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10. 08:00ㆍ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2012년 11월 8일 여행 21일째
어제 검문관을 들렀다 취운랑이라는 길을 걸어보려 했지만, 늦은 것 같아 포기했습니다.
취운랑은 아주 오래전에 심었다고 하는 측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 합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삼국지에 등장한 장비도 심었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언제 장비가 그곳까지 가 한가하게 나무를 심었을까요?
혹시 검문관을 가실 계획이시면 좀 더 일찍 출발하셔서 검문관을 보시고
취운랑까지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취운랑은 검문관에서 조금 더 들어간다 합니다.
오늘은 아침 일찍 출발해 명월협이라는 잔도를 걸어보려 합니다.
그다음 오후에는 옛 이름 가맹관이었던 소화고성도 보려고 합니다.
일찍 서두르면 이게 딱 하루 코스가 되더군요.
그래야 내일 일찍 랑중으로 출발해 랑중고성과 장비도 만나야 하니까요.
원래 광위엔에서 2박을 계획했지만, 3박을 해야지 여기까지 볼 것 같네요.
혹시 광위엔에 가시려면 주변의 구경거리를 생각하시고 숙박일수를 정하셔야 하겠네요.
우리 부부처럼 소요시간을 모르고 오시면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명월협으로 가는 버스 터미널은 광위엔 베이먼(北門) 치처짠 입니다.
여기에서 출발하는 조천(朝天)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됩니다.
아마도 이곳은 광위엔 북쪽의 작은 마을로만 가는 버스만 서는 곳인가 봅니다.
명월협은 광위엔의 북동쪽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표를 끊으려 하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같은 가격에
지금 출발하는 빠오처를 타라고 하는데 공교와 같은 10원/1인이고
공교 버스는 사람이 차지 않아 언제 떠날지 모른다 합니다.
중국 여행을 할 때 이런 경험이 많습니다.
당황하실 일이 아니라 차근히 생각하시면 쉽게 해결됩니다.
그 사람 옆에는 중국 관광객이 이미 삐끼에게 걸려 함께 있어
우리보고 같이 타고 가자고 합니다.
차는 터미널 입구 건너편 골목에 세워두었습니다.
혹시 광위엔 북문 터미널에서 조천행 버스를 타실 분은 우리처럼 명월협으로
바로 가는 버스를 타시는 게 유리합니다.
조천행 버스는 명월협 경구로 가지 않고 조천 시내로 바로 들어가기에
조천 시내에서 다른 교통편을 이용해 다시 와야 합니다.
다만, 이게 정식 허가받고 운행하는 버스가 아니라는 점이 께름칙합니다.
선택은 여러분이 직접 하셔야 합니다.
요금도 같고 빨리 간다면 오히려 이 차를 타고 가는 게 낫겠다 싶어 타기로 합니다.
버스는 어제 검문관과는 반대방향인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30분 정도 달리더니 조천이라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잠시 좁을 길로 들어가더니 입구에 내리라 하는데 여기가 바로
명월협 후문인 남문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곳으로 오는 게 훨씬 가깝고 편리합니다.
경구 북문에서 조천 버스 터미널까지는 약 2km나 떨어져 있어
택시나 다른 교통편을 이용해 와야 하겠네요.
조천행 공교 버스는 명월협 입구까지 오지 않고 조천 읍내로 바로 들어가기에
나중에 걸어보니 경구까지는 제법 먼 곳이더군요.
다음에 혹시 명월협을 버스를 이용하여 가시려면 공교차를 타지 마시고
우리처럼 빠오쳐로 가시면 바로 남쪽 경구 입구에서 내리실 수 있겠네요.
경구 입구는 남과 북에 하나씩 있습니다.
명월협은 위의 사진처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가릉강을 따라 생긴 협곡을
말하는데 경구라는 게 협곡을 따라 만든 잔도를 걷는 일입니다.
북에서 남으로 걷던 남에서 북으로 걷던 요금은 같을 겁니다.
시간이 넉넉하시면 왕복해도 모를 겁니다.
가릉강은 서천에서 중원으로 넘어가는 진령산맥에서 발원해 남으로 흐르는
강으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장강삼협 크루즈 투어를 시작하는 충칭의
조천문에서 장강과 합류하는 길이가 1천 km가 넘는 아주 긴 강입니다.
중간에 광위엔도 지나고 장비 마을이라는 랑중으로도 흘러 장강과 합류하지요.
나중에 우리가 구경할 장비가 다스렸던 마을 랑중이라는 고성을
멋지게 휘감아 흐르더군요.
그 모습이 마치 우리나라 하회마을처럼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팔괘의 모습이라고 할까요?
명월협은 가릉강이 조천이라는 지역을 지나며 협곡 사이로 흐르기 때문에
옛날부터 중원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 때 이 지역의 협곡이 암벽으로 되었기에
길을 내는 일이 어려웠나 봅니다.
그래서 이곳만 석벽을 따라 잔도를 수 km를 만들어 다니게 하고
그 이름을 명월협이라 이름 지었다 합니다.
명월협 경구 입구에 도착시각이 8시 30분입니다.
입장요금은 80원으로 반표는 40원을 받습니다.
중국에서는 이 정도의 입장료는 무척 착한 입장료지만,
그게 볼 게 그리 많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잖아요.
