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7. 08:00ㆍ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이제 공명의 무덤 앞에 섰습니다.
공연히 마음이 울적해지네요.
잠시 공명을 생각합니다.
삼국지를 읽을 때 얼마나 공명에 환호했는지 모릅니다.
공명이 결정하면 모두 옳았고 미래를 내다보는 투시력에 감탄하며
인생의 멘토로 삼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공명은 죽으며 유언으로 머리를 북으로 해 달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머리가 서쪽을 향하고
다리가 동쪽으로 향하게 했네요.
장안이 바로 서쪽에 있기에 벌떡 일어나면 바로 장안을 볼 수 있기 때문인가요?
북으로 머리를 두게 해달라고 한 것은 공명이 얼마나 북벌에 대한 염원이 컸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으로 죽은 후에도 위나라를 노려보며 말입니다.
이제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한승상제갈충무후지묘라...
한나라 승상이었음을 공명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겁니다.
위의 석비는 명대 만력 갑오년 가을인 9월에 세웠나 봅니다.
갑오년이면 1594년이네요.
섬서 안찰사 김릉조라는 사람이 세웠다는 말인가요?
중국에서는 김씨라는 성을 쓰는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텐데...
또한, 여기 정군산자락은 북벌을 꿈꾸며 선제 유비가 살았을 때 함께 베이스캠프를 차리기 위해
한중을 치려고 올라올 때 멋진 승리를 하며 조조가 한중을 포기하고 물러난 곳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부근에 있는 양평관은 촉한에서 또 장안에서 남북을 오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기에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거점이 되는 곳입니다.
이곳에 무덤을 만들어 달라는 의미는 지나다니는 사람 모두 살펴보겠는 의미일까요?
공명이시여!
왜 아직도 속세의 끈을 놓지 못하시니이까?
이제 모든 것을 놓아버리시고 편히 쉬세요.
천하의 공명이시여!
오늘 佳人이 공명의 무덤 앞에 술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아~ 그러나 주최 측의 준비소홀로 술이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그냥 말로만 술 한 잔 올리면 안 되겠습니까?
묘지 크기는 겨우 관 하나만 들어갈 정도로 소박하게 부탁했고 묻을 때 평소 입었던
옷으로 하고 절대로 무덤 안에 다른 것은 일체 넣지 말라고 유언했답니다.
무덤에는 기와도 올리지 말고 담도 쌓지 말라고 했고 일체의 재물도 놓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여기 지금의 면현의 정군산기슭입니다.
묘의 면적은 관우나 장비에 비교하면 너무 적게 봉분을 쌓았습니다.
뤄양의 관우묘는 몸도 없이 머리만 묻었는데 그 크기가 작은 산만 했고 랑중의 장비는
머리는 없고 몸만 묻었는데 무후묘보다도 수백 배나 더 큽니다.
무식한 놈이 가방 크면 공부 잘하는지 아는 가 봅니다.
오늘 모두 집합시켜야겠어요.
넘버 투가 이렇게 무덤을 만들었으면 넘버 쓰리나 포는 당연히 넘버 투의 크기보다 커서는
안 되는데 맨날 군령장 쓴다고 오만 떨던 자는 죽어서도 머리만 묻은 무덤이
공명의 무덤의 몇백 배는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공명은 죽어서도 무덤을 소박하고 작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한세상을 광풍과도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제갈공명은 여기에 잠들었습니다.
죽음보다도 더 깊은 잠 말입니다.
하늘 우러러 천기를 읽었고 천 리 밖의 일도 예측했으며 미래의 모습을 언제나 그려냈습니다.
그의 결정은 늘 옳았고 모든 사람이 칭송했습니다.
하늘의 이치를 따랐으며 역행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공명만큼 깨끗한 사람도 드물잖아요.
그렇기에 중국의 여러 정권에서 공명을 왕으로 봉한다고 했나요?
공명을 칭송해 중국의 여러 왕조가 시호를 내렸나 봅니다.
죽은 후 아무리 많이 내리면 뭐합니까?
관우는 제왕도 모자라 신이라는데...
여기 한중은 바로 남정의 요충지로써 예전에 법정과 황충장군이
위나라 하후연으로부터 빼앗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충지나 다름없는 지역입니다.
