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중 화광루(華光樓)에 올라..

2013. 7. 12.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자연과 인간의 완벽한 동거...

바로 주역에서 말하는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 마을이 랑중고성이라 합니다.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행복하지 않나 봅니다.

여기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풍수 지리적으로도 완벽한 마을이어서

중국에서도 가장 살고 싶었던 곳이라 하네요.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런 아름다운 마을을 떠나려 합니다.

이제 이 마을은 佳人의 마음속에만 남는 그런 마을이 될 것입니다.

여행자는 더 머물고 싶어도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위의 사진은 화광루라는 누각에 올라 가릉강 건너의 금병산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반대로 저 산 위의 정자에서 여기를 바라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

언젠가 다시 한번 이 마을을 찾아가렵니다.

혹시 동행하실 분이 계시면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이 고성을 다니다 보면 작은 박물관이 무척 많습니다.

사실 랑중 고성 전체가 박물관이 아닌가요?

천천히 랑중고성을 걷다보면 마치 살아있는 박물관 속을 거니는

그런 느낌이 나는 곳이었습니다.

 

여기 그 중 하나인 물 박물관이 있습니다.

세상에 물 박물관이라니...

화하수박물관(華夏水博物館)이라 하네요.

화하(華夏)라는 말은 옛날 중국을 일컫는 말이라 하네요.

어느 의미로는 중원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지요?

 

이 집은 한자로 옥(玉)자 형태로 집을 지었다 합니다.

랑중에서 가장 큰 정원을 가진 곳으로 부두를 내려다보는 곳에 있습니다.

이 또한 지금은 객잔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안에 들어가면 가릉강과 관련이 있는

많은 전시물이 있다고 합니다.

 

가릉강 부두에서 고성 중심부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앞에 아주 멋진 누각이 보입니다.

화광루(華光樓)라는 누각입니다.

이층 현판에 랑원제일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걸 보아 랑원에서는 제일 멋진 누각인가 봅니다.

 

사실 여기도 멋진 누각이지만, 먼저 올랐던 중천루(中天樓)라는 곳도

여기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중천루는 나무 기둥 네 개로 누각을 지탱하지만, 여기는 성문형태로 만들어 그 위에 누각을

올렸는데 아마도 부두에 도착한 사람이 고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필히 통과해야 하는

대문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안으로 들어와 다시 밖을 향해 한번 올려다봅니다.

화광루는 고성의 남쪽 부근에 있습니다.

바로 이 문으로 나가면 가릉강의 부두가 있으니 아마도 랑중을 드나들던 모든 사람이

이 누각 아래로 다녔을 것 같습니다.

그 옛날 랑중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이 누각 아래를 통하여 고성 안으로 들어왔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곳이라 장비의 모습도 보이네요.

혹시 위나 오의 세작이 드나들까봐 장비가 지키나 봅니다.

 

이제 누각 위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누각 안에는 이렇게 나무로 화광루와 중천루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화광루(華光樓)를 다른 말로 고성 남쪽에 있기에 남루(南樓),

또는 진강루(鎭江樓)라고도 불렀다 합니다.

 

아주 오래전 랑중의 모습으로 보이네요.

이런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라 여기를 랑중선경이라 불렀나 봅니다.

사진에 보이는 나무 병풍에 새긴 작품을 보면 무릉도원이 바로 여기라고 보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곳은 佳人이 여러분에게 추천한 강 건너 금병산 정상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이 누각이 제일 처음 지어진 시기는 당나라 때라 합니다.

그동안 많은 전란으로 수차례 불타버렸으나 그때마다 마을의 가장 높은 상징물이라 다시 지었다네요.

지금의 화광루는 청나라 동치 6년(1867년)에 지은 건물로 벌써 150여 년이 되어 가네요.

 

삼국지 이야기에 나오는 관우와 황충이 겨루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 전투에서 관우와 황충이 서로의 마음을 열어 황충은 유비에게 귀순했으며 나중에 촉한의

오호상장 중 한 장수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했다고 했지요?

