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 08:00ㆍ금수강산 대한민국/경기, 인천
강화도에는 고려 시대 궁궐터가 있었다네요.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1232년 도읍을 개성에서 이곳 강화도로 옮긴 후
궁궐을 세운 후 39년간이나 이곳에 터를 잡았다네요.
이때 최우는 2.000여 명의 군사를 데리고 직접 여기에 궁궐을 세웠다 합니다.
규모는 작았지만, 궁궐과 관아는 개경과 같은 이름을 사용했으며 뒤로 보이는 산을 송악이라고 불렀답니다.
결국, 몽골과 화친을 선택하고 다시 개성으로 1270년 환도할 때
몽골과 약속으로 이곳에 세웠던 왕궁을 모두 헐어버렸답니다.
그 결과 그때의 궁궐 모습과 성벽터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네요.
당시는 지금의 궁궐터보다 훨씬 큰 규모였으나 세월이 흐르며 점차 부근은 민가로 변하고 지금의 터만 남았네요.
유수부 동헌은 강화지역의 관리가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추녀 밑에 현판이 보입니다.
명위헌(明威軒)이라고 쓴 듯합니다.
아마도 이곳에서 업무를 보며 현판에 새긴 글대로 공정하고 위엄있게 업무를 보려 했을까요?
현판의 글은 영조 때 명필인 윤순이 쓴 글이라고 합니다.
그 후 조선 시대에 접어들며 이곳은 왕이 행차 때에 잠시 머무는 행궁터로 사용되었고
그 외에 유수부와 동헌, 이방청, 외규장각, 장년전, 만녕전 등을 건립하였으나 이 또한 병자호란이나 병인양요 때
모두 불타버렸다고 하네요.
외규장각은 1782년 정조 6년에 황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세웠다지요?
이는 왕립 도서관이라고 해야 하겠네요.
그러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여 이곳에 들어와 외규장각에 보관했던 많은 서적을 약탈하고
외규장각 건물은 불을 질러버림으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지요.
이때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채식 비단으로 표지를 선명하게 만든 어람용 의궤를 본 순간 매우 소중한 것이라 여기고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래도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수백 권의 책을 비롯해 족자와 지도 그리고 갑옷 등 이때 약탈했던 보관품의 양이 상당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된 것을 알 후 시민단체와 정부 간 협의에 의해 1993년 처음으로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1권이 먼저 반환되었지요.
그 후 외규장각의궤가 돌아오게 되었답니다.
그동안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깊은 잠에 빠졌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인 강화외규장각의궤 297권이
약탈된 후 145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며 깊은 잠에서 깨어났지요.
외규장각은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는 곳이라 합니다.
어람용 의괴는 특별히 겉표지를 비단을 사용하고 종이도 고급지인 초주지를 사용했다지요?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우엄을 더했다 합니다.
지금은 1964년에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네요.
현재 이곳에 남아있는 건물은 조선 시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그리고 외규장각 등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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