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에서 쉬창(许昌 : 허창)으로

2013. 2. 5. 08:00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2012년 10월 27일 여행 9일째

 

안양은 우리 여행의 목적인 삼국지 기행과는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지나가는 길에 안양 박물관을 구경하기 위함인데 이곳이 아주 오래된

역사의 고장이고 갑골문이라는 것이 무더기로 발견된 곳이라고 해 구경하려고 들렸습니다.

 

정말 오늘은 분 단위로 알뜰하게 나누어 아침부터 안양의 박물관 세 곳을 모두 보았습니다.

다시 문자박물관 앞에서 출발하는 기차역으로 오는 3번 버스를 타고 역 부근의 숙소에 들려

배낭을 챙겨 기차역으로 갑니다.

기차표는 어제 미리 사놓았기에...

 

문자 박물관을 한 시간을 돌아보고 숙소에 돌아오니 2시 15분경입니다.

기차는 2시 50분 출발이라 시간이 충분하네요.

그러나 기차는 30분을 연착해 안양역에서 3시 15분에야 출발합니다.

기차는 신시앙을 지나 정저우를 통과해 계속 남쪽으로 4시간을 달려 쉬창으로 갑니다.

 이 쉬창이라는 지방을 포함해 시안까지를 우리가 흔히 중원이라 부르는

중국의 문화 중심지라고 봐야 할 겁니다.

 

한참을 달리던 기차가 큰 강을 가로질러 건너갑니다.

아마도 이 강이 황허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그런데 기차가 가는 방향의 오른쪽을 보니 뭔가 보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위의 사진이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자세히 보니 바로 정저우에서 버스 타고 가는 풍경구인 황허 풍경구로 생각됩니다.

염황제의 거대한 두상을 만든 곳 말입니다.

그곳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사진을 통해 가끔 보았기에 여기가 맞을 듯합니다.

순간적으로 손에 든 똑딱이로 얼른 찍습니다.

입장료도 내지 않고 눈 깜짝할 시간에 획~ 보았습니다.

설마 구경한 것 돈 내라고는 하지 않겠죠?

가운데 불쑥 솟은 저 바위 같은 게 염황제 두상이 아닐까요?

 

기차는 쉬창 역에 저녁 7시 10분에 도착합니다.

크하! 이거 캄캄한 밤에 도착했습니다.

물론, 위의 사진은 이튿날 아침에 찍은 사진이라 밝은 날의 모습입니다.

이런 시간에 도착한다는 것은 무척 불안한 일입니다.

동서남북도 구분하지 못하고 숙소도 예약하지 않았기에 밤이란 두려운 시간이죠.

 

해가 있을 때 도착해 숙소를 구한다는 일은 우리가 갑이고 숙소 주인이 을인데...

이런 시간은 우리가 철저하게 을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기차역 앞에는 많은 삐끼가 있어 몇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이 도시 숙소의 대강 견적이 나오죠.

쉬창에 관한 정보도 없고 그냥 다음에 이동할 터미널이나 기차역이 있어 삐끼를 따라가

근처에 있는 숙소에 하루에 70원씩 주고 이틀을 묵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어제 안양에서 쉬창까지 기차로 이동하고 기차역 부근에 숙소를 정했습니다.

우리의 다음 이동할 곳이 뤄양이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한 쉬창 역 부근에 숙소를 정했습니다.

기차역 광장 건너편에는 버스 터미널이 있고 소림사가 있는 등펑(登封 : 등봉)으로 가는 버스가

있어 우리는 뤄양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등펑을 거쳐

소림사를 들렸다가 뤄양으로 가려고 합니다.

소림사는 작년 여행 때 초반에 계획에도 없는 곳을 여러 곳 들리다 보니 나중에는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친 곳이기에 이번 기회에 들려보렵니다.

 

위의 지도는 쉬창(许昌 : 허창) 시내 지도입니다.

쉬창에서는 숙소에서 걸어서 춘추루라고 하는 관제묘를 보고 다시 걸어서 조승상부를 봅니다.

그다음 다시 걸어서 박물관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박물관은 허도공원이라고 부르는 외곽으로 이전했기에 한참을 걸었습니다.

 

그다음 박물관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파릉교라고 하는 관공사조처까지 갔다 왔습니다.

여기가 바로 관우가 조조에게 "굿 바이!"를 고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곳인

파릉교가 있는 곳이라 했나요? 

다행히 박물관 앞에서 바로 가는 시내버스가 있어 수월하게 다녀왔어요.

이렇게 다니니 이 루트가 딱 하루 코스입니다.

택시를 타면 조금 더 편하게 돌아볼 수 있겠지만, 우리 부부는 걷고

그리고 시내버스 투어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오늘은 우선 관제묘부터 구경하렵니다.

물론 걸어서 찾아갑니다.

여기의 관제묘가 제법 유명한 것은 관우가 조조에게 잠시 몸을 의탁했을 때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일 겁니다.

그때 유비는 자기 혼자 살겠다고 식솔 모두를 버리고 줄행랑치고...

관우는 유비의 두 부인을 모시고 조조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곳에 머물렀다지요.

 

길을 걷다 보니 운하가 보입니다.