그 외에도 많은 그림이 있어 잠시 구경하기에는 그만인 곳이네요.

 

계단이 너무 가파르고 어두워 오르내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누각의 기초 높이는 5m이며 전체 높이는 25.5m로 바라보면 무척 당당해 보입니다.

지붕은 삼중 처마식으로 지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이 랑중에서는 으뜸이라고 해 랑원제일루라는 칭호를 붙였다 합니다.

 

4층 누각으로 만든 화광루 그 위에 올라 마을을 보면 높은 건물이 없어 전체를 조망할 수

있으며 가릉강도 보이고 금병산도 보이고...

이곳에 오르면 이 마을이 풍수 지리적으로 보통 마을이 아니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될 것 같습니다.

 

여기를 올라가려면 연표에 붙은 표를 이용하면 됩니다.

이로써 연표로 들어갈 수 있는 네 번째 중 마지막이네요.

연표가 모두 사용하고 없다면 이제 랑중 마을도 어느 정도 구경했다는 말이기도 하네요.

 

지금은 작은 마을이지만 이 마을에는 각종 종교시설이 모두 입점해 있다고 합니다.

도교, 불교, 천주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까지 말입니다.

중국은 오히려 종교문제는 다른 나라보다 무척 문호가 넓었나 봅니다.

 

아마도 이 마을은 세상을 모두 넉넉한 품으로 안아주고 싶었나 봅니다.

모든 종교가 지원하고 풍수 지리적으로도 완벽한 곳이기에

세상에 이런 무릉도원은 다시 없을 듯합니다.

게다가 장비 귀신까지 여기 랑중을 도와주니 세상에 이런 곳이 또 어디에 있겠어요? 그쵸?

 

그러나 무엇보다는 우리가 랑중을 찾은 이유는 장비와의 관련 때문입니다.

장환후사는 장비의 사당도 있고 묘도 있습니다.

장비의 시호인 환후(桓侯)를 따서 장 서방 환후라고 장환후사라하는 모양입니다.

 

이제 다시 화광루를 내려와 또 고성 안을 걷습니다.

이제 제법 날씨가 저물어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길거리 도로 가운데에 칠자등과(七子登科)라는 돌로 만든 표지석이 보입니다.

우리는 아주 놀라운 광경을 랑중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마을이 배출한 입곱 명의 장원급제자는 중국에서도 흔한 일이 아니라 합니다.

한 마을 출신이 일곱 명이나 급제를 한다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어요?

 

그것뿐이 아니라 합니다.

형제 급제자도 배출했다 합니다.

이는 분명 장비 귀신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작은 마을에서 그렇게 많은

장원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했을 겁니다.

오늘 비만 오지 않았다면 이 석판 위를 좌로 우로 굴렀을 겁니다.

왜?

칠자등과(七子登科)한 사람의 氣를 받기 위해...

 

역시 머리가 없는 장비 귀신은 구천을 맴도는 게 분명합니다.

만약 머리가 온전히 있었다면 이미 구천을 떠나 먼 길을 갔거나 장비 머리로는 도저히

장원급제자를 도와줄 수 없었을 겁니다.

머리가 사라진 장비는 역시 대단한 능력을 보이나 봅니다.

위의 건물은 풍수관이라는 박물관 겸 유스호스텔을 겸하고 있습니다.

천 년의 풍수 고성이 바로 랑중이라 합니다.

지금은 강아지 한 마리만 당당하게 문앞을 지키고 있네요.

 

이런 곳은 그야말로 수천 년 전에 묻어둔 타임캡슐을 꺼내보는 그런 기분이 드는 곳입니다.

세상을 살며 미래만 볼 게 아니라 이렇게 과거의 모습도 보며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여기는 장비의 이야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아니겠어요?

 

삼국지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더라고 이곳에 들려 그때 장비가 너무 서두르는 모습도 상상하고

부하장수 장달과 범강을 나무에 묶어 매질하던 모습도 상상해 봅시다.

물론, 지금이야 사라져버렸겠지만, 그 나무가 어디쯤일까 찾아보기도 하며 말입니다.

