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여행 2024

파라오의 제왕, 람세스 2세

佳人 2023. 8. 14. 03:00

 

우리가 방문한 아부심벨 신전이 있는 지역은 사실 이집트인이 아닌 누비안이 지배했던

지역으로 이들은 이집트인과는 인종적으로도 다르기에 늘 경쟁관계였다고 하니

따라서 파라오는 상하이집트는 물론, 이 지역까지 모두 정복해야

진정한 지배자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이곳 아부심벨 신전은 피라미드와 더불어 이집트의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하지요.

그 의미는 그들의 영토 제일 아래에 있기에 일종의 영역표시와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곳 아부심벨을 이집트의 심장에 비유하기도 한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곳에 살았던 누비아 인들과는 늘 지배와 견제를 하고 살았다네요.

기원전 8세기경에는 이지역을 지배했던  누비아 왕 피예가 기원전 714년 북진하여 오히려

이집트를 정복하고 이후 100여 년 간이나 이집트를 지배했던 민족으로

피예는 최초의 흑인 파라오였다고도 합니다.

 

 

우리 입장에서 이집트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파라오라고 하는 고대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파라오를 그들이 최고의 신으로 모셨던

위의 사진에 보이는 매의 얼굴을 한 호루스(Horus)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기에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했다고 하고요.

 

 

나르메르로부터 시작되어 3.070년간이나 이어온 수많은 파라오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 파라오는 살아생전 한 일이 거의 없었지만,  유일하게 무덤이 도굴당하지 않아 유명해진

위의 사진에 보이는 투탕카멘과 오래 살아 이집트를 반석 위에 올린 람세스 2세 그리고

저물어가는 이집트를 살리고자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막으려고 했던 마지막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 7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람세스 2세는 워낙 오래 살았기에 다음 왕위를 이을 아들은 물론

손자까지도 순번을 기다리다 하나씩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자식만 100여 명으로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력왕이었기에 아들 몇 명 죽는 것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버지가 오래 살아 불행했던 아들들...

이렇게 열 두명의 아들은 번호표를 뽑고 순번을 기다리며 대기만 하다가 하나씩 하늘의

별이 되고 드디어 람세스 2세가 죽음을 맞이하자 화장실에 가서 몰래 웃은 아들은

열세 번째 아들이었답니다.

당시 평균 수명이 정상적이었다면 열세 번째 아들은 꿈도 꾸지 못할 대박을 맞은 것이지요.

 

 

그는 람세스 2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이세트노프레트1세(Isetnofret I)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어둠의 신이라는 프타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메렌프타(Merenptah) 또는 메르넵타(Merneptah)였다는데 이때 메르넵타의 나이가

70세 정도였다고 하니 그도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별이 되었다니 정말로 장수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나 봅니다.

 

 

람세스라는 호칭은 고대 이집트인 섬기던 신인 라 신의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라고 합니다.

람세스 2세는 고대 이집트 파라오 중 가장 긴 66년간이나 권좌에 올랐기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실제 그는 다른 파라오는 물론 주변의 많은 사람보다는 오래 살았기에

스스로도 혹시 내가 정말 영원불사의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 싶습니다.

 

 

람세스 2세는 66년 동안 통치를 했고 90살에 죽었다는데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젊었을 때 낳은 자식들은 다 죽었고 그보다 먼저 죽은 손자, 손녀들도 많았다고 하고요.

고대 이집트 전체 역사에서 2번째로 오래 살고 2번째로 오래 재위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랍니다.

 

 

람세스 2세가 사상 유래가 없는 이런 대규모 석굴 신전을 만들고 자신의 업적을

과장까지 하며 만든 이유는 분명 자신과 가문의 처지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람세스 1세는 사실 파라오의 피라고는 전혀 물려받지 못했던 인물이었지요.

 

 

용의 국물이라도 조금이라도 튀었다면 좋았겠지만, 자기가 모시던 장군인 호렘헵이

쿠데타를 통해 왕권을 차지했으나 호렘헵은 불행하게도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얼떨결에 지명을 받아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왕위에 오른 얼떨리우스였잖아요.

 

 

그래도 이름을 태양신 라(RA)에 의해 태어났다고 람세스라는 멋진 이름을 지었으니...

