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11. 08:00ㆍ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남문 쪽에는 아주 한적한 곳이네요.
가릉강변을 걸을 수 있지만, 지금은 시즌이 아닌가 봅니다.
옛날에 만든 성벽과 성문이 남아있습니다.
아마 예전에는 제일 혼잡한 지역이 바로 남문 부근이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물류가 바로 가릉강을 통하여 랑중 중심부로 드나들었을 것 아닌가요?
바로 여기가 마터우라는 부두입니다.
이곳은 바로 강을 따라 내려가면 지금의 충칭과 연결되고 계속 내려가면 장강을 따라
중원으로 통하는 문명의 길이었을 것 같고 여기서 지금의 청두라는 익주 또한
미엔양을 거치며 내려가면 지형이 평탄해 오가기 쉬웠을 것이고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예술입니다.
그래요. 사랑만큼 강한 임팩트를 주는 예술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세상에 누구나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가끔은 우리 생각에 어긋나는 슬픈 일도 많더군요.
그 성벽 밖으로는 가릉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비단 병풍을 두른 듯
금병산이 강을 따라 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침 결혼식을 앞둔 듯한 젊은 피앙세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사랑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佳人도 저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릉강을 따라 객잔도 제법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객잔의 크기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넓습니다.
물론 입구는 작지만...
이곳 남문에 객잔이 많은 이유가 예전에 배를 타고 오르내렸던 가릉강이라
모든 물류의 이동이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러다 보니 마터우라는 부두가 있고 부두를 중심으로 세상의 모든 곳처럼
객잔과 주막이 번창했을 겁니다.
랑중마을이 서천지방의 맹주 노릇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 부두 때문이 아닐까요?
워낙 산이 높아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았던 지방이라 유일하게 쉽게 수로를 따라
중원과 교통할 수 있는 마을이 바로 여기 랑중마을이라는 말이겠네요.
오늘도 먼 길을 힘들게 배를 타고 온 덜수가 여기 부두에 내려 잠시 계단을 올라와
뒤돌아서서 이곳 경치를 바라보았을 겁니다.
느낌이 있는 참 아름다운 마을이구나 생각했겠지요.
왜 아니겠어요?
여기가 바로 주역에서 말하는 약속의 땅인걸요.
이번에 장사만 잘되면 큰돈을 만질 수 있고 그 돈으로 고향에서 장래를 약속한
덜순이와 혼인할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산다는 게 고난이라고요?
덜수는 고난이라는 말이 실감 나지 않습니다.
덜순이와의 사랑만 생각하면 절로 힘이 솟고 힘이 나는걸요.
이런 힘든 일도 곱디고운 미소를 짓는 덜순이만 생각하면
춘삼월 봄눈 녹듯 사라집니다.
그래요. 돌아오는 춘삼월에는 덜순이와 혼례라도 치뤄야 하겠어요.
생각만 해도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 사내는 행복한 사내입니다.
생각하면 가슴이 콩닥거리는 일이 있는 사내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이런 느낌도 없이 살았다면 헛 살았다는 말일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잠시 두리번거리며 금병산을 바라보는데 그때 누가 옆에서 말을 걸어옵니다,
돌아보니 예쁜 아가씨네요.
뽀얀 분칠을 한 아주 귀엽게 생긴 샤오지에...
깨끗한 방이 있다고 숙소를 구할 거면 싸게 묵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의 삐끼가 그 옛날 덜수가 살던 시절에도 있었다는 말이네요.
덜수는 그 아가씨를 따라갑니다.
지금 위의 사진에 보이는 수항자라는 아주 좁은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골목입니다.
전쟁이 많은 나라의 골목은 이렇게 일부러 좁게 만들고 구불거리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적이 말을 타고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도 막고 혼자 막아서면
일개 중대 병력도 막아설 수 있잖아요.
삶이 전쟁이고 건축이 자연 방책이 되는 나라가 중국인가 봅니다.
이런 것을 삶의 지혜라고 해야 하나요?
중국의 후통이라는 골목길은 바로 중국 인민이 살아가는 삶의 지혜라 봐야 하겠네요.
그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니 큰 길이 나오고 그곳에 두가객잔이라는 커짠이 있습니다.
덜수가 얼마냐고 묻습니다.
하룻밤에 300원이랍니다.
결혼을 앞둔 덜수는 지금은 돈을 모아야 하기에 하룻밤에 300원이라는 돈은
무척 부담스러운 금액입니다.
덜수는 비싸다고 돌아서니 그 아가씨는 200원까지 깎아 주겠답니다.
덜수는 돈을 아껴야 고향의 덜순이에게 곱고 예쁜 머리핀이라도 사다 줄 텐데...
지난번 장삿길에서 징저우와 이릉을 들렀을 때 옥으로 만든 반지와
노리개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그 노리개를 한 덜순이의 웃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대로 돈을 허투루 쓸 수 없습니다.