개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잘 만든 물길이기 때문에 운하라고 했나 봅니다.

이 운하가 바로 조조가 팠다는 바로 운양하라는 그 운하일 겁니다.

조조는 민초의 삶을 위해 이렇게 운하를 파 쉬창을 연결하여 흐르게 함으로 농사를 수월하게

짓게 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개혁가라고 해도 무방할 겁니다.

사실, 물길로도 이용했지만, 세금으로 걷은 식량을 이곳으로 운반하려고 했던 수로이겠지만...

 

게다가 둔전법이라는 토지개혁을 시행함으로 농사를 포기하고 농기구 대신 창칼을 들고

황건적이라는 도적 떼가 되어 몰려다니던 선량한 농부가 다시 농토로 돌아오게 했으며

그때까지 수탈에 힘들어했던 민초에게 정당한 세금만 내고 마음껏 농사를 짓게 한

둔전법을 실시한 탁월한 행정가이기도 하지요.

둔전법은 농사를 짓는 민초에게만 이로운 게 아니라 정당하고 예정된 세금을 걷게 되니

국가로서도 좋은 일이었답니다.

그래서 흥농부국(興農富國)의 꿈을 실현하는 법이라 해도 될 겁니다.

유비는 눈에 띄는 이런 것 하나 만들지 않고 작가는 민초의 존경을 받았다고만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무슨 일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고 해야지...

 

우리가 업성 유지라는 곳에서 서문표가 했던 일을 보았습니다.

조조도 서문표처럼 강물을 끌어들여 운하를 혈관처럼 파 물을 흘려보냄으로 생활의 활기를

불어넣은 멋진 사내랍니다.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조조가 팠다는 운양하라는 운하는

지금도 쉬창 시내를 흐릅니다.

간웅이라고 미워하고 싶어도 알면 알수록 조조는 우리에게 멋진 사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가 조조의 땅이라고 하니 조조를 조금은 띄워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춘추루라고 부르는 관제묘가 있는 곳 앞에는 제법 큰 공원이 있습니다.

중국의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춤판이 벌어졌네요.

아침부터 춤의 삼매경에 빠진 멋진 커플(?)이 눈에 보이네요.

아침인데 출근도 하지 않나요?

여자의 옷차림으로 볼 때 춤을 추기 위한 옷으로 보이고 목에 두른

긴 스카프도 춤을 추기 위한 소품인가 봅니다.

 

그 공원 한가운데는 웬 말이 한 마리 있어 춤추는 남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저 커플이 정상적인 부부간인가? 아니면, 부킹으로 만난 사이일까...

지금 저 여인이 전문가는 아닐까?

꽃뱀과 제비는 아닐 거야!

식구들에게 아침 밥상은 차려주고 나왔을까? 아니면, 여느 중국 가정처럼 각자 알아서

밖에 나가 사 먹으라고 했을까...

아주 유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쇠창살 안에 갇힌 말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관우가 여기에 잠시 머물렀다는 곳으로 조조가 관우에게 선물한 적토마라고 합니다.

적토마는 수놈이 맞습니다.

궁금하시면 직접 가셔서 확인해 보세요.

 

나중에 관우가 유비의 소식을 듣고 여기를 떠날 때 모든 것은 품목까지 적어가며 남겨두었지만,

유일하게 욕심내고 가져간 것이 바로 적토마였지요.

사내란 지금은 좋은 자동차에 관심이 많듯이 그때는 좋은 말에 관심이 많았나 봅니다.

관우도 결국, 佳人같은 속물이었다는 말이 아닐까요?

정말 깨끗하게 정리하고 떠난다면 적토마까지 남겨두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깨끗한 척... 잘난 척... 혼자 다하며 적토마라는 말을 욕심이 생겨 타고 가버렸지요.

아니군요?

조조가 건넨 전포는 적토마 위에서 내리지도 않고 청룡언월도로 건방지게 받아 떠난 관우.

당당함이라고 장수는 그래도 된다고 한 조조가 대인이지 어른 공경하지 않은

관우가 잘난 사람입니까?

지금으로 말한다면 싸가지 없는 그런 사내가 아닌가요?

형수님이라는 미 부인과 감 부인은 극진히 모시면서 말입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면 마차에 타고 있는 미 부인이 커튼을 살짝 열고

佳人이 한 이야기를 듣고 부끄러워하잖아요.

 

조조가 뒤를 쫓아가 마지막으로 만난 곳이 파릉교라는 곳이라 했나요?

그곳도 나중에 가서 확인해 보렵니다.

정말 이곳에서의 일은 조조가 대인배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이기도 했지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그때 조조를 수행하며 따라온 여러 장수가 佳人에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오늘 쟤 손 좀 봐버릴까요?"

제가 눈짓으로 말리지 않았다면 파릉교는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고 그날 관우는

제삿날이 되었을 겁니다.

佳人이 그랬죠.

삼국지연의에서는 여기서 손보지 않고 그냥 보냈기에 조조의 포용력이

더 빛났으니까 그냥 보내주라고 말입니다.

만약 여기서 피를 튀기는 싸움이 났다면 삼국지연의는 통째로 바꿔야 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