북쪽을 노려보게 해달라....
여기 보증서도 있네요.
위의 비석은 한승상제갈충무후의 진짜 묘라고 진묘라는 글이 보입니다.
자꾸 의심하면 빠떼루 준다는 말입니다.
천하의 모든 묘는 사당이지만, 여기가 유일한 무덤이라는 보증서입니다.
정말 공명은 북벌한다며 오르내렸던 길을 보니 정말 개처럼 또는 말처럼 달렸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견마지로를 다하며 평생을 달리다 보니 과로사했나 봅니다.
한중이라는 곳에서 중원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북쪽이나 동쪽으로 나가야 하는데 저기가 정말 험한
산길로 진령산맥을 다섯 차례나 넘어다녔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우리 부부는 버스 타고 한 번만 넘어왔는데도 녹초가 되었는데 공명은 모두 네 번 왕복에
마지막 오장원은 편도 행을 했고 마지막 돌아오는 길은 죽어서 시신이 돌아왔지요.
그래서 옛날부터 서천이라는 지방은 중원에서도 버림받은 곳이었지요.
조조도 계륵이라 했고 이백도 촉도난이라는 시에서 저 길로 가는 것은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다고 했잖아요.
여기에 무덤을 만든 이유는 공명이 주군으로 모신 유비의 유지를 자기 힘으로 다하지 못하고
죽은 원통함의 표현이 아니겠어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과 유업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에 고향 땅에 돌아가지도 못했습니다.
살아생전 사심 없이 유비만을 생각하고 평생을 살다 저세상으로 갔지만,
죽어서도 주군만을 생각하며 잠들어 있네요.
정말 이런 사람 흔치 않습니다.
이런 사람 곁에 하나 있다면, 천하에 부러울 게 없겠습니다.
네 곁에 공명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난...
누구의 공명이 될 수 있을까요?
나 죽었다 울지마라
슬프다고 내 무덤 앞에서는 눈물도 보이지 말라.
우리의 삶이 이렇듯
살았다는 게 마치 아침 안개 같구나
안개란 홀연히 세상에 왔다가
때가 되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마누나.
어디 손으로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그 모습이 영원하단 말인가...
아! 세상의 부귀영화여.
무엇이 꿈과 같은 허상이고 또 어떤 것이 또렷이 볼 수 있는 진실이란 말인가?
모두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
꿈꾸듯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구나.
천하의 공명이시여~
모두 잊고 이제 편히 눈감으소서
그때 품었던 소망도, 마음 아파하며 밤을 새워 뒤척였던 어떤 원한도
흐르는 물 위에 흘려보내고 떠도는 구름 속에 실려 보내세요.
佳人 이제 공명의 무덤 앞에
술 한 잔 못 올리고 돌아서야만 합니다.
왜?
佳人이 술을 먹지 못하기에 술을 가지고 다니지 않기 때문이지요.
정군산은 공명에는 무척 마음에 남는 곳이었나 봅니다.
그러니 마음의 고향 같은 곳 말입니다.
지금의 봉분 옆으로는 황과수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황과수 나무는 공명의 부인인 황 부인이라 하며 이승에서 생전 못다 한 사랑을 저승에서
마음껏 하기 위해 이렇게 누가 심어놓지도 않았지만, 무덤 가까이 지키며 자라고 있다 합니다.
공명이 이곳을 영혼의 안식처로 생각한 이유는 북벌에 대한 생각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북벌을 시작하며 처음 촉한이 이 지역을 차지한 것은 한중이 군사요충지라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방이 이곳 한중에서 한중왕이 되며 천하대업의 기틀을 다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곳에 군사를 두고 훈련하며 바로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으로 생각했기에
이곳을 안식처로 결정했나 봅니다.
그때 정군산 전투에서 촉한의 노장 황충과 위나라 최고의 장수 하후연이 여기 정군산에서
겨루었고 황충이 하후연을 멋지게 베어버려 북벌에 대한 꿈을 키웠던 곳이지요.
이제 오호상장이라는 장수도 유비도 모두 먼저 떠나고 마지막 혼자 남아 그들이 꾸었던 꿈을
실현해주려고 마지막까지 공명은 불철주야 노력했지만, 하늘이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제갈량이 54살에 죽었다고 여기에 심은 측백나무도 54그루랍니다.
