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고성의 고붕(考棚)

2013. 6. 21.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이제 여기 가맹관에 승상부를 설치하고 일했다는 비위의 경후사를 구경하고

다음 장소로 찾아갑니다.

그 일 때문에 이곳 주민은 촉한이라는 나라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길 겁니다.

지금은 비록, 작은 고성에 지나지 않지만, 그때는 촉한에서 두 번째로 큰 곳이었을 테니까요.

익주 다음가는 배도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곳은 그냥 골목길만 걸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고성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사진을 보니 길 가운데 정자를 올리고 가맹정이라고 이름 지었네요.

비록 소화고성으로 이름이 바꾼지 오래되었지만, 가맹이라는 이름이 이곳 사람들에게

자긍심으로 남아있나 봅니다.

 

 

여행이 뭐 별것인가요?

그냥 걸어가면 그게 여행이잖아요.

이런 길을 그냥 걸어가며 두리번거리면 그게 여행입니다.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고 시간 때문에 허둥지둥거릴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두리번거리다가 시간이 되면 버스 타고 숙소로 돌아가면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 여행 계획을 완벽하게 짠다고 시간 단위로 짜고 그 틀에

또 자신을 밀어 넣고 허둥지둥 다니지 마세요.

그러면 시간의 노예가 되어 재미가 적어집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보겠다는 계획은 자신을 시간의 노예로 만들 뿐입니다.

 

여행을 했다고 그곳을 모두 알 필요도 없습니다.

佳人처럼 모르면 그냥 지나치면 됩니다.

나중에 누가 시험친다고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여행이란 자신에게 봉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이기에 그 보상을 받기 위해 떠나는 일이 여행이 아니겠어요?

그런 보상의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전투하듯 다닌다면 그는 자신을 또 다른

스트레스 속으로 밀어넣는 우매한 일이 아니겠어요?

 

사실, 중국의 고성이라는 곳을 걸어보면 모두 장사하는 사람이 사는 평범한 길입니다.

다만, 그 길의 모습이 옛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옛날에도 마을 큰길은 장사하는 사람이 살았을 것이고 작은 골목길로 들어가면

그곳에 민초가 사는 집이 있었을 겁니다.

 

 

잠시 길을 걷다 보니 성황묘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성황묘란 옛날부터 이 고성에 사는 사람은 꼭 성황묘를 만들어야 했답니다.

왜?

이 성안에 살다 죽은 망자의 혼을 달래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니 마을 공동으로 조상신을 모시는 곳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따지고 핑계 댈 곳을 준비한 건가요?

 

 

이렇게 사람은 먼저 살았던 조상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예의를 다 했다는 말이겠네요.

이곳 소화고성의 성황묘는 당나라 때 제대로 만들었으며 청나라 때 강희, 건륭, 가경,

도광 연간에 걸쳐 수차례 보수했으며 문화혁명시기에 역시나 완벽히 파괴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만들었다 합니다.

 

그놈들은 조상 신도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역사란 잘못된 역사일지라도 우리의 역사이지 부정한다고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부정하기보다 당시의 아픈 사회상을 보듬어 주고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야만 또 다시 훗날 그런 슬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 테니까요.

 

 

이런 조상의 유산을 파괴한 신중국의 그 세력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요?

소화고성은 그 당시 암흑 세상이었다 합니다.

붉은 무리 때문에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유적이 모두 파괴되었다 하니까요.

 

 

소화고성 자체가 거의 완벽히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나라 사랑은 파괴란 말입니까?

이런 정신을 지닌 자들이 설마 지금의 중국을 이끌고 있는 세력은 아니겠죠?

역사란 흐름이 있지 그게 어디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졌나요?

잘된 역사든 잘못된 역사든 모두 우리의 역사고 그 판단은 후세에 맡기고

점차 좋은 방향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또다시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하마라는 글이 보입니다.

뭔마?

下馬 말입니다.

우리처럼 걸어온 사람이 말에서 내리고 말고가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佳人은 문무관도 아닌 단순무식한 여행자인걸요.

하마비가 있다면 틀림없이 중요한 장소가 아닐까요?

 

 

카오펑이라 부르는 고붕(考棚)이라는 곳입니다.

고붕은 시험장이랍니다.

들어가는 문 양쪽으로 보이는 붉은 글씨...

많이 본 모습이 아닙니까?

 

신중국이 태어나며 붉은 무리가 떼 지어 다니며 문화유산을 모조리 파괴할 때의 모습이 아닐까요?

선조의 유산에 저게 무슨 짓인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런 천박한 짓을 한 자들은 그게 천박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죠.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니 여기가 당시는 입신양명의 첫걸음인 셈이었습니다.

이 안으로 들어간다는 일은 큰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이었을 테니까요.

맞아요.

이곳 문턱을 넘는다는 일이 바로 큰 세상의 문턱을 넘는 일이었을 겁니다.

입신양명의 첫걸음이자 완성은 바로 여기서 이루어졌을 겁니다.

 

그리고 통과하든 못하든 일단 여기에 발을 디딘 사람은

벌써 출세의 문턱을 기웃거리는 사람일 겁니다.

