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 문명의 충돌, 카데시(Kadesh) 전투
제일 앞장서서 달리는 전차 위에 화살을 쏘는 역동적인 부조를 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아부심벨 신전 안의 석벽에 새긴 부조에서 보았던 모습입니다.
람세스 2세가 생전 최고의 업적으로 알리고 싶었던 일이
바로 카데시(Kadesh 또는 Qadesh) 전투가 아닐까요?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된 전차입니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2인승 이륜 전차로 이렇게 카데시 전투에서 이미 이들은
전차를 이용해 전투를 했다는 생생한 역사이지 싶습니다.
이 전투가 일어난 때가 기원전 1274년이며 당시 이집트 신왕국의 람세스 2세는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팽창정책을 썼고 이에 대항해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격돌했던 전투로 지도에 보이는 카데시 전투는 바로 이집트 문명과
오리엔트 문명의 충돌인 셈입니다.
결론은 무승부라고 하지만, 평가하기에는 히타이트의 사실상 승리 내지는 우세승으로
본다고 하며 카데시는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미타니 왕국의 도시로 무역의
중요한 거점 도시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지역을 두고 누가 관리하느냐가 큰 관심사항이었다네요.
즉 상권관리를 위한 나와바리 싸움인 셈이죠.
경제적으로 이권이 있는 지역이라 늘 잦은 분쟁을 일으켰던 카데시를 두고
투트모세 3세가 이 지역을 복종시켰으나 19 왕조로 접어들며 잠시 혼란기에
접어들자 카데시 지역은 히타이트에 복속이 되었기에 람세스 2세는
이를 되찾기 위해 출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카데시 전투에서 동원된 전차는 이집트가 2천대이고 히타이트 1만대라고
전해오고 병력은 주변 동맹국의 병사까지 동원해 2만과 4만 명 정도로 히타이트가
우세했다고 하며 두 나라만의 전투가 아니라 주변 동맹국까지 동원되었으니
국제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답니다.
이렇게 두 세력은 당시 세계제패를 위해 국가의 명운을 걸고 접경지역인
카데시 인근에서 격전을 벌렸다고 하며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전투로
서로가 이긴 전쟁으로 기록했다고 하네요.
오늘 신전 부조에 그린 전투 장면으로 보면 람세스 2세의
거의 일방적인 승리로 표현했군요.
여기 신전 안의 부조는 람세스 2세 홍보용으로 그린 것이지 싶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실과는 너무 동떨어졌지만, 사실과 다르다고 따지면 분명 람세스 2세는
"네가 전장에 가봤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당시의 이집트와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인 소아시아라는 아나톨리아 반도에 히타이트가
자리했고 그 오른쪽인 지금의 시리아 땅에 아시리아가 보이는데 아시리아는
신흥세력으로 커가는 상황이라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아시리아가 위협적으로 생각되어
전투를 서둘러 종결하고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평화조약을 맺은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때 이집트군은 신화의 주인공들의 이름을 딴 아문, 라, 프타 그리고 세티로 4개의 부대로
편성해 각 5천 명 정도의 부대로 편성해 전투에 나섰는데 제일 앞장서서 아문 부대를
이끌고 진군하던 람세스 2세는 도망치는 히타이트 병사 두 명의 포로를 잡게 되었는데...
이들은 히타이트 군이 람세스 2세가 진격해 옴을 알고 두려워하며 이미 카데시 요새를
빠져나가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알려주었다네요.
이에 람세스 2세는 뒤를 빠른 속도로 추격해 일망타진하여 승세를 잡겠다는 욕심에
진격속도를 높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뒤따르던 부대와의 간격이 멀어져 버린 겁니다.
이 틈새로 카데시 부근에 매복 중이었던 히타이트 군이 중간으로 밀고 들어와 선두 뒤를 따라
북상하며 강을 건너던 두 번째 부대인 라 부대를 급습해 궤멸에 가까운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는데 바로 위의 부조에 보이는 둥근 모습의 카데시 성채를 중심으로
당시 상황을 나타낸 모습으로 보입니다.
아부심벨 신전에 가시면 위의 부조는 꼭 보도록 하세요.
히타이트 군은 라 부대를 격파하고 북으로 먼저 올라간 람세스 2세가 이끄는 아문 부대를
급습해 람세스 2세를 생포한다는 생각으로 들이닥쳐 파죽지세로 몰아붙였는데
이 시점에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옴직한 신기한 일이라 생각되는 현상이 생겼는데
람세스 2세는 신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히타이트군이 후미를 격파하기 시작하자 람세스 2세의 곁에 있던 다른 이집트군은
대부분 모두 달아나 버렸고 오직 마부 한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는데 람세스 2세의
마부마저도 겁에 질렸다는데 바로 위의 그림에 보이는 겁먹은
마부의 표정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마부를 독려하고, 신으로 변해서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추격해 온
히타이트 군을 대학살 하고 승리한 후 유유히 뒤를 따라 올라오던 이집트 군에 돌아왔다는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이야기로 바로 카데시의 위치를 현재의 구글지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런 사실은 신으로 변해 혼자 좌충우돌하며 그많은 히타이트 군을 격파했다는 말보다는
뒤따르던 3군과 4군인 뒤에서 올라오던 세트와 프타 부대와 합류하며 위기를
벗어났을 것이지 싶고 람세스 2세는 이렇게 위기를 탈출하여 겨우 목숨을 구하며
회군에 이르렀지 싶습니다.
