었을 겁니다.
"제가 초원을 사랑했던 것만큼 초원도 저를 사랑하고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죽고 난 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도 이런 도강 방법은 나시족이 몽골군에게 전수했던 도강작전의 필수 도구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몽골군이 늘 타고 다니는 말은?
위의 사진처럼 배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말이란 동물은 비록 초원을 생활무대로 살아왔지만, 그야말로 동물적 감각으로 스스로 터득해 강을 건넜을 겁니다.
그러나 급류나 위험한 곳을 건널 때는 이렇게 줄을 이용해 말을 묶고 매달아 건너편으로 보냈지 싶습니다.
오늘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길을 걸었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렇게 옥대운유로 트레킹을 마치고 중화사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길을 따라 산을 내려옵니다.
이 길은 비가 오는 날에는 걷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끄럽고 위험한 길입니다.
날이 좋은 날은 걸어 내려올 만하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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