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선사동과 마애삼불 그리고 만불동.

2012. 6. 11. 08:00중국 여행기/하남성(河南省)

물론, 오랜 세월을 지나며 이곳 용문 석굴은 많이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감실(龕室)만도 2.345개, 제기(題記)와 비석은 3.600여 점에

달하고 불탑이 50여 기이며 조상(造像)은 10만여 점에 이른다 합니다.

암벽을 따라 마치 벌집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석굴 전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그러나 겁이라는 세월이 흐르면 천상의 선녀가 샤방샤방 돌아다니며 그 치맛자락에

이곳 석굴도 또한 티끌이 되지 않겠어요?

세상이 모두 티끌로 변해 아무것도 없는 곳이 되면 새로운 세상이 또 생겨날 겁니다.

 

서쪽의 용문산 기슭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강을 따라 내려갑니다. 

왼쪽인 동쪽으로는 향산이라는 산이 있어 요새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곳을 돌아보는 방법은 무척 단순하군요?

그냥 강을 따라 내려가며 오른쪽의 용문산 벽에 만든 석굴을 보며 내려가다 끝에서

강을 건너 동쪽에 있는 석굴과 향산사라는 절을 보고 마지막으로 백거이 무덤인

백원으로 본 후에 다시 원래 출발한 곳으로 오면 됩니다.

이런 곳이기에 가이드도 필요 없고 그냥 천천히 구경하면 되네요.

 

참 대단한 모습입니다.

석굴 앞에는 많은 곳에는 위의 사진처럼 역사가 폼 잡고 눈을 부라리며

손에 야구 방망이처럼 생긴 것을 들고 있네요.

가끔 배를 들어내고 은근히 복근 자랑도 하더군요.

그러면 佳人도 내 배를 슬쩍 내려다봅니다.

우쒸! 그리고 빙긋 웃고 맙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나 여자나...

왜 노출 증후군에 걸려 야단입니까?

 

여기에 석굴을 만들 때 처음에는 산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정으로 석벽을 쪼아가며 만들지 않았을까요?

단단한 돌을 장비도 변변치 않았을 텐데 절벽에 밧줄 하나에 대롱대롱 매달려

굴을 파고 그 안에 석불을 만들었을 겁니다.

누기 시켜서 한 일이라면 포기했을 겁니다.

이 모습은 부처의 힘이고 불심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대역사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이제부터 차근차근 살펴보며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렵니다.

적당히 보고 가려다가 깎아주지 않았기에 본전 생각이 나서 더 자세히 보렵니다.

 

그런데 왜 역사는 자세를 하나같이 허리를 과도하게 옆으로 뺐지요?

그게 역사의 기본자세입니까?

무슨 지들이 껌이나 짝짝 씹으며 건들거리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주 건방기가 자르르 흐르네요.

주먹도 하나는 위로 올리고 금방이라도 시비 걸며 싸우려 들려고 합니다.

풋~ 맨발의 청춘이라고 신도 신지 않았어요.

가만히 보면 우리의 전통무술이라는 택견의 동작과 비슷하지 않나요?

 

그 크기 또한 큰 것은 10여 m가 넘는 것으로부터 2-3cm의 손톱 크기까지

아주 다양한 크기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모양 또한 각각의 다른 표정과 모습으로 아주 세밀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일 초입에 있는 석굴은 지붕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당나라 때 조성했다는 잠계사라고 하네요.

나머지는 지붕조차 남아있지 않을 뿐 아니라 아예 보수하지도 않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좌불로 부처상이 있고 그 주변으로 많은 석불이 있습니다.

 

어떤 곳은 굴을 파고 들어간 석굴 형태로 만들어 내부에 석불을 만들었고 또 다른 곳은

벽을 깊게 파낸 형식인 감실 형태의 방을 만들고 석불을 조각하였습니다.

위의 사진은 석불 뒤로 벽에다 양쪽으로 연꽃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부처를 만들어 올려놓았습니다.

성불하면 누구나 이렇게 몸이 가벼워 연꽃 위에도 쉽게 올라가 앉을 수 있겠죠?

그러나 구도자라고 모두 이렇게 연꽃 위에 올라갈 수는 없을 겁니다.

룸살롱을 좋아하면 룸살롱 방석 위에 가볍게 올라가지 않겠어요?