그 옥 노리개와 반지를 낀 덜순이의 손과 모습을 생각하니
마치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선녀로 생각됩니다.
비단옷을 입힌 모습을 상상하니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냥 그런 상상만으로도 덜수는 행복합니다.
어디 덜수 뿐이겠어요?
사내란 말도 없고 무뚝뚝하다고 하지만, 사실 어떤 때는 여자보다
더 섬세한 상상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 짓게 할 수 있다면 이는 진정 행복한 일이 아닐까요?
미소란 나를 위해 짓는 게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상대를 위해 짓는 일이잖아요.
그래요.
늘 상대를 향해 미소지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를 행복하게 해 줄 겁니다.
이런 생각이 미치자 열흘 묵을 테니 하루에 100원씩 하자고 합니다.
아마도 랑중에서는 열흘 정도 장사를 해야 할 듯합니다.
이번 장삿길에 이곳 랑중 사람이 좋아하는 비단을 많이 준비해 왔거든요.
그리고 날씨가 찬 요즈음 침대에 띠엔러딴이라는 전기장판도 있어야 한다고요.
그리고 덜수는 "커이마?" 하고 묻자 아가씨는 잠시 생각하더니만, 열흘이나 묵는다는데
요즈음 비수기라 손님도 없어 고민스럽기에 "커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방을 놀리면 뭐합니까?
장사란 이렇게 살아있는 생물과 같아 언제든지 변할 수 있을 거잖아요.
이렇게 덜수는 이 집에 머무르며 열흘간 랑중고성에 좌판을 열고 장사를 했답니다.
그리고 여기 랑중에 열흘동안 머물며 장사를 해 큰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
덜순이와 혼례를 치르고 알콩달콩 살았다는...
그때 덜수가 묵었다는 전설의 객잔이 바로 여기 두가 객잔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두가 객잔을 그 크기가 엄청나네요.
어디 두가객잔 뿐이겠어요?
이곳 마터우 부근의 객잔은 그 크기가 우리의 상상 그 이상입니다.
그러니 앞문으로 들어가 계속 연속적으로 사합원으로 된 건물 몇 개를 연속으로
지나면 바로 다음 블록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 마을의 객잔은 이렇게 앞면은 그냥 보통 집 크기로 보이나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 한 블록을 차지할 만큼 규모가 대단히 크네요.
이 말은 이곳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오고가던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겠어요?
우리도 덜수 따라 들어가 구경하자고 이야기하고 반대편 후문이 있는 곳으로 나가
강가로 다시 나왔습니다.
이 객잔은 청나라 중기에 만든 객잔으로 200여 년이 넘는 세월을
객잔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나무로 지었고 면적이 2.418제곱미터며 크고 작은 방만 87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객잔의 넓이가 약 800여 평이라는 말인가요?
건물 안쪽에 정원만 9개가 있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대문은 八자형으로 되어있고 밖에서는 대문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조벽이라는 가리개가 설치돼 있습니다.
원래 중국은 복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아놓고 삽니다.
그 복이 숨을 쉬지 못해 썩고 문들어져 냄새가 진동해도 말입니다.
그래서 복이 안으로부터 곪아터진 후에야 새로운 복을 심나 봅니다.
정원에는 진기한 조류와 기이한 짐승 등의 부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부조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었고 자태가 다르고 매우 다양하게
만들었는데 이렇게 폐쇄된 공간에 살다보니 그나마 가운에 작은 정원을 꾸미고
꽃을 심고 나무도 심었습니다.
그리고 기둥이나 처마 장식에 주로 복을 가져다 준다는 짐승이나
꽃모양을 조각해 분위기를 업시켜주었습니다.
두가객잔은 옛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민속전람관이 있고
객실 또한 덜수가 묵었던 그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네요.
물론, 이 지방만의 특색을 맛볼 수 있는 식당도 운영한다 하네요.
이렇게 한참을 객잔을 가로질러 나오면 반대편 길로 나오게 됩니다.
마터우라는 부둣가에 있었기에 한때는 무척 번창했을 것 같습니다.
랑중의 발전하고 번창했던 원동력은 바로 이런 뱃길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이곳 랑중은 물류의 거점이고 교통의 요충지고 군사상 대단히 중요한 곳이라는 의미겠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욕승인자 필선자승(欲勝人者 必先自勝)
욕론인자 필선자론(欲論人者 必先自論)
욕지인자 필산자지(欲知人者 必先自知)
남을 이기려는 자는 먼저 자신을 이겨야 하고
남을 따지려는 자는 먼저 자신을 따져야 하고
남을 알려는 자는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한다.
여불위의 말이라 합니다.
남을 이기려고만 했지 자신을 이기지 못했고
남의 허물을 따지려고만 했으나 자신 스스로의 허물은 따지지 못했고
남을 알려고 했지만, 자신도 알지 못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장비가 명심했더라면 이곳 랑중에서 그런 억울한 죽음은 없었을 텐데...
이런 자가 어디 장비 뿐이겠어요?
佳人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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