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사 풍교야박 두번째 이야기

2008. 10. 21. 09:33중국 여행기/소주, 항주, 상하이 여행

오늘은 어제에 이어 풍교야박에 대해 더 알아보자.

장계가 과거시험에 세번째 낙방을 하고 집으로 가던 길이라고 했다.

이곳 수저우라는 객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렇지? 근심이 많으면 종소리도 달리 들리고 까마귀 소리는 왜 그리 마음을 긁는지....

장계야~ 佳人이 왜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너무 걱정마라.

인생이란 원래 안개와 같아 형체가 없고 다 흘러가는 구름이고 스쳐가는 바람 같은 거란다.

아픈만큼 성숙해지는거란다.

 

그런데 한산사의 비밀이 佳人에게 들켰다.

장계의 詩인 풍교야박을 보면 장계가 분명히 근심걱정을 하고 있다.

한산사의 종소리를 들으면 근심걱정이 없어진다는데 장계의 근심은 왜 없어지지 않는게야~~

그러니 종소리를 들으면 근심걱정이 다 없어 진다는 그런 말도 다 뻥이란 말인가?

 

풍교(楓橋)는 강남(江南)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배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게 만든

아래 사진처럼 예쁘고 자그마한 아치형 구름다리다.

원래 해 떨어지면 통행금지가 있어 배들의 다리통과를 막는다는 뜻으로 봉교(封橋)라고

하였는데 장계의 詩로 인해 그후부터는 풍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詩 한편으로 다리 이름까지 바뀐다.

현재 수저우에 이런 모습의 옛 다리가 336개나 남아 있다고 하니 정말 이곳은 물의 도시며

다리의 도시이다.

옛날에는 1.600개나 있었으나 도시화로 많이 없어지고 말았다.

수로의 물 높이가 땅과의 차이가 크지 않아 아치형으로 만들지 않으면 배가 다닐 수 없다. 

그런데 정확히 336개인지는 세어보지 못했다.

그러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자.

 

당시의 장계가 처한 시츄에이션을  유추해 보면 이렇지 않았을까?

여기서 佳人과 함께 과거로의 여행을 해보기로 하자.

장계가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서 열린 과거시험에 3번째 낙방을 하고 고향으로 배를 타고

낙담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집에가서 뭐라고 이야기 해야 하나.....

다른 응시생들이 전부 치팅을 했다 하나?

백 그라운드가 없었다고 조상탓을 해야 하나....

그러니 마음이 편할리 없었겠지.......

한번 떨어져도 속상한데 우와~~ 이번이 세번째다.

우쒸~~ 장계 열받는다~~~

마치 고향으로 가는 귀향길이 귀양길처럼 느껴졌고 쪽 팔렸다는 말이 정확하다.

 

집으로 돌아 갈 길은 아직 가마득한데 어느덧 배는 수조우에 도착을 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뱃사공이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가야 한다고 한다.

뭐 사실 집에 빨리 가봐야 혼나고 다시 공부외에는 별로 할 일도 없다.

여기서 숙박하는 이유는 날이 지면 수로를 통한 시내 진입은 성문을 닫는 것과 같이 통행금지다.

 

그를 태운 배는 풍교와 강촌교 사이의 여객선 터미널에 정박하게 되었다.

당나라 때의 객선(客船)은 밤에는 수조우의 수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가 진 이후에 풍교 나루에 배를 댄 여객선의 승객들 중 대부분은 장삿꾼들이다.

그러니 주머니가 든든한 王서방들은 종일 배를 타고 왔으니 호텔방도 잡아야 하고 목도

컬컬하니 타향에서 술 생각도 나고  또 한가지 더 생각이 났겠지?

한가지 더 생각나는게 뭐냐고?

佳人은 알아도 여기서는 말 못한다.

 

여기가 중국에서 강남이라고 하는 곳이다.

더군다나 미인의 고장이라고 중국에서도 소문난 동네다.

그리고 이곳은 수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한마디로 물 좋다는 이야기다.

혹시 물 좋다는 말이 이곳 수조우에서 생겨난 말이 아닐까?

지금은 생활폐수와 쓰레기로 오염이 심하지만..... 

 

같은 배로 온 일행들은 배에서 내려 인근 나룻터에 제일 물 좋다는 삐끼의 달콤한 꾐에 빠져

양귀비카페에서 술마시며 돈 많은 장사꾼들은 서시룸싸롱에도 가고 2차로 끼리끼리 왕소군

노래방에도 갔을게야.....

