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30. 22:56ㆍ동남아시아 여행기/시엠립 배낭여행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모두가 웃고 있었으며 혼자만 울고 있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모두가 울고 있고 혼자만 웃어야 한다.
가끔 혼자만 울고 모두가 웃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얼굴을 붉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또한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동물이다"라고 마크 트웨인이 말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오히려 우리가 얼굴을 붉히고 당사자는 담담한 경우가 요즈음 많이 생긴다.
이제 우리는 이곳 씨엠립 여행의 백미라고 하는 앙코르 왓에 왔다.
이곳 도착 시간은 12시 50분이다.
그런데 위의 사진은 밤의 시작을 알리는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저녁이다.
그냥 사진 순서를 한 장만 바꾸기로 했다.
왜?
佳人의 개인 블로그니까.
모두가 나오는 시각 혼자서 우두커니 그곳을 바라보고 사진 찍는 나 같은 사람도 간혹 있다.
우선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서 간단한 점심을 하기로 했다.
아침에 스타마트에서 준비해온 빵과 간식거리를 툭툭 기사와 함께 나누어 먹고 4시에
입구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3시간 동안 돌아볼 예정이다.
그러나 휴식과 식사시간을 빼면 2시간이 조금 더 된다.
옛 다리를 지나 승리의 문을 통과하여 앙코르 톰을 가로질러 앙코르 왓 입구에 도착했다.
우선 잠시 쉴 장소를 찾았다.
佳人의 레이다에 저기 그늘 밑이 좋겠다는 신호가 잡힌다.
좋은 자리는 벌써 원씨 성을 지닌 주민의 몫.
그러나 저들은 금방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
해자로 들어가는 입구에 한 무리의 신혼부부들이 결혼사진을 찍고 있다.
이곳도 가을이면 결혼 시즌인 모양이다.
결실(?)의 계절은 세계 어디나 다 같은 모양이지?
아들 딸 많이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
이들의 결혼 풍습도 점차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변화를 하나 보다.
유적과 함께하는 결혼사진.
참 멋진 모습이리라.
이들에게 비쉬누 신도 쉬바 신도 락쉬미도 부처님까지 모두 축복을 해 주실 게다.
푸른 하늘과 넓은 해자.
그리고 앙코르 왓의 위용이 해자에 비친다.
정말 놀라운 건축물이다.
앙코르 왓은 밀림을 밀어내고 만든 종합 예술작품이다.
이곳은 입구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들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가슴으로 나온다.
우리가 생각했던 킬링필드의 나라.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중에 한 나라.
이런 선입견을 여지없이 날려버리는 세계적인 건축물.
만약 이런 커다란 유적이 이태리에 있었다면 당연한 일로 알게 되지만
캄보디아에 있기에 더 가치가 있다.
만약에 예전에 이곳에 와서 수리야바르만 2세에게 "자네 요즈음 어떻게 지내나?"하고
물어보았다면...
수리야바르만 2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이곳을 둘러봐~"라고만 했겠지?
이곳은 우리 같은 배낭여행자는 그냥 마음으로만 느끼고 가야 한다.
왜 만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동원된 사람들의 숫자는?
무슨 과학적인 측정이나 해괴망측한 껍데기는 모두 가라~~
그냥 내 눈으로 보고 내 마음에 담아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마치 외계인의 음모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것을 듣는 일은 우리에게 혼란만 줄 뿐이다.
개인 여행기는 개인의 이야기일 뿐이다.
남에게 강요할 일도 아니고 또 귀담아들을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 나타난 역사와 자료에 따라 내가 해석하고 느끼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과학적으로 또 역사적인 사실로 증명도 되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서 무얼 할 건데?
이곳도 복원 준비 중인 모양이네~~
해자를 둘러싸고 있는 제방의 돌에는 번호가 씌어 있다.
그런데 왜 이곳의 제방 위에는 나가상이 없지?
제일 더운 시간...
이미 가지고 온 물은 지금 외부 온도와 같다.
그래서 차가운 불량 얼음과자가 그립다.
길 건너편으로 가서 마눌님이 사 오시겠단다.
드디어 비닐봉지를 들고 오는걸 보니 사긴 산 모양이다.
그런데 강아지는 왜 달고 오는 게야~~
저 강아지는 우리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내내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개님 출입 금지 푯말은 바깥에서는 아무 소용없었다.
지금 저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 처음 우리가 앉았으나 이리로 다시 옮겨 왔다.
왜?
나무에서 작은 열매가 떨어지는데 옷에 물이 든다.
그리고 개미 같은 벌레가 무지 달려든다.
그래서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는 해자 제방 돌 위에 앉았다.
이게 바로 지금 사온 얼음 보숭이.
그냥 설탕물에 색소 섞고 맛만 내고.
얼음만 가득 찬 그런 불량 식품이다.
찬 맛에 먹고 아무 탈이 없었으니 역시 佳人의 위장은 튼튼한 모양이다.