그 중 아직도 22그루가 살아남았다 하니 믿어야 하나 믿지 말아야 하나...
위의 사진에 보이는 나무가 2010년에 1700년이 되었다고 하니 지금은 몇 년이나 되었을까요?
근처에 있는 공명의 사당 무후사는 시간 때문에 가보지 못했지만,
그곳 사당은 공명이 죽은 후 황제가 유일하게 조서를 내려 만든 곳이라 합니다.
그러기에 그곳 무후사를 그런 의미로 "천하제일 무후사"라고 부른다 합니다.
물론 청두에 있는 무후사가 여기보다 크고 화려하지만, 그곳보다 이곳 면현의 무후사가
50여 년 먼저 지어졌다고 하니 누가 감히 시비를 걸겠어요.
안에 안치한 공명의 동상도 명나라 때 만든 것이라 하니 이미 7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기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합니다.
무후묘의 사당도 내부 사진을 찍지 못하게 사당 안은 사람이 지키고 있어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젠장...
공명은 살아서는 무향후, 죽은 후 황제가 내린 시호는 충무후이기에 무후사라고 부른다 하네요.
세상에 중국에만 무후사가 2천 개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원조는 여기가 아닐까요?
옆으로 흐르는 강이 한강이라 하니 정군산과 한강이 바라보이는 이곳이 공명에는
무척 마음의 안식을 주었던 곳으로 생각됩니다.
이곳에서 머무르며 북벌의 방법을 계획했고 군사의 조련을 했을 게 아니겠어요?
가만히 눈을 감고 그때로 돌아가 봅니다.
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으세요?
고함소리와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고요.
기문둔갑의 귀재였던 공명의 진법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거문고를 즐겨 탄 공명의 연주도 들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요?
물론 들리고 보이면 佳人처럼 이상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겁니다.
노장 황충은 한중 정군산에서 조조의 장수 하후연을 단칼에 베고,
조자룡은 조조군을 격파해 유비가 한중을 차지하는 데 커다란 공을 세웠습니다.
여기에서 언제나 북쪽을 바라보며 생전 못다 이룬 꿈 하나, 천하를 통일하려던 그 꿈...
비록 이루지 못한 꿈이지만, 그런 꿈 하나 지니고 평생을 살다 여기에 잠들었습니다.
여기 공명이 안식을 취하고 있는 면현이라는 도시는 우리나라 사람은 많이 찾는 곳이 아닙니다.
워낙 멀리 떨어진 시골이고 교통편도 그리 쉽지 않습니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찾아봐야 하는 곳이지만....
공연히 佳人도 공명의 무덤 앞에 서니 마음이 심란합니다.
혹시 佳人이 공명을 사랑해서일까요?
이런 사람 한 분 사랑하는 게 죄는 되지 않겠지요?
공명의 무덤을 돌아보며 나오려니까 자꾸 눈길이 머물러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겠어요.
아! 佳人은 다정도 하여라~~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신은 본디 미천한 백성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 갈던 사람으로
난세에 생명이나 보전할 뿐 제 이름이 제후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는데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선제께선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아니하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굽히시고
세 번이나 신의 초려를 찾으시어 신에게 당시의 세상사를 하문하셨습니다.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이에 감격하여 신은 선제께 견마의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출사표에 나온 글을 몇 자 옮겨 적어 보았습니다.
결국, 출사표에 있는 그대로 공명은 삼고초려의 감동을 잊지 않고 개나 말처럼 평생을 달리다
오장원의 별이 되어 여기에 잠들었습니다
견마지로...
정말 하지 맙시다.
죽고 나면 너무 허망합니다.
佳人도 미천한 사람으로 살다가 27에 세상에 발을 디뎠고 평생을 가족을 위해 견마지로를 하며
살다가 이제부터 개인의 뜻을 펼치기 위해 지금은 백수가 되어 집안에서
여행기나 쓰며 지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佳人을 미천하다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손수 佳人의 방을 방문해 주시었습니다.
계속 응원해주시면, 이에 감격하여 이번 여행기를 마지막까지 견마지로를 다하여 쓰려고 합니다.
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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