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웅관(天下雄關) 검문관(劍門關)

2013. 5. 31.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오늘은 비가 오락가락 하지만, 많이 내리지 않아 구경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습니다.

여행 중에 많은 비가 내리면 참 낭패죠.

그러나 오늘은 바람이 무척 강하게 부네요.

더군다나 여기 검문관이 있는 지역은 깊은 골짜기처럼 생긴 협곡이라

골바람이 무척 강하게 불어 몸이 휘청일 정도입니다.

 

계속 검각을 향해 앞으로 걸어갑니다.

이번에 또 하나의 다리가 보입니다.

과관교(過關橋)라는 다리입니다.

 

건안 16년 유비는 이 부근의 가맹관(지금의 소화고성)에서 공명, 장비와 함께 대업을 이루기로

논의하고 바로 이곳의 지형을 이용해 검문관을 아주 튼튼하게 보수하기 시작합니다.

이 관문이 바로 촉한의 익주를 지켜줄 그런 중요한 길목이기 때문이죠.

반대로 익주를 삼켜 촉한을 세우려면 근거가 필요해 이 관문부터 튼튼하게 보수했을 겁니다.

 

바로 여기 검문관은 유비에게는 양수겸장인 셈이죠.

관우는 당시 형주에 남아 오나라가 형주를 돌려달라고 졸라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고 뻔뻔스럽게 오리발 내밀며 따거 유비가 쓴 형주 임시 사용권도

자기와는 무관하다며 형주를 되찾기 위해 찾아온 노숙에 모르쇠로 일관했지요.

 

드디어 유비는 이 관문을 건너 부성(涪城 : 지금의 면양)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방통이 백마관에서 죽고 드디어 익주를 날로 삼키고 촉한을 세우게 되었다지요.

그러기에 유비가 이 다리를 넘어 촉한을 세웠기에 촉한 정권 제일관이 되었다고

후일 이 다리를 과관교라고 불렀답니다.

 

그 후 수차례 이 다리를 드나들며 한번 지나갈 때마다 한중왕도 되고 촉한의 황제도 되고...

행복한 일만 생겨 만사형통했다고 하던가요?

이로써 촉한이 성립되었고 조조, 손권과 더불어 제대로 된 프랜차이즈를 차지해

삼국정립의 기틀을 만들게 되었지요.

차라리 과관교보다는 행복의 다리라 하면 어떻겠어요?

 

이제 눈앞에 다리가 하나 더 보이고 검각이 보입니다.

여기까지가 평지입니다.

검각이 있는 저곳부터는 경사가 있는 내리막이죠.

오늘 가랑비도 내리고...

바람마저 세차게 불어 모진 풍파 속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며 이곳을 사수한 강유의 심정을

바람은 佳人보고 느껴보라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스면 좋으련만 강유는 그날도 화살과 돌이 날아오는 이곳에 서서 배고프고

추위에 떨며 고생하는 군사를 독려하며 위군에 당당하게 맞서 싸웠을 겁니다.

식사 때가 되면 밥 먹고 싸우지...

 

이제 입관교(立關橋)라는 다리를 건너 들어갑니다.

공명은 이곳에 비량각을 세우고 모든 군사는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만 통과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는 중국 내에서도 이렇게 관문을 통하여 허락을 받고 통과하게 한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 합니다.

검문촉도의 이런 일화를 남겼기에 공명은 후일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래된 관문을 보수하고

바로 여기에 입관교라는 다리를 세워 공명을 기념했다 합니다.

 

공명의 위풍당당한 석상이 보입니다.

북을 향해 매섭게 바라보며 말입니다.

이로써 공명은 여기에 돌로 튼튼하게 관문을 세웠고 여기가 바로 역사적인 아주 중요한

군사요새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이 때문에 후일 강유가 북에서 내려온 위나라의 대군을 맞아 여기 검각에서 적은 군사로도

한 치도 뒤로 물러남이 없이 대군을 막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과연 공명은 사후에도 여기가 아주 중요한 군사요새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요? 

 

불어라 동남풍아~

공명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위의 사진을 보시면 바람의 세기가 느껴지시죠?

아! 이런 동남풍이 아니라 오늘은 북풍입니다.

덜수가 부른 북풍말입니다.

만약 동남풍이라도 다시 분다면 공명이 환생해 세상을 다시 풍파속으로 휘몰고 갈 겁니다.

 

눈앞에 검각이 보입니다.

검각은 지금도 저곳에 서서 그날 강유가 흘렸던 눈물을 보았을 겁니다.

공명의 후계자로...

그때 일 차 북벌에서 승승장구하던 공명을 천수성에서 보기 좋게 바보로 만들어

공명의 속을 훤히 꾀 뚫어 보았던 젊은 피..

강유라는 젊은이도 세월이 흐르니 모두 떠나고 어느덧 늙은이가 되어

외롭게 이곳을 응시하며 지켜내고 있습니다.

그때 공명과 함께 지냈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공명은 그런 강유를 적이라 생각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후계자라 여기고 효자였던 강유의 어머니를

움직여 강유가 적과 내통했다는 오해를 받게 해 천수성 태수 마준을 속여 촉으로 귀순시켰습니다.

공명은 숨을 거두기 직전에 강유를 불러 그동안 연구하며 만들었던 병법과 발명품의 설계도를

그대로 모두 강유에 전해주어 자타가 공인한 리틀 제갈량 강유...

 

오늘 여기에 서니 그때 강유가 공명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공명이 믿고 맡길 수 있었던 장수가 딱 두 명이 있었지요.

바로 강유와 조자룡입니다.

두 장수에 대한 공명의 믿음은 역시 틀림이 없었지요.