 

보살의 모습도 화려합니다.

치맛자락의 흐르는 저 고운 선을 보세요.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은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비록 고깔은 아니지만, 옷이 잠자리 날개 같지 않나요?

저런 옷차림을 보면 왜 佳人은 가슴이 두근거립니까?

이거 多情이라는 병이죠? 그쵸?

 

중간에 막아놓은 곳도 있습니다.

이름이 경선사라고 하네요.

이렇게 막아놓으면 보라는 말입니까?

그냥 지나가라는 말입니까.

그렇군요?

"네 마음대로 하세요."네요.

 

그 옆에는 마애 삼불이 거의 노출된 곳에 있습니다.

3 존의 좌불과 그 사이로 4 존의 입불로 이루어졌네요.

누구는 앉아 지내고 누구는 서 있어야 하네요. 

처음 조성할 당시에는 지붕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부서지고

위에는 임시로 지붕을 만들어 놓았는데 마애 삼불은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내는 부처를

모신 곳이라 하여 불리는 이름이라는군요.

 

가운데에는 주불로 미륵불을 모셨습니다.

원래 3세 불을 조성할 때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모시는 게 일반적인 관례라는데

여기는 그런 관례를 과감히 탈피하여 미래불인 미륵불을 가운데 모셨습니다.

이곳 용문석굴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런 예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측천무후 때 만든 것이라 합니다.

무측천은 자신을 미륵이라 여겼고 석가모니의 화신인 자신이 서방인 이 씨가 만든

당나라의 왕권을 차지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논리를 폈으며 그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미륵신앙을 장려하기 위해 이렇게 배치하지 않았을까요?

 

그녀는 자신이 황위에 있을 때 만든 마애삼불감은 미륵불을 가운데 두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죽은 후 아무도 그녀가 생각한 미륵신앙을 믿지 않았기에

여기의 마애삼불감은 완성되지 못했다네요.

이렇게 미륵불도 인간의 권력에 따라 하루아침에 미완성인가 봅니다.

 

사실 아래는 만들다 만 미완성 상태라 합니다.

오히려 이런 반제품이 당시의 조각 순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어디 인생만 미완성인가요?

미륵불도 미완성입니다.

 

그곳을 지나면 만불동과 연화동이 나옵니다.

만불동은 당나라 고종과 무측천의 만수무강과 죽은 다음 극락정토 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했다고 합니다.

그래 무측천은 만수무강했나요?

그 당시 나이로는 무척 오래 살았으니 이 만불동의 효험을 톡톡히 보았나 봅니다.

너무 나쁜 짓을 많이 하였기에 욕을 많이 먹어 오래 살았는지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네요.

 

벽에 새겨진 불상이 만 개라 하여 만불동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두 15.000여 개나 된다고 하니 이름을 잘못 지었네요.

바깥으로는 사천왕이 지키고 있습니다.

앞뒤 두 개의 방으로 되어있고 앞에는 두 역사와 사자 두 마리가 양쪽에 지키고 있으며

후실에는 불상 하나와 두 제자, 그리고 두 보살상, 두 천왕상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런 불상의 조합으로 보았을 때 여기는 용문석굴에서도

가장 완벽한 곳이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천장은 붉게 칠한 연꽃이 있고 주변으로 글자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 둘레에는 대당영륭원년11월30일성, 대감요신표, 내도장지운선사 일만오천존상일감

(大唐永隆元年 十一月三十日成, 大監姚神表, 內道場智運禪師, 一萬五千尊像一龕) 등을

새긴 글이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궁중의 2품 여관인 대감 요신표와 궁궐 안에서 불도를 닦던 내도량

니고지운선사의 관리로 680년 11월 30일에 1만 5 천존의 감실을 완성했다는 의미라 합니다.

 

그러니 석굴 안에는 당나라 고종과 무측천, 태자, 제왕들을 공경하여

불상 15.000 존을 새겼다고 기록되었다 합니다.

그런데 왜 만불동입니까?

좌우 벽으로는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게 작은 석불이 새겨져 있습니다.

중국은 부처도 인해전술로 나오나 봅니다.

 

가운데 주불인 아미타불이 있고 2층으로 된 연화좌대에 앉아있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아주 후덕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가사에 새겨 넣은 무늬는 혼원도(渾圓刀)라고 하는 둥근 칼로 깎은 것이라네요.