람세스 1세인 할아버지가 파라오에 등극해 기반을 갖추기도 전인 16개월 만에 죽게

되었고 아버지였던 세티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그도 겨우 15년 만에 죽었답니다.

이에 아들인 람세스 2세가 파라오의 자리에 올랐으니...

 

 

"해동 육룡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세 곶 됴코 여름 하나니 새미 기픈 므른 가마레

아니 그츨세 내히 이러 바라레 가나니'하며 용비어천가라도 불러야 하는데...

 

 

할배와 아비가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바닥조차 다지지 못했기에 스스로 용비어천가보다

더 임팩트 있게 뭔가 만들자고 돌산에 석굴을 파고 뿌리를 깊게 내리고

엄청 깊은 샘을 파고 싶어 이런 엄청난 대역사를 이루었지 싶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부터 시작했던 신왕국 제19왕조도 110여 년 정도 유지하다가

다음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는데 람세스 2세가 19 왕조의 반이 넘는 67여 년을

재위에 있었으니 권력이란 것이 성긴 대숲을 지나는 바람과도 같은 것이라

정말 부질없는 일이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부터 시작했던 람세스라는 이름을 온 천하에 각인시킴으로 뛰어난

작명 덕분에 람세스라는 파라오의 명칭을 19 왕조를 지나 다음 왕조인 20 왕조까지도 이어져

람세스라는 이름만도 11세까지 있었다고 하니 이렇게 람세스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만든 인물은 바로 람세스 2세였으니 이곳에 자신의 치적을 자랑스럽게 새겨놓은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기는 합니다.

 

 

그는 카데시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그 기념으로 위의 사진에 보듯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바로 아부심벨 대신전을 만들게 되었으니 

이 신전은 승전 기념물과도 같은 것이겠네요.

 

 

자기 것만 만들면 섭섭하다고 가장 애지중지했다는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해

또 하나의 신전을 지었으니 그게 바로 옆에 있는 소신전이라고 하지요.

마트 행사의 1+1처럼 말입니다.

 

 

람세스 2세는 이른 나이인 10대에 이미 아버지 세티 1세를 따라 정복 전쟁에 참여하며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런 일을 함으로 파라오의 힘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함으로 자연히 제왕학에 대해 눈을 뜨고 또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고 강력한 권한을 가진 파라오로 기록되지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토목공사를 전국적으로 벌리며 그는 전쟁의 신인양 홍보에 열을 올렸지 싶고요.

 

 

동시에 많은 부인을 거느리고 가장 오래도록 파라오의 자리에 있었으며 유래도 찾기

쉽지 않는 100여 명이 넘는 자식을 두었다는데 그 자신도 부인이나 자식들의

이름이나 얼굴을 모두 기억할까요?

아마도 람세스 2세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강력한 사내를 상징하는 오시리스의 아들이라고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아부심벨 부조에 오시리스 신은 모두 소중이를 강조했나 봅니다.

 

 

람세스 2세는 살아생전 낮에는 왕성한 활동으로 주변의 여러 지역을 정복했고

밤에는 많은 부인을 거느렸고 이들로부터 100명이 넘는 자손까지 두었으니

전쟁의 신이 아니라 정력의 신이며 자손 만들기의 신이고 90세가 넘도록 살았으니

당시로는 장수의 왕이지 싶습니다.

 

 

이미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20명의 자식을 두었으니 정력왕으로 자신의 모습을

충분히 알렸다고 보이며 파라오의 일 중 중요한 일이 자손 퍼뜨리기에서도

그는 고대 이집트의 많은 파라오 중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능력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람세스 2세의 부인으로는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3녀 미녀 중 으뜸이라는 네페르타리를

정비로 시작해 7명의 부인과 숫자도 세기 힘들 정도의 많은 비와 후궁을 두었고 네페르타리가 죽자

큰딸을 부인으로 삼기도 했다고 했고 자신의 어머니와도 결혼했던 사람이랍니다.

이렇게 근친혼이 많았던 이집트에서는 일반인은 할 수 없고 오직 왕가에서만이 근친혼을 하는데

이는 신의 아들인 파라오는 훌륭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합니다.

또한 파라오는 당시 전통으로 내려오던 왕가의 혈통을 가진 여자와의 결혼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는데 그래도 어머니나 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