 

촉군의 대장군으로 강유는 모든 것을 쏟아 공명의 마지막 꿈인 북벌을 계속 감행했지요.

그는 여기 어딘가에 공명이 쓴 병법책과 발명품의 설계도를 숨겨놓았을 겁니다.

오늘 佳人이 산을 모두 뒤져서라도 그 병법책을 찾아 돌아가렵니다.

혹시 저 위의 산속에 숨겨놓았을까요?

 

우선 먼저 관루 위로 올라가 보렵니다.

아무래도 그곳에 있을 확률이 제일 높을 테니까요.

왜?

마지막일지 모르는 전투에서 강유는 아마도 저 관루 위로 올라가

군사를 독려하며 지휘했을 게 아니겠어요?

사진의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시면 관루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힘도 별로 들지 않으니 佳人과 함께 올라가실까요?

여러분에게 모두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공명이 강유를 만나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난 집을 떠난 이후로 지금까지 배워온 것을 전할 현자를 찾아 헤맸으나 아직 이루지 못했었다.

오늘 귀공을 만나게 되어 드디어 그 소망을 이루었다."
이 말에 강유는 뻑~ 소리 나게 가 황송해하며 충성할 것을 맹세했던 것입니다.

뭐... 공명이 그때 佳人을 만나지 못하고 강유를 만났기에 그랬을 것이지만...

그래도 佳人은 슬프지 않습니다.

 

관루의 현판이 뭐라 썼습니까?

천하웅관이라고 쓰지 않았나요?

그 현판 아래 누가 섰습니까?

강유일까요?

여러분의 귀염둥이 佳人입니다.

바로 저 저리가 늘 강유가 서 있던 자리가 아니겠어요?

 

후주 유선이 항복했지만, 그래도 단념할 수 없었던 강유는 종회를 꼬드겨 모반을 일으키고

등애를 쫓아내어 촉을 다시 얻으려 했으나 위의 부장들이 따라주지 않아

종회와 함께 살해당했다고 하지요.

그 때 강유의 나이 63세였다고 합니다.

더는 삶에 대한 회한은 없었을 나이지만, 한 번 공명과 약속한 사나이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강유는 노력했습니다.

그래요!

강유만한 사람 흔치않습니다.

 

강유에 대한 평가 중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강백약은 상장의 중임을 맡아 신하들의 위에 있었지만, 초라한 집에 살았으며

여분의 재산도 없었고, 별당에 첩을 두어 불결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후당에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오락이 없었고, 의복은 입는 것으로 충분했으며, 수레와 말을 준비하고, 음식은 절제했으며,

사치스럽지도 않고 빈곤하지도 않아 관에서 지급하는 비용은 손을 따라 모두 썼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한 까닭을 고찰하면, 탐욕스런 자나 불결한 자를 거세게 질책하고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자기의 애욕을 버리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하여 만족하면 많음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견해는 항상 성공을 칭찬하고 실패를 헐뜯으며, 지위의 높음을 기대고

낮음을 떨어뜨리며, 모두 강유가 잘못된 곳에 의지하여 자신을 죽게 하고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폄하하고 다시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춘추)에서 말하는 폄하의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강유처럼 학습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청렴하고 소박하며 절약하는 인물은 한 시대의 모범입니다."


이상의 평가는 佳人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강유에 대한 것으로 가만히 음미해 보면

무척 깨끗하게 한평생을 산 사람이라 할 수 있겠네요.

우리나라 청문회장에서 이런 평가 받는 사람을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습니다.

아니라고요?

강유도 우리나라 청문회에 나오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더러운 치부가 모두 드러난다고요?

 

특히 공명이 죽은 후 촉군의 뒤를 추격하는 위나라 사마의 군대가 느닷없이 나타난

사륜거를 탄 공명을 보고 혼비백산 식겁하고 도망한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지요.

이때 가짜 공명의 목상을 만들어 사륜거에 싣게 한 것이 강유의 아이디어였다니 공명이

일찌감치 강유를 후계자로 점찍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곳은 검문관 위에 올라 바라본 촉이 땅으로 아주 평평한 모습입니다.

 

천하웅관이라는 검문관은 강유에는 정말 많은 한을 안고 있는 곳인가 봅니다.

그러나 유비에는 검문관은 행복의 문이었습니다.

이 문을 한번 지나 오르내릴 때마다 세상은 생각대로 되었으니까요.

문은 같은 문이지만, 그 문을 통과하며 사람마다 받는 팔자는 모두 다른 가 봅니다.

 

유방의 기를 받으려고 한중으로 군사를 이끌고 올라가 조조의 땅에서 조조를 격파하고

한중왕이 되었고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는 유장을 무찌르고 익주땅을 통째로 삼키고...

유비는 생각대로 하면 되고의 행복한 사내였나 봅니다.

 

황제 헌제가 조비에 자리를 선양했다는 소식이 이 관문을 통해 유비에게 전달되자

천하가 모두 듣게 시일야방성대곡을 하며 그 소식을 들은 지 겨우 6개월 만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뻔뻔스럽게도 촉한의 황제 자리에 올랐고...

사실 황제 자리에 오르려면 대관식을 하는 장소도 만들고 준비할 게 많았기에 결정 한 후에도

시간이 조금은 걸릴 겁니다.

같은 곳일지라도 누구에게는 한 맺힌 곳이요, 누구에게는 약속의 관문이었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결국, 공명이 강유에 전해준 공명의 병법책은 오늘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온 산을 찾아 헤매면 찾을 수 있으려나요?

그 병법은 공명의 머릿속에만 있었나 봅니다.

공명은 책을 전해준 게 아니라 강유의 지혜를 읽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佳人은 그런 지혜가 없기에 엉뚱한 생각을 하나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