그는 돌아와 남긴 글이 있다고 합니다.
"적들이 사방에서 뛰어나왔으나 나는 사나운 세트 신처럼 용맹하게 싸웠다.
아무도 나와 대적할 수 없었으며 그들도 나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그들이 서로 달아나려고 겹겹이 넘어지고 뒹구는 것을 보았고
나는 닥치는 대로 쓰러뜨렸다. 병사들이여! 나의 승리를 보아라."
람세스 2세가 사지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이 정도의 무용담은 우리도 이해해야 되지 싶습니다.
전투는 이미 이때 말이 끄는 전차를 이용했는데 이집트 군은 전차에 두 사람이 타고
히타이트 군은 세 명이 탔다는데 전투력에서는 히타이트 군이 강했을 것이고
기동력에서는 이집트 군이 강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무장에서는 위의 사진처럼 히타이트 군은 주로 창을 이용해 근접전에서 강했을
것이고 이집트 군은 화살을 주로 사용했으니 원거리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강했을 것입니다.
또 이집트 전차는 무척 가볍고 튼튼하기에 기동력 또한 뛰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히타이트 군의 기습상황에서도 람세스 2세는 신속히 달아날 수 있어
급박한 위기상황에서도 목숨을 지키며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을 듯합니다.
람세스 2세가 돌아간 후에도 사실 카데시 전투는 이후 16년간이나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는데 람세스 2세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고 평화협정을 맺으며 끝냈는데 람세스 2세는
마치 히타이트 군을 완전 굴복을 시킨 듯 언론플레이를 한 것이지요.
이 평화협정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국가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지금 유엔 건물에 당시 평화협정을 맺었던 돌에 새긴 조약 내용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평화협정의 일환으로 히타이트 왕인 무와탈리 2세의 딸을 람세스 2세의 부인으로 보내
사돈을 맺게 되기도 했다는데 람세스 2세는 많은 적군은 다가오는 것은 두려워하지만,
많은 여자가 달려드는 것은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사내였지 싶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느 일방이 승리한 전투가 아니라 전투가 팽팽해지자 협상에 의해
휴전상태에 돌입했던 전투로 서로 이겼다고 주장하는 이상한 전투지만, 아부심벨 신전
부조만으로 볼 때는 람세스가 아주 일방적으로 격파한 듯 보이고 이래서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고 하며 이기지 못한 전쟁도 역사로 이렇게 남겨두니 정말 대승한 전쟁으로 보입니다.
확실한 것은 격전을 벌렸지만, 결과적으로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 군에게 잡히지 않았던 것과
히타이트가 지배했던 카데시 성채는 함락되지 않았다는 것뿐이니
어느 일방의 승리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 우유부단한 성격이었지만, 지략에서는 히타이트 무와탈리 2세가 앞섰고
용맹함에서는 람세스 2세가 앞섰다고 볼 수 있겠네요.
결과적으로 이집트는 카데시 전투에서 거짓 정보에 속아서 주력군이 괴멸될 정도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후 전투 결과에 대해서는 양측의 기록이 달라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은 람세스 2세가 팔레스타인에서 히타이트 세력을 몰아내지 못한 것이기에
결코 이집트가 승리한 전쟁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 후 장기전 양상으로 흘러가며 서로 대치만 한 상태로 이어지다가 전쟁발발 16년 후인
기원전 1258년 세계 최초로 국가 간에 문서로 된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네요.
조약의 내용 중 하나가 히타이트 공주를 람세스 2세의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집트 최고의 사랑꾼이었던 람세스 2세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카데시 전투가 끝난 후 얼마 지나 두 나라 간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증거 사진입니다.
히타이트에서 쐬기 문자로 석판에 글을 남겼는데 이 석판이 튀르키에 박물관에
보관전시되었고 그 사본은 유엔본부 건물 안에 전시되어 평화로운 국제사회를 염원하는
상징으로 남아있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역사적인 사실로 비추어 볼 때 이곳 신전 안의 부조는 모두 가짜뉴스일까요?
고대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람세스 2세는 주작이고 뻥이었다는 말인가요?
주작까지는 아니라도 과대포장만은 확실하지 싶습니다.
전쟁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승자가 없는 비긴 전쟁에서는 서로가 승자가 됩니다.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측이 최종 승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