 

랑중의 밤도 어두워지고 이제 피곤한 발을 시원한 족욕도 하며 쉬었다 갑니다.

그리고 장비가 암살당했던 모습을 상상하며...

 이건 너무 끔찍하다.

왜?

그 사람들은 장비의 수급을 들고 오나라로 가져갔으니까...

 

그때 머리와 몸이 서로 이탈하는 바람에 관우처럼 장비도 다른 곳에 묻혔다네요.

몸은 이곳 랑중에, 머리는 나중에 돌려받아 충칭의 장강 변에 묻혔다 하니 젠장, 영웅이란

죽어서도 몸이 제대로 한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할 수 없고 따로국밥 귀신이 되나 봅니다.

 

그 덕분에 중국 정부는 두 군데 모두 입장료를 받으니 장비 관우야말로 머리 따로 몸 따로

중국 정부 입장료 수입에 적극 협조한 셈입니다.

죽어서도 나라 사랑은 가이 없네요.

 

우리는 여기서 장비를 만나보았습니다.

왜?

장비가 마지막으로 숨쉬던 곳이었으니까요.

이제 왜 랑중 고성에는 장원방이라는 패방을 만들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장원방이란 이 마을의 자랑을 하고 싶어 만든 패방이라네요.

명, 청 시절 이 마을에서 장원을 배출했다는데 이 마을 사람은 학문을 무척 숭상하며

먹물깨나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그리고 과거시험에 통과한 사람의 절반이 이곳 랑중 출신이라 하니

여기가 바로 쓰촨성의 8학군인가요?

 

랑중은 쓰촨성 동북부에 있으며 가릉강의 중류에 있는 도시로 옛날 모습이 완벽하게

보존되어있는 중국 4대 고도의 한 곳이라고 알려진 쓰촨성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고성입니다.

이미 주대에 촉한의 도성으로 당나라 때는 랑원선경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이렇게 랑중고성의 밤이 깊어지면 이제 우리는 다시 잠자리를 찾아 하루를 머문 후에

새로운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은 랑중에서 코~ 자고 내일 일찍 유비가 천하 삼분을 시작하려고

첫 발을 디딘 미엔양으로 가렵니다.

함께 미엔양으로 가시겠어요?

 

그곳에서 익주를 삼키기 위한 음흉한 모사를 하던 모습도 살펴보고 방통도 만나보고 싶습니다.

종친이라 순전히 말로만 겉으로 빼는 유비도 만나보고 말입니다.

제일 처음 유비가 유장을 돕겠다고 군사를 이끌고 이곳 서천으로 들어올 때 공명은

오지 않고 군사로 방통이 따라왔다고 했나요?

 

그런데 말이죠~

당시 유장의 군사는 전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이름뿐인 군대였지만, 유비를 따라온 군사는

그야말로 평생을 전쟁통에 굴러먹어 전투라 하면 오락하듯 밥도 거르며 즐겼다고 하였나요?

만약, 두 세력이 맞붙는다면 알라 손목 비틀기라고 하던걸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랑중이라는 고성은 물과 산이 아름답게 어우러저 풍수 귀지라고도 부르는 곳입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면 가릉강이 이렇게 랑중을 한바퀴 감싸 안아주며 돌아 나가는 마을이

랑중이며 따라서 대대로 역대 권력자들은 서남지구를 통치하기 위해

이곳을 군사적으로도 무척 소중하게 여겼다네요.

골목이 백여 개로 전통 사합원에서부터 남방 양식까지 두루 보존되어 있기에

파촉(巴蜀) 고대건축물의 보고라고도 하는 곳입니다.

 

고즈넉한 고성을 좋아하시는 분, 그리고 삼국지 기행을 하시려는 분에게는 무척 좋은 곳입니다.

랑중 고성은 여러분에게 한 번쯤 다녀오실만한 곳이라고 생각되어 적극 추천해 드립니다.

佳人은 개인적으로 무척 느낌이 좋았던 곳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