덜수같은 佳人은 이곳에 와도 주인의 말이나 끌고 왔을 테니까요.

희망과 꿈이 열리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하는 곳...

바로 고붕입니다.

 

 

과거 유생들이 시험을 치르던 장소인 고붕(考棚)에서는 국가의 통치이념이자 입신양명의

수단이었던 유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위의 사진처럼 마치 감옥처럼 생긴 방이 기숙사였던 모양입니다.

저 방안에 틀어박혀 공자 왈 맹자 왈 하며 암기 위주로 지냈을 겁니다.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만 제외하고...

 

 

공부를 입신양명의 기회로 삼는 학동들이 저 안에 들어가 세월 가는지 모르고

기계처럼 외우기에 전념했을 겁니다.

청나라 때만 해도 이곳은 322칸에 달하던 시험방은 현재 12칸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네요.

322칸... 이 얼마나 대단한 숫자입니까?

이 방의 숫자가 바로 소화고성은 이 근방에서는 가장 중요한 마을이었다는 의미가 아니겠어요?

 

1970년대 중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 당시 반봉건 기치를 내건 붉은 무리가

여기도 모두 훼손했다고 합니다.

왜?

무식하니까 이런 곳부터 먼저 죽창 들고 덤볐을 겁니다.

있는 자, 배운 자, 잘난 자는 그들의 적이라 생각했을까요?

소화고성은 이런 사실을 당당하게 안내문에 적어두었으니 세상 정말 많이 변했나 봅니다.

佳人은 무식하고 가진 것도 없고 잘나지도 못하기에 이런 문제에 있어 무척 자유롭습니다.

 

 

내부가 궁금합니다.

마치 여행지에서 저렴한 숙소인 도미토리 룸을 보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당시 공부했던 공부방이 알고 싶습니다.

위의 사진입니다.

 

이런 곳에서 먹고 자며 공부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암기 위주의 공부 말입니다.

혹시나 하고 들여다보았지만 역시나였습니다.

 

 

이 지방의 꿈동이들이 여기에 모여 서로 실력을 겨루고 어느 사람은 인생 최고의 기쁨을 맛보지만,

또 다른 많은 자들은 삶에 있어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기도 했던 곳일 겁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실력을 시험하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요?

 

좌절이란 것도 공부한 사람이나 맛보는 일이지 덜수같은 佳人은 지금까지

좌절이라는 것을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생긴 대로 살아왔으니까요.

좌절없는 세상의 원하십니까?

그럼 덜수같은 佳人처럼 살아가면 됩니다.

목표가 없이 살았기에 이루고 싶은 게 없었고, 이룬 게 없으니 좌절도 성취감도 알 수 없습니다.

 

 

이곳은 소화고성 뿐 아니라 이 부근의 학동이 모여 공부하며 과거 시험을 치르던 장소라 합니다.

청나라 동치 연간에 세워진 고시장으로 오랜 기간 손보지 않아 많이 훼손되었다 합니다.

이곳에서 시험을 치고 우수한 성적을 올린 사람은 중앙무대로 진출해

다시 시험을 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여기는 향시 정도였을 테니까요.

그러면 여기서 1등하면 거인이 탄생하는가요?

擧人 말입니다.

 

 

여기는 과거전청이라고 하네요.

이 안에는 과거와 관련된 많은 자료가 있어야 할 겁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때 이곳에 보관했던 과거시험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역시 모두 사라졌다 합니다.

혹시 자료가 충분치 않아 핑계 대는 것은 아니겠죠?

 

 

이곳에서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은 또 모여 마지막에는 황제 앞에서 전시를 치르고

장원부터 줄 세우기를 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외우기만 잘하는 그런 시험 말입니다.

당시는 암기위주의 시험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문화대혁명 때 이 안에 보관된 유물과 자료는 몽땅 소실되고 말았겠지요.

시험을 치지도 못할 실력으로 살던 자들의 후안무치한 행동이

원래 이런 곳부터 부수려고 들었을 겁니다.

 

 

여기 佳人의 시험 답안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군요?

佳人이 장원급제할 때 쓴 답안지는 문화대혁명 때 사라지고 없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겠어요?

 

이곳에 전시된 답안지는 1598년 명나라 만력 25년 산동 청주부의 조병충이란 사람이

황제 앞에서 치른 전시에서 쓴 답안지입니다.

당시 나이 25세였으며 답안으로 쓴 글자수가 모두 2.460자라고 합니다.

제일갑 제일명이라는 말은 바로 황제 앞에서 치른 시험에서 장원급제했다는 의미일 겁니다.

당시 조병충은 천하를 얻은 그런 기분이었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천덕꾸러기 청년이었지만, 이때부터는 세상의 대우가 달라지지 않겠어요?

누구나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겠지만, 그 맛을 느낀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겁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전시물이 산동성 출신의 사람이 쓴 답안지네요.

여기 출신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유물을 몽땅 훼손했으면 이런 것조차 다른 곳에서 가져왔을까요?

과연 지금 그들이 살아있어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생각 할 능력이라도 있을까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역사는 또 이렇게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