우리 부부는 이런 길을 걷기를 좋아하기에 오히려 더 좋아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우선 박물관부터 먼저 구경합니다.
박물관은 남문 안으로 들어오면 광장 왼쪽 끝에 있습니다.
여기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라 사진을 아주 자세하게 찍어 보여 드리려 합니다.
가지 않으셔도 마치 다녀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을 모두 담아왔습니다.
게다가 길을 걷다가 돌아서서 뒤에 보이는 풍경까지 담았거든요.
박물관은 문표를 끊었으니 당연히 무료입니다.
삼국지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검문촉도의 역참입니다.
성도에서 한중까지 오르내리며 말을 갈아타면서 소식을 전했을 겁니다.
공명은 북벌을 감행하며 전투상황을 수시로 후주 유선에 알렸을 것이고
유선은 격려의 말을 다시 보냈겠지요.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겠지만, 청두에서 한중까지 정말 많은 역참이 있었네요.
이 역참을 잇는 도로가 아마도 가장 쉽게 오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을 겁니다.
이번에는 검문촉도 관문을 표시했네요.
면죽관서부터 양평관까지 입니다.
어제 보았던 검문관도 보이고 나중에 갈 백마관도 보이네요.
백마관은 봉추 방통이 죽은 낙봉파라는 곳에 있는 관문입니다.
명월협 잔도와 이 부근의 검문촉도와 관련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겨놓았습니다.
위의 사진은 한나라 승상 소하와 관계된 이야기로 족병족식공쟁전(足兵足食供爭戰)의
일환으로 잔도 건설을 독려하는 모습으로 기원전 206년 유방이 항우에 의해 한중왕으로
봉해지고 촉을 다스릴 때 소하는 여기 명월협의 잔도를 대대적으로 보수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장량(張良)처럼 교묘한 책략을 쓸 줄 모른다.
소하(蕭何)처럼 행정을 잘 살피고 군량을 제때 보급할 줄도 모른다.
그렇다고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에서 이기는 일을 잘하느냐 하면, 한신(韓信)을 따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세 사람을 제대로 기용할 줄 안다.
반면 항우(項羽)는 단 한 사람, 범증(范增)조차 제대로 기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천하를 얻었고 항우는 개털이 되었다."
유방이 항우를 개털로 만든 후 천하를 얻으며 했던 말이라 합니다.
여러분!
佳人도 이제 희망이 있습니다.
능력은 쥐뿔도 없지만, 유방처럼 넉넉한 가슴만 지니면 된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천하는 잡지 못하더라도 집안 정도는 제대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오잉?
이 말은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닌가요?
이번에는 여인입니다.
광위엔이 배출한 슈퍼스타...
갑 중의 갑인 여인...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인 여걸 무측천입니다.
당시가 봉건시대라는 것을 고려하면 대단한 일을 한 여인이지요.
위항치촉(韦抗治蜀)이라는 그림입니다.
당나라 때의 위항이 촉을 다스렸다는 이야기로 검남도 안찰사와 익주 대도독부
장사를 지낸 인물로 잔도 보수와 광위엔 시내의 가릉강변에 있는 천불애라는
석불조성을 감독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멋진 풍광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천불애는 광위엔 시내를 흐르는 가릉강변의 석벽에 수많은 불상을 새겨 놓은 곳입니다.
이번에는 유명한 서법가인 안진경이 보입니다.
당 현종 개원 연간에 진사에 합격한 이후 태자 교육을 맡은 태사였을 겁니다.
노군공에 봉해졌기에 안노공이라고도 불렸나 봅니다.
촉의 이주자사로 일했을 때도 건학육재(建學育才)에 헌신하였기에
광원현지(廣元縣志)에 명신으로 기록되었다 합니다.
남송 시기에는 국가적으로 잔교를 관리했다고 합니다.
교각관(橋閣官)을 관청에 두고 다리나 누각만 전문적으로 관리하도록 해
잔도 건설과 보수공사, 관리 등을 했다네요.
지금도 청풍협 절벽에 다리를 개수한 후 교각관 이름을 석각으로 새겨놓았다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시공자 표시제라고 봐야 합니까?
이들은 이때부터 공사나 관리감독의 의무를 단단히 하도록 했네요.
검주지사 이벽은 재임 기간에 취운랑에 나무 심기를 공들여 했던 모양입니다.
청나라 강희 때 검주지사 교발(乔钵)이 촉도고백을 취운랑이라 이름 지었다 하네요.
검주 남에서 랑중까지 삼백여 리나 되는 긴 길에 십만 그루나 되는 나무를
심었다 하니 이게 측백나무 만리장성이라 해도 되겠어요.
옛날 장비도 취운랑에 나무를 심었다 하니 그 나무 길은
대단한 풍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여행 중 취운랑을 구경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내일은 잔도를 걸어야 하겠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취운랑에 장비도 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는 직접 그곳에 들리지 못했지만, 아주 오래된 나무도 많다고 합니다.
나무를 심는다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잖아요.
우리 어린 시절은 전쟁과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했기에 산이 헐벗어 모든 산이
민둥산이었으나 지금 우리나라의 산을 보면 가장 성공적인 일이 산에 나무를 심어
푸른 한국을 만든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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