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성(高敞邑城)

2023. 6. 7. 04:00금수강산 대한민국/전라북도

전라북도 고창은 우리나라에서 군 단위로는 최대의 고인돌 밀집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지요.

그러나 고인돌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축성했다는 고창읍내에 있는

고창읍성(高敞邑城) 또한 우리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한 곳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고창읍성을 구경하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역사 유적을 좋아하기에 지금까지 유명하다는 읍성이 있는 곳에 구경을 제법 다녔습니다.

그러나 고창읍성은 다른 성과는 달리 무척 흥미로운 곳이더라고요.

 

주 출입문이 북문이라는 점도 그렇고 동서남북 네 곳으로 문을 만들지 않고 남문이 없다는 점.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축성했다는 점.

따라서 외침이 있을 때 성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려는 적을 쉽게 제압할 수 있겠지요.

 

또한, 성내에는 관아만 만들고 평상시에는 주민들은 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고창읍지나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삼지사천(三池四泉)이 있는 점.

삼지사천이란 말은 3개의 연못과 4개의 우물이라는 말인데 이는 전쟁이 있을 때

장기전에 대비해 충분한 물을 성 안에 보유했다는 점이지요.

 

또 재미있는 점은 위의 사진 자료에서 보듯이 "濟州始", "和順始", "羅州始", "癸酉所築宋芝政" 등

축성에 참여했던 고을 이름과 축성 연대를 성벽에 음각으로 새겨 언제 어느 고을에서 참여했는지

알 수 있는 점으로 계유년(1453)에 전라 좌, 우 도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축성했음을

알 수 있어 여느 읍성과는 다른 독특한 점이 많아 흥미롭게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로는 숙종 때 이항(李恒)이 주민의 힘을 빌려

8년 만에 완성시켰다는 설도 있다고 하네요.

성벽에 새겨진 마을 이름의 글자로 미루어 보아 계유년에 전라도의 여러 마을 사람들이

축성을 위하여 역부(役夫)가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계유년이 어느 해인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성벽 축성법으로 보아 1573년으로 짐작되기에 단종 원년에 축성했다는 것을 정설로 본다네요.

 

동쪽으로 진산(鎭山)인 반등산(半登山)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 서, 북 세 곳에는 군사를 주둔시키거나

성문을 방어하기 쉽게 하기 위한 월성(月城)이라고도 불리는 각각의 옹성(雍城)과 문(門)이 있습니다.

 

6개소에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인 치성(雉城)을 비롯해  2군데의 수구문과

성 외부로 해자도 있어 전략적으로도 요충시설로 일본의 왜침(倭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으로도 제대로 만든 구조로 축성했다고 합니다.

 

고창읍성은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고창지역이 백제 때 모량부리(毛良夫里)로

불렸던 것에서 유래된 듯하다고 하며 이 성은 나주 진관의 입안 산성과 연계되어

왜침으로부터 호남 내륙을 방어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생각하고 만든 읍성이라고 합니다.

 

1965년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이며 높이는 4~6m에 달한다고 하며

음성의 내부 면적은 18만 9764㎡라고 합니다.

1976년 발굴에서 서문터의 기둥 주춧돌과 문짝 달던 위치, 동문터의 기둥 주춧돌을 확인되었다네요.

 

성벽은 예전 모습으로 제법 잘 남아 있는데,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을 쓰거나

초석, 절에서 사용했던 당간지주를 깨어서 쓴 것도 있다고 하네요.

이와 같은 읍성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형태로서 행정 및 군사 시설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읍성 안에는 동헌을 비롯해 고을 수령이 머물었던 내아가 있고요.

중앙정부나 외부에서 이 고을을 찾아온 빈객이 머물 수 있는 객사도 있더라고요.

평상시에는 읍성 안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외침이 있을 때만 주민이 들어와 대항했던 읍성입니다.

 

그리고 위의 사진에도 보이는 관청이라는 건물은 관주라고도 했다는데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일을 담당했던 곳이라고 하고 수령과 그 식솔은 물론 빈객의 접대나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회계처리를 했던 곳이라고 하네요.

 

이번에 보시는 건물은 작청이라는 건물입니다.

작청은 질청이라고도 했다는데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업무를 처리했던

일종의 청사라고 보입니다.

 

이번에 보시는 건물은 등양루라는 누각입니다.

누각 아래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습니다.

고창읍성에 있는 주 출입문인 세 개의 문 중 하나로 동문입니다.

문 밖으로는 옹성을 설치해 효율적으로 외부 침입을 막을 수 있게 만들었더라고요.

 

이번에 보시는 누각은 풍화루라는 누각입니다.

읍성 안에 있는 연못 옆에 세운 2층 문헌에는 읍성 안에는 빈풍루와 풍화루 두 개의 누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풍화루만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하네요.

풍년과 고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풍화루라고 했나 봅니다. 

 

이번에 보는 것은 동헌과 내아로 올라가는 언덕 위에 있는 건물로 장청이라는 건물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왕궁과 병영 및 진을 지키는 중앙군인과 지방의 군현을 지키는 속오군 제도가 있었답니다.

정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과 병방, 군교들이 군무를 보살피는 청사라고 합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향청이라는 건물로 지방의 수령을 보좌하는 자치기구 청사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유향소라고 불렀다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 향청으로 불렀다네요.

이곳의 주 업무는 지방의 향리를 감시하고 고을의 분위기를 조상하는 향촌교화였다네요.

 

위의 사진은 주 출입문인 북문으로 들어오는 옹성입니다.

이렇게 옹성으로 들어와야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지요.

 

북문은 공북루라는 누각이 있는데 고창읍성을 대표하는 출입문이지요.

옹성도 다른 출입문에 비해 넓고 더 높이 쌓았습니다.

성벽 위로는 여장도 만들고 총안도 설치했네요.

 

공북루 안으로 들어오면 왼쪽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감옥인데 조선시대에는 대개 입구에

옥을 설치하여 위엄을 보였으며 건물 주위를 둥글게 담장을 쳤기에 원옥이라고도 불렀다네요.

옥 앞에 형틀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 곤장도 쳤을 겁니다.

 

당시는 고을 현감이 통치는 물론 재판장까지 겸했으니 동헌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죄를 지은 자에게 합당한 벌을 내려 이곳 옥에 가두었겠네요.

물론 남녀가 유별하기에 동서로 두 개의 옥을 만들어 분리 수감했다고 합니다.

 

이런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이곳 고창읍성에서는 위의 사진 속의 드라마였던

미스터 션샤인 외에도 많은 영화나 드라마가 촬영되었다고 알려졌지요.

특히 동분에 해당하는 등양루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사실 등양루가 있는 성 안은 위의 사진에 보이는 모습처럼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이 아니라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졌는데 드라마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했고 고창읍성의 3개의 문 중

동문인 등양루에서 많은 촬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여기가 가장 아름답나요?

 

고창읍성의 위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