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멀어버린 말의 슬픈 이야기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의 입구는 좁았지만, 지하로 내려오니 무척 넓은 공간이 많이 나타나네요.
여기는 또 다른 지하 세상이었습니다.
제일 처음 만나는 모습은 예전에 이곳에서 소금 채취를 했던 모습을 만들어 놓았네요.
오늘은 눈이 멀어 슬펐던 말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렵니다.
이곳에서 처음 소금 채취를 할 때 소금을 실어 나르고 옮기고 지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한 동력은 전기가 없었을 때이기에 말의 힘을 이용해 끌어올렸을 겁니다.
그런 도르래 장치가 이곳에 보존되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위해 소금광산 안에 투입된 말은 평생 죽기 전에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합니다.
지금처럼 지하에서 밖으로 오르내릴 때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따라서 출입하는 갱도는 겨우 사람 하나 빠져 다닐 정도의 공간 밖에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보다 몸집이 큰 말은 그런 곳으로 드나든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이 이곳에 들어와 작업에 참여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곳에 투입된 말은 아주 어린 작은 말을
처음에 아래로 데려가 키우며 일을 시켰다 합니다.
일을 끝나고 올라올 때 사람은 외부로 나오지만, 말은 그냥 캄캄한 지하에 두었기에...
워낙 좁은 곳을 사람만 겨우 빠져나와야 하기에 말은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때문에 매일 일이 끝나고 사람은 밖으로 나올 때 말은 그냥 작업장 한 곳에
마련한 마구간에 두었을 것이고...
말은 오랜 지하 생활에 눈이 멀었고 평생 지하에서 일만 하다가
죽은 후에서야 밖으로 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했던 말은 작은 몸짓의 말이었다 합니다.
아무래도 좁은 갱도에서 일을 해야 했기에...
그런데 흥미 있는 일은 이 안에서 일만 했던 말의 수명이 바깥세상에서 살았던
말보다 더 오래 살았다는 점입니다.
비록, 캄캄한 곳에 갇혀 살며 평생을 일만 하다 죽었지만,
수명이 더 길었다는 점은 무슨 이유일까요?
눈이 멀어 더러운 꼴을 보지 않고 살아서였을까요?
아니면 밝은 세상이 살아가는 도중에 더 많은 위험요인이 있다는 말일까요.
위의 사진은 바로 소금 덩어리를 암염으로 만든 코페르니쿠스입니다.
그는 이곳 크라쿠프에 있는 야기엘론스키 대학을 졸업한 이곳 출신의 위대한 인물이죠.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지구본을 들고 있네요.
1473년 태어나 1493년에 이곳 소금광산을 방문했으며 그의 탄생 500주년이 되는
1783년에 만든 작품이라 합니다.
폴란드는 그들 스스로 폴스카라 부른다는데 그 말의 의미는 낮은 땅이라는 말이라 합니다.
몇 시간을 차로 달려도 평원뿐이라 그랬을까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조각상은 폴란드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를 세웠던 미에슈코 1세라 합니다.
그러니 건국 시조라는 말인가요?
위의 사진 왼쪽에 보이는 암염조각은 킹가 공주입니다.
그녀는 헝가리 벨라 4세의 딸로 폴란드 브로츠와프 왕과 결혼하게 되었다 합니다.
당시에 소금광산이 여러 개 있었던 헝가리와는 달리 폴란드는 소금광산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에게 소금 광산 하나를 부탁했고 벨라 4세는 딸의 결혼 지참금으로
마라무레라는 소금광산을 주었답니다.
폴란드로 떠나기 전 그녀는 결혼반지를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금 구덩이에 던져버렸고
다음 날 폴란드로 오며 이곳 비엘리치카에 잠시 머물며
공주는 지금의 소금광산을 가리키며 파보라고 했다네요.
구덩이를 파자 신기하게도 소금 덩어리가 나왔는데 그 덩어리 안에
그녀가 오기 전 버렸던 반지가 나오더란 말입니다.
킹가 공주는 헝가리에 작두 타는 일을 했나요?
반지의 제왕이 아니라 반지의 공주였나 봅니다.
그런 이야기를 이야기하려고 공주 앞에 무릎을 꿇은 사내가 반지에 싸인
소금 덩어리를 공주에 바치는 모습을 만들었네요.
이런 일로 폴란드 왕실을 소금 광산에 대한 독점 채굴권을 가짐으로
튼튼한 재정을 이룰 수 있었다네요.
소금 광산에서 나오는 소금 중 가장 가격이 비싼 소금은 맑은 수정 형태의 크리스털
소금이라 하며 소금광산은 지하이기에 메탄가스도 많이 나왔던 모양입니다.
이게 많이 모이면 작은 불씨에도 큰 폭발로 이어지기에
자주 소량일 때 미리 불을 붙여 태웠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소금광산 지하에서 많은 화재가 발생했고 1644년에 일어난 화재 때
많은 광부가 목숨을 잃은 적도 있었다네요.
사람뿐이 아니라 광산 안에서 일을 했던 말도 죽었을 것이고 갱도를 튼튼하게 하려고
나무로 만든 버팀목도 모두 타는 바람에 그 불은 몇 달간 지속하기도 했답니다.
당시는 지하에 불을 밝히기 위해 전기시설을 한 게 아니라 횃불로 했을 터이니...
위의 사진에 보이는 시커멓게 그을린 모습이 당시에 불에 탄 모습입니다.
그리고 만들어 놓은 조형물은 횃불을 든 작업자가 미리 소량의 메탄가스에
불을 붙여 태우는 모습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곳은 괴테도 다녀갔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다녀갔다 합니다.
많은 유명인이 다녀갔던 곳으로 그런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암염으로
그들의 모습을 소금광산 안에 남겨두었습니다.
지금은 관광객만 다녀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