그리고 각각 합려호텔이나 부차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것이다.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고향을 돌아가던 장계도 수조우에서 술 한잔 기울이거나 강남 룸싸롱

최고 미녀들인 수조우의 미인들을 왜 만나고는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정신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낙방한 장계가 이런다면 정신 나간 녀석이지~~~

가난한 선비라 돈도 없어 주머니를 뒤져보니 딸랑 동전 몇개....

그래서 저녁은 나루터 24시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 사다가 배위에서 끓여 먹었을게야.....

장계 엄청 열 받았을게야.....

 

야심한 밤 과거에 떨어진 젊은이의 마음 속에는 나그네의 짙은 수심과 울적함이 깔렸을 것이다.

그러니 배 안에서 일찍 뒤비져 혼자 잠이나 자자고 잠을 청하였겠지?

그런데 젊은 낙방생이 잠이 오겠어?

아는게 글 밖에 없는 샌님이고 때 마침 한산사의 종소리는 들리고 까마귀는 울지 게다가 저녁

안개까지 자욱하게 내려 깔리니 폼 나거든....

그래서 "詩나 쓰자" 하고 붓을 들어 썼을 것이다.

 

불쌍하고 처량한 장계......

백수인 佳人에게 휴대전화나 한통 때리지.....

말 동무라도 해 줄텐데....

 

그래서 나온 작품이 "풍교야박"이라는 불후의 名詩다.

 

그렇게 詩 한편을 쓰고 혼자 뒤척이며 잠을 청했다.

그러나 후일 중국의 황제인 강희제(康熙帝)는 풍교야박이라는 詩 한 수를 찾아 이곳에 들렀단다.

佳人도 사실 오늘 왔는데 왜 강희제 온것만 대서특필 하느냐 말이다.

오늘 온 사람은 빠지라네??? 

이 시가 황제인 강희제(康熙帝)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지 않았다면 이 한산사는 그냥 평범한

사찰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詩가 되었으며 많은 중국인들이 이곳을 찾는다.

사실 지금도 대통령이 감명받았다고 하는 책이 일시에 베스트 셀러가 되는것과 같은게 아닌가?

봉하마을이 왜 그리 떠들썩 한가?

손좀 치워라...

풍교야박의 詩가 보이지 않는다.

가려진 부부은 소리 성(聲)자다.

 

그는 이 시 한편으로 과거에 낙방한 실패자에서 수조우(蘇州)에서 아니 중국에서 가장 인기 짱인

시인이 되었으며 한산사를 관광자원으로 만들었다.

만약 그가 과거에 급제를 하고 그냥 장안에 눌러 앉았다면 풍교야박이라는 불후의 名詩는

세상에 탄생할 수 없었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여~~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실패가 따른다.

절대 낙심하면 않된다.

장계는 결국 과거에 급제는 하였지만 그는 관리로의 업적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시인으로 그의 이름이 남아있을 뿐이다.

 

수조우는 수려한 자연경관과 화려한 역사 속에서 많은 시인들을 배출했지만 고향을 가기 위해

이곳에서 하룻밤 잠을 청한 뜨내기 장계가 결국 수조우에서 가장 유명한 시를 남기게 되었다.

수조우 시장은 뭐하는게야!!!

장계를 수조우 시 홍보대사로 임명하지 않고....

 

그리고 이 시는 우리나라의 봉산탈춤에 나온다고 한다.

봉산탈춤의 먹중(젊은 중) 춤 대사에 나오는 '한산사 쇠북소리 객선이 둥둥'도 바로 이

풍교야박에서 따온 대사라고 한다.

 

이 시를 쓴 장계의 정확히 출생 연도와 죽은 연도는 알 수 없다.

그는 양귀비와 불륜의 사랑을 불태웠던 당나라 현종 때의 인물이다.

그는 다섯 번 과거를 본 끝에 결국은 진사(進士)가 되어 감찰관과 지방관을 지냈다고 한다.

결국 장계는 과거시험에 급제를 함으로 그의 꿈을 이루었다.

 

그것 봐라 장계야~~~

노력하면 못 이룰 꿈이 없단다.

佳人이 너를 위해 노래를 들려주잖니~~

눈을 감고 들어봐라.

Any dream will do라고.....

 

절구(絶句)에 뛰어난 시인이었던 그의 시는 풍교야박에서와 같이 맑고 간결하단다.

장계는 수심속에 잠을 청했다는데 佳人은 풍교야박이나 읊조리며 잠을 청해야 하겠다.

우쒸~~ 그런데 佳人은 중국어를 모른다....

그러면 노래나 들으며 잠을 청해야겠다.

내일 하루 더 한산사 구경을 하자.

 

글쓴이 : 佳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