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의 현장 리투아니아 국회의사당
빌뉴스 대성당 광장에서 게디미나스 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아주 멋진 건물이 보입니다.
이 건물은 국립 도서관(Lietuvos Nacionalinė Martyno Mažvydo Biblioteka) 건물이라네요.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아주 멋진 천사상이 도서관 광장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찾아온 곳은 도서관이 아니라 바로 그 옆에 있는 국회의사당 건물입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리투아니아 국회의사당은 예상 밖으로 규모가 작습니다.
게디미나스 대로를 따라가다 보면 왼쪽에 어제 보았던 KGB 건물이 보이고
조금 더 가야 국회의사당 건물을 만날 수 있지요.
리투아니아 국회의사당이라는 현판과 말 탄 기사의 모습의 동판이 보입니다.
말 탄 기사는 리투아니아의 상징인 국장이겠지요?
건물 규모는 우리나라 어느 동네의 구립 도서관보다도 작습니다.
국회의사당(Seimas of the Republic of Lithuania Lietuvos Respublikos Seimas)을 찾은 이유는
이 건물에서 일어났던 역사의 아프고 슬픈 상처를 보기 위함입니다.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의사당 앞에는 대리석에 그 내용을 간략히 적어놓았습니다.
국회의사당 건물은 우리나라처럼 거대하거나 구경거리가 있는 게 아니라 작고 아담한 건물입니다.
이런 모습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보려고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닙니다.
이곳은 역사의 한 장면이 펼쳐진 곳이라 의미 있는 장소랍니다.
광장에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may peace prevail on earth라고 쓴 말뚝이 보입니다.
일본에서 기증한 듯하네요.
아마도 일본에서 이곳에 이런 기념비를 세워두었는지 모르겠지만,
전범국가인 일본이 과연 평화라는 이런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나 되는지...
1991년 1월 13일 소련군은 탱크를 앞세워 빌뉴스 국회와 방송국을 무력으로 점령하려고 하자
빌뉴스 시민은 이곳으로 모여 위의 사진에 보이는 바리케이드를 쌓고 저항했던 방어벽입니다.
이때 14명의 사망자와 6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현장의 모습입니다.
당시의 모습을 여기에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하나씩 사진을 통해 살펴봅니다.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피의 일요일이라고 부른다네요.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당시 이곳 빌뉴스에서는 소련의 통제로 당시의 현장 상황을 방송으로 내보내지 못하자
리투아니아 최고 회의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카우나스 지역의 방송국을 이용해 전 세계로
또 전국적으로 생생한 모습을 내보냈다고 합니다.
그때의 상황을 간단히 기술하면 1990년 당시 이곳 리투아니아를 강제 점령하고 있던 공산 세력권이
점점 약화하고 있던 때 리투아니아 최고 회의 선거가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치러졌다고 합니다.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사유디스가 141석 중 101석을 차지했고 란드스베르기스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네요.
새로 구성된 최고 회의는 소련의 모스크바가 연방탈퇴 법을 제정하기 전인
1990년 3월 11일 독립국임을 먼저 선언했답니다.
이 선언문은 6명의 폴란드인 위원을 제외하고 모두가 서명했다고 하네요.
독립은 선포되었지만, 여전히 소련 군대가 주둔해 있었고, 소련 KGB가 활동하며 계속 지배하려는 의도로...
이에 최고 회의는 리투아니아 내에서 소련 헌법과 법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해 버렸답니다.
소련은 탈퇴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머뭇거렸고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리투아니아의 소련 연방 탈퇴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았답니다.
1991년 1월 10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헌법의 우월성을 인정하라고 이곳에 최후통첩을 보내게 되었다네요.
그러나 리투아니아 최고 의회가 이를 거부하자 소련은 무력으로 집행하기 위해 군대가 움직였습니다.
1월 11일부터 소련 군대는 언론회관, 국방부, 경찰학교 등을 점령했고 리투아니아 정부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소속기관으로 와서 맨손으로라도 지킬 것을 호소했고 수천 명의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국회의사당과 텔레비전 타워로 모여들었습니다.
드디어 운명의 1월 13일 피의 일요이라고 불리는 날,
소련군 특수부대가 탱크를 동원해 텔레비전 타워를 공격하게 됩니다.
비무장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 곤봉을 휘두르며 무자비한 진압을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14명의 사망자와 6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네요.
빌뉴스 텔레비전 타워가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가며 빌뉴스에서 이런 내용을 방송을 통해 더는 내보낼 수 없게
되자 리투아니아 정부는 즉각 카우나스 텔레비전을 활용해 전국으로 방송하게 되었다네요.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은 전 세계로부터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아이슬란드가 최초로 1991년 2월
리투아니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기에 이릅니다.
1991년 8월 19일 모스크바에서는 소련 제국 구하기 쿠데타가 일어나며 보리스 옐친이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1991년 8월 25일 러시아, 9월 2일 미국 등 세계 각국이 리투아니아 독립국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로써 리투아니아는 1991년 9월 17일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지요.
소련군 탱크에 단신으로 당당하게 맞선 시민의 모습에서 오히려 카리스마가 느껴집니다.
1993년 8월 31일 그때까지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마지막 소련군대가 리투아니아를 떠나며
리투아니아의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네요.
이로써 많은 나라가 리투아니아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유엔 가입, 나토 가입 등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함으로 진정한 독립국으로서의 걸음을 내닫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당시 구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된 위의 사진에 보이는 철망이나 바리케이드가 여기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빌뉴스 시민이 맨손으로 소련 탱크를 막아서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이곳에 쳤습니다.
피의 일요일 그날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여기 작은 기념 돌 하나가 놓여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당시의 긴박했던 모습입니다.
1991년 1월 13일 몹시 추운 새벽의 모습입니다.
이런 일로 말미암아 발트 3국 중 가장 반 러시아적인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