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가 머물고 간 흔적이...

2012. 3. 24. 08:00중국 여행기/산서성(山西省)

 

이곳은 워낙 넓고 크기에 얼핏 보면 개인 저택이 아니라 하나의 성채로 보입니다.

이 안에 3.000여 명의 사람이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니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안에는 학교도 있고 두부를 만들던 공장시설도 있고 절도 만들어 놓았고 그 외

여러 가지 시설이 있기에 이 안에만 들어가면 평생 밖으로 나오지 않고도

살 수 있을 정도로 꾸며놓았다 합니다.

 

 

왕가 대원은 한 사람의 집이라기보다 하나의 공동체 마을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겠네요.

중국의 부자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부자가 아닌가 봅니다.

워낙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이라 부자의 규모와 질이 다른가 봅니다.

외곽으로 높은 성벽을 쌓고 그들만의 리그를 즐긴 듯합니다.

남과 담장을 높게 쌓고 그리 살아 행복하셨습니까?

 

 

왕가 대원은 건물 모습의 기세가 웅장하고 안으로 들어가면 어느 하나

소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벽돌(塼), 나무(木), 그리고 돌(石) 세 가지를 이용해 수많은 조각을 하여

아름답게 꾸몄으며 그 안에 담긴 내용도 풍부하고 예술적 가치 또한

높게 평가해야 되지 싶습니다.

 

 

원래 나무를 이용한 조각은 진상과 쌍벽을 이룬다는 남방 안후이성을 근거로 한

 휘상의 저택에 널리 쓰였으나 이곳은 남방의 기법인 나무와 북방의 전통

조각기법인 벽돌과 돌까지 함께 사용해 멋을 부렸네요.

세상에 좋다고 하는 것은 모두 집안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 살았으니 무척 행복했을 겁니다.

 

 

굴뚝마저도 그냥 만들지 않고 돌을 이용해 다듬고 파내며 모양을 내 예쁘게 만들어

놓았는데 위의 사진처럼 왕가 대원은 약간 경사진 비탈에 건물을 지었기에

일부는 아래 지은 집의 지붕은 그 위의 집의 마당이 되기도 하네요.

그러다 보니 위에서 볼 때 아래층의 지붕 위의 굴뚝마저 아름답게 장식했나 봅니다.

그리고 왕가대원 주변에는 아직도 토굴을 파고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이런 형태의 집은 치커우에서 보았지요.

그래서 아래에 지은 집의 방도 아치형으로 만들어 토굴 형태로 방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은 우리 온돌과 비슷한 형태의 난방시설을 만들어 놓았더군요.

물론, 우리처럼 방을 모두 데우는 방법이 아니라 침대 하나 정도만 데우고 불을 때는

입구에는 주전자를 올려놓아 언제나 뜨거운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지혜를 보였네요.

이런 모양의 시설을 화항(火炕)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러니 이런 시설이 모든 방에 설치하지 않고 이 넓은 대원 안의 많은 방 가운데

몇 개 보이지 않았으니 이들은 춥게 살았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이 왕가 대원 안에는 수많은 방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사진에 보이는 방은 특별하다고 하네요.

광서 26년 음력 8월 23일 서태후인 자희가 시안으로 도망을 가던 중 이 방에 머물렀다

하는데 바로 위에 보이는 사진의 침실에서 잠을 자고 갔다는데 천하의 서태후도

목숨을 구걸하며 도망가는 길이라 이 초라한 방에서 하루를 신세 졌답니다.

저기 보이는 침상에 누워서...

 

 

이야기에 따르면 자희가 링스(靈石 : 영석) 지역을 지날 때 이곳에 이틀을 머물게

되었는데, 첫날은 그의 친척이 사는 리앙두(兩渡 : 양도)에 머물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의심병이 많은 서태후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이튿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수행원을 두 패로 나누어 한패는 한씬령(韓信嶺 : 한신령)을 넘어 남하하게 하여

후어조우(藿州 : 곽주)에서 기다리게 하고 자희는 둘러가는 다른 길을 택해 칭위안(沁源 :

심원) 산을 따라 수행원과 같이 남하해 가려했으나 갑자기 비가 내려 비를 피하려고

이곳 징성(靜升 :정승)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야 했다네요.