아미타불은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는 것은 장풍을 날리려는 게 아니라 오른손을 들어

무외인(無畏印)의 자세를 취한 모습으로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고 가장 존귀하다는 의미라 하네요.

 

그 옆으로는 청명사가 있고 탑이 기둥에 새겨져 있습니다.

무엇을 간구하여 이리도 많은 불상을 만들었을까요?

많은 부처를 만든다고 믿음이 강해진다면 佳人은 가방만 큰 거 들고 다니고 싶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방만 크다고 공부 잘한다고 굳게 믿었습니까?

배낭 큰 거 매고 다니면 배낭여행 잘합니까?

하나의 불상을 더 만들고 한 번의 절을 더 하기보다 탐욕 한 덩어리 더 던져버리고

선업 하나를 쌓는 게 득도의 길이 아니었나요?

 

천장을 올려다보면 아직 채색이 남아있고 연꽃 문양의 화려하고 아름다움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가만히 바라보면 저절로 성불되는 듯합니다.

오욕과 칠정도 모두 떨쳐버릴 것 같습니다.

깨달음이란 멀고 오랜 시간 노력해서 얻어지는 게 아닌가 봅니다.

 

부처가 어디 석굴 속에만 있겠어요?

내 마음속에도 있고 룸살롱에도 있다잖아요.

세상 사람 모두가 내게 깨달음을 일깨우면 모두가 부처 아니겠어요?

뭐 수도하는 사람이 고깃집에 가서 메뉴판도 못 봅니까?

그냥 고기는 메뉴만 보고 상추만 먹고 나온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미 성불하였기에 더는 수도생활을 하지 말고 하산해야 합니다.

 

부처도 인해전술이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석불을 만들어 후세 이곳을 찾아온 중생들이

돌아보는 데 힘만 들지 않습니까?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모두 훌륭한 예술작품인데 이렇게 한꺼번에 모여있으니 잘난 몇 개는

칭송받고 나머지는 구경꾼조차 기웃거리지 않으니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중생의 시선조차 잡지 못하는 부처가 여기에 무수히 많습니다.

물론 크기는 손톱 크기 정도로 작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모두 얼굴이 깨져버렸습니다.

 

어떤 것은 설명조차 하지 않아 그대로 찬밥입니다.

부처라도 이렇게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부처와 외면받는 부처가 있나 봅니다.

아니... 인간에게서조차 주목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신은 딱하기 짝이 없네요.

과유불급인가요?

 

위의 사진은 만불동 입구 전실 양측 부분으로 사진 아랫부분에 원형으로 둥글게 깨져 보입니다.

원래 저 자리에는 만불동 사자라고 불리는 사자상이 있었던 자리라 합니다.

1930년에서 1935년 사이에 깨진 채로 도난당했다 합니다.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어느 집에 꼭꼭 숨어있을 겁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도난 전에 찍어놓은 사진이 있어

그 앞에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도록 배려했네요.

사진 속에 당시의 사자가 보이세요?

이렇게라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 겁니다.

위의 두 장의 사진을 보면 오른쪽 상단의 서 있는 보살처럼 보이는 사진은 당시만 해도 왼손에

물병을, 오른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지만, 아름다운 얼굴이 안타깝게도 지금은 깨져버렸습니다.

 

붉은 물결이 온 중국을 덮으며 신중국을 건설한다고 하며 이곳에 있는 조각상의 얼굴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나 봅니다.

그러나 옷자락에서 느껴지는 저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멎게 하네요.

그때는 웃고 있었지만, 웃는 게 아니었나 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옳다 그르다, 길다 짧다, 깨끗하다 더럽다, 많다 적다를 분별하면 차별이 생기고

차별하면 집착이 생긴다. 

옳은 것도 놓아버리고 그른 것도 놓아버려라.

긴 것도 놓아버리고 짧은 것도 놓아버려라.

하얀 것도 놓아버리고 검은 것도 놓아버려라.

 

바다는 천 개의 강, 만 개의 하천을 모두 받아들이고도

푸른빛 그대로요.

짠맛 또한 그대로이다.

 

원효대사가 하신 말씀이라 합니다.

우리의 여행이란 그냥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보며 다닙니다.

이제부터는 살아가는 삶도 여유롭게 그렇게 천천히 살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