가격은 무조건 1불(4.200리엘)을 불렀단다.
그런데 울 마눌님은 1.400리엘에 사 왔다.
그냥 이 돈밖에는 없다고 하면 싸게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 옆에는 주변 마을에서 나온 소풍객들인 원씨 가족 주민들이 회식을 하고 있다.
佳人은 빵 쪼가리로 점심을 때우는데 이들은 닭고기에 술까지 한 잔 걸친다.
아이들도 함께 나왔길래 사진을 찍어주고 볼펜을 하나씩 나누어 주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공손히 "어 꾼(감사합니다)"하라고 인사를 시킨다.
이곳도 관광객을 상대하지 않는 원씨 주민들은 아이들의 예절 교육도 철저히 가르친다.
내가 먼저 다가가 볼펜을 건네면 "어 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들이 다가온 후에
볼펜을 건네면 볼펜도 빼앗기고 "프리즈~~ 원 달라"라는 소리를 더 듣는다.
이번에는 어른들이 자기들도 다 함께 찍어 달라고 포즈를 취한다.
사진 몇 장을 찍어서 모니터 액정으로 보여주니 자기들 모습을 보고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정말 순수한 사람들이다.
아니?
저 개는 아직도 가지 않고 이번에는 친구까지 한 마리 더 끌고?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이곳에서는 해자가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 방어 목적이 아니고 인간 세계와
신의 세계를 연결하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니 佳人은 지금 인간 세상에서 신의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이 지역의 대부분 유적들은 모두 해자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워낙 비가 많은 지역이라 빗물을 가두어 놓고
농사에도 사용하고 하는 다목적의 해자가 아니겠는가?
뭐 좋다 이거야~~
신의 세계도 좋고 인간의 세계도 좋은데 해자를 만들어 놓고 인간과 신을 편 가르기
하자는 말인데 사실 이 지역은 비가 수시로 내리고 지대 또한 낮은데 쏟아지는 빗물은 어쩔 건데?
수리야바르만 2세는 이 신전을 다 만든 후에 이 길을 걸어 들어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 나의 사랑 비쉬누 신이시여~ 제가 이걸 만들어 님에게 바쳤나이다.... 나 이뽀?"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수리야바르만 2세가 이곳을 어떻게 인테리어를 했나 구경하러
들어가자.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만의 마음의 집을 짓는다.
그러나 그 마음의 집은 그 사람을 그곳에다 가두어 버릴 수도 있다.
수리야바르만 2세가 꼭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시에 원나라에서 온 주달관이라는 친구도 이곳 앙코르 왓으로 구경하러 왔을 것이다.
그가 이곳을 온 시기가 앙코르 왓이 준공된 후 100여 년이나 지난 후이니 수리야바르만 2세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인드라바르만 3세 때였을 것이다.
이때는 앙코르 제국의 쇠퇴기로 예전의 강력한 위세를 떨치던 시대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이웃의 아유타야의 힘이 막강해져 점차 위협을 느끼고 언제 야반도주할까 하며
고민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부자 망해도 3년 먹을 것은 남아 있다고" 볼 것은 많았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 1 년가까이 머무르며 풍습 등 모든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진랍풍토기라는 책을 남겼단다.
이 이야기가 그래도 가장 신뢰를 주는 이야기란다.
이곳을 온 길이 안남이라는 베트남을 경유하여 왔다고 하는데 당시의 베트남은
천여 년 동안 중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북부 하노이를 중심으로 李太祖가 세운 이 왕조가
진(陳) 왕조로 넘어가 있을 시기다.
또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쓰인 시기와 비슷한 시기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으로 패망한 월남을 탈출한 수많은 사람들을 보트 피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이전인 1.226년 이 왕조가 패망하며 둘째 왕자인 이용상이
식솔을 거느리고 우리나라 서해안 웅진반도의 화산이라는 곳에 왔으니
이들이 실질적으로 최초의 베트남 보트 피플인 셈이다.
그들은 당시 고려가 몽골의 침입에 고통을 받을 때 식솔들을 이끌고 분연히
몽골에 대항하여 싸워 고려 고종으로부터 이곳의 지명인 화산의 이름을 따서
화산군의 봉직을 하사 받고 화산 이 씨의 시조가 된다.
그러니 화산 이 씨는 베트남 이왕조의 후손인 셈이다.
아직 웅진에는 그 당시 항쟁을 할 때 쌓았다는 베트남의 옛 이름을 딴 안남 토성이 있고
그가 패망한 조국을 향하여 통곡을 했다는 월성암이 있단다.
지금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받는 왕이 바로 리 따이 또라는 이태조이다.
이용상 왕자가 고려에 피난 온 지 70년이 지나 주달관은 앙코르에 관광 왔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세상을 하직할 때....
혼자만 웃고 모두를 울게 만들자.
수리야바르만 2세는 혼자만 울고 모두가 웃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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