 

 

비록, 당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왕 서방네였지만, 그래도 일반 민가보다는

머물기 안전하고 더 좋았기에 천하를 주무르던 여인이었지만, 이런 누추한

방에서 하루를 묵으며 목숨을 구걸하며 도망질했네요.

여기서 또 그녀의 자취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목숨의 귀함을 알아 여러 가지 방법을 구하며 도망을 치지만, 도망을

오기 전에 광서제가 그리도 아끼고 사랑했던 진비의 목숨은 쉽게 거두고 작은

우물에 자매를 함께 생매장하듯 던져버렸습니다.

이런 일은 마치 사이코패스가 한 짓이라 생각됩니다.

 

사람도 도척 같은 사람이 있고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있나 봅니다.

지금은 저 세상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진비와 광서제에게 나중에 들어온 서태후인

자희에게 빠떼루는 수시로 주고 기합 주는 바람에 눈물깨나 흘릴 겁니다.

울지만~ 아르헨티나가 아니라 서태후여~

 

 

높은 담벼락은 바라보기만 해도 답답합니다.

담장만이 아니라 사합원의 형태는 바라보아 이렇게 꽉 막혀 있어 숨이 막힙니다.

중국사람이 답답한 이유는 넓은 대륙에 살아도 매일 안개 때문에 시야가 좁고

이런 사합원에 살기에 답답한 것은 아니겠지요?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기는 하지만, 사합원으로 지었기에 집안에서 바라보아도 무척

답답해 보이는데 그래도 이 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 옆 난간에 아름다운 조각을 하여

조금은 답답함을 덜어주네요.

이런 예쁜 조각으로 하여금 이곳이 조금은 아름답다 생각됩니다.

다만, 북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진 곳이기에 그나마 2층으로 올라가면 숨을 쉴 수는 있겠고

그리고 남향이라 햇볕이 바로 들어 어두침침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줍니다.

 

 

덕고망중(德高望重)이랍니다.

그 의미야 인격이 높고 명망이 크다는 의미겠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돈이 따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큰 사람은 돈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왕 서방이 돈 좀 만진다고 이런 편액을 걸어놓은 게 아닌가 생각되네요.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구중궁궐 같은 곳에 걸어 놓는다고 누가 알아줄까요?

 

 

왕 서방이 비록 개같이 벌었지만, 정승같이 쓰라고 했잖아요.

조상은 이곳에서 농사만 짓다가 갖은 수모를 다 당하며 장사를 시작해 돈을

벌었지만, 후손은 반듯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나 봅니다.

그중에 비단 장사로 나선 왕 서방도 있었을 겁니다.

그만 밍월이한테 뻑 소리 나게 가버려 그동안 번 돈 탈탈 털어 모두 주고도 좋다고

'띵호아" 한다고 노래도 있잖아요.

속도 없는 놈...

 

시례전가(詩禮傳家)라는 편액을 바라보니 1기 왕서방은 고생하며 자기처럼

개같이 살지 말기를 바랐나 봅니다.

이런 마음은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요?

아름다운 시를 쓰고 예절로 존경받는 가문으로 이어지기를 부모는 바라지요.

 

 

이제 또 다른 집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렵니다.

가는 곳마다 사연이 있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곳에 다만 설명이 없어 우리 같은 배낭여행객은 그냥 바라만 봅니다.

이곳에 많은 사람이 살았기에 왜 많은 이야기가 없겠어요.

佳人의 여행기는 이렇게 내용도 없이 두리번거립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사실 형체도 없는 행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기준조차 없습니다.

가난한 곳에 가면 모두가 가난하기에 가난한 사람이 없고

부자나라에 가면 모두가 부자이기에 부자 또한 없습니다.

세상의 진리가 모두 자기 손안에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행복이란 항상 내게 멀리 떨어져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행복은 바로 내 뒤에 바짝 붙어 있기에 보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걸리버 여행기 속으로 들어가면 난쟁이 마을에서는 거인이고 거인 나라에 가면

바로 내가 난쟁이가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