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28. 08:00ㆍ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서안은 우리 부부가 6년 전 처음 중국여행을 왔을 때 중국 땅에서는 제일 먼저 발을 디딘 곳이라
쉽게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때 대자은사, 병마용, 화청지, 비림, 대당부용원, 진시황릉 등 몇 곳을 다녀왔으며
그때의 사진을 재활용하여 보면서 이야기할까 합니다.
그러니 이번 여행에 보고 찍은 사진이 아니라 옛날 사진을 보며 그때 보고 느꼈던
묵은 장맛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佳人 생각에는 오래 묵히면 발효가 된다고 생각하고 글을 올리지만,
읽는 분 처지에서는 발효가 아니고 부패한 이야기라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발효나 부패나 무엇을 어떻게 묵혔느냐의 문제가 아닐까요?
그럼 이번에 서안에 다시 왔는데 유명 관광지에 안 들어가느냐고요?
예! 맞습니다.
입장료가 겁나서 안 들어가렵니다.
그러니 쉽게 말하면 그때 사진을 재활용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오늘 창고 문을 열어 그때 쌓아두었던 먼지가 뽀얀 사진을 하나씩 털어가며 구경하려고 합니다.
한 고조 유방이 천하 주유를 하며 한 노인을 만나 이곳의 이름을 부탁하자 오래도록 편안해지라는 의미인
長安을 이야기하니 그 말이 좋을 듯하여 장안이라고 이름 지었다네요.
이렇게 지내며 전한의 도읍으로 오래도록 편안하게 지내다 왕망의 난으로 하향길로 접어들었다 합니다.
끝내는 기원후 23년 후한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봐야 하겠네요.
그러나 이번 우리 부부의 여행에서의 시안은 다른 의미입니다.
이번 여행이 주로 삼국지와 관련하여 구경하다 보니 서안이라는 도시는 무척 마음 쓰이는 도시네요.
유비는 물론 제갈공명이 그토록 염원했던 천하 통일의 1차 목표가 바로 장락궁 함락이 아니겠어요?
유비가 죽자 공명이 그 멋진 출사표를 던지고 북벌 길에 나선 목표가 바로 여기가 맞을 겁니다.
그러나 재간둥이 공명도 결국, 이곳 서안은 밟아보지 못하고 바로 여기서 멀지 않은 오장원이라는 언덕 위에서
숨을 거두며 촉한의 꿈은 사라지고 맙니다.
공명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한중 면현에 있는 정군산자락에 무덤을 간소하게 만들라 하고
자신의 머리를 북쪽으로 두라 유언했을까요?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요?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지요.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의미라 합니다.
공명이 여우는 아니기에 태어난 곳보다는 한이 맺힌 곳을 향해 머리를 두었답니다.
이번 여행에 정군산도 들리고 공명의 무덤도 돌아볼 생각입니다.
공명이여~
슬퍼하지 마시라.
눈물도 보이지 마시라.
공연히 서안에 오니 공명 생각이 납니다.
그토록 서안을 밟아보기를 염원했던 공명이 아니겠어요?
결국, 이곳은 공명에는 한 맺힌 땅이요, 꿈에나 그리던 도시였습니다.
오늘은 먼저 대자은사나 살펴보렵니다.
대자은사라기 보다 대안탑으로 더 널리 알려진 곳이죠.
이 절은 당 고종이 그의 어머니 문덕황후를 위해 640년에 세운 절이라 합니다.
세상에 부모를 위해 자기의 효심을 보이려고 이렇게 사찰을 지어 봉헌하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지요.
그런 사람이야 그냥 말만 하면 모든 게 저절로 이루어지니 뭐가 아쉽겠어요.
佳人은 자식이 부모에게 여행이나 다녀오시라고 주머니에 돈이나 넣어주었으면 좋겠어요.
죽고 난 후 효도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대안탑이 대자은사의 대표선수인 셈입니다.
인도양식으로 지어 각 층에 사방으로 창을 내고 안으로는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아서 올라가게 만들어졌답니다.
남문 입구 좌우에 있는 불단에는 제술량이라는 사람이 직접 쓴 大唐三藏聖敎書와 大唐三藏聖敎序記가
적힌 비석이 있습니다.
대안탑은 높이 64m의 7층 전탑이랍니다.
이 탑의 목적은 경장, 율장, 논장에 정통한다고 하여 삼장이라고 부르는 현장법사가 645년 인도에서부터
짊어지고 가져온 1.335권의 불경을 번역하고 보관하기 위해 652년에 지었다고 하네요.
무척 힘든 일이지만, 부처의 힘으로 여기까지 지고 왔을 겁니다.
현장법사라 하면 서유기라는 이야기에 손오공, 저팔계 그리고 사오정과 함께 천축국에서 돌아오며
생긴 이야기에도 출연했지요?
지금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네요.
중국 여행이 주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우리 삶 속에 끈적일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있어
때로는 공감하고 또 즐겁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대안탑(大雁塔)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는 현장법사가 불경을 짊어지고 돌아오던 중 심한 허기와 갈증으로 사경을
헤맬 때 큰 기러기가 자기의 피와 살을 내어주어 고비를 넘기고 무사히 불경을 가지고 돌아오게 되었답니다.
정말 신통방통한 일이 아니겠어요?
중국산 기러기는 가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왕소군의 거문고 소리에 날아가다 떨어지지 않나...
기러기가 사람의 마음을 읽고 날아가다 갑자기 떨어져 자신을 희생했다는 이야기는 인간보다도 훌륭하다는
생각이지만... 중국 기러기는 중국 사람보다 더 친인간적이고 대단한 두뇌를 지녔나 봅니다.
앞으로 새대가리라는 말을 한다는 일은 중국 기러기를 비하하는 나쁜 말이 되겠네요.
그래도 아무래도 믿음이 가지않는 말이 아닙니까?
현장은 이 기러기를 기리기 위해 탑을 짓고 그 이름을 대안탑과 소안탑으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네요.
현장법사가 다녀온 루트를 표기해 놓았네요.
현장법사는 승려일 뿐 아니라 자유배낭 여행가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자신이 천축을 다녀오며 겪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를 정리하여 "대당서역기"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태종에게 진상하였다 합니다.
이 책은 중국에서는 당시 알지 못했던 인도인 천축과 서역이라고 부르는 중앙아시아의 풍습이나 실정을 아는데
아주 중요한 정보의 역할도 했다 합니다.
이 책은 천여 년이 지난 먼 후일 명나라 때 서유기라는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다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그곳이 얼마나 먼 길입니까?
부처의 힘이 아니었다면 천축과 서역이라는 먼 곳까지 다녀올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종교의 힘만이 아니라 현장이야 말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이 대단했던 사람이었나 봅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열정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물론, 중국 기러기의 열정 또한 우리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대단한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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