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 군상과 성모 마리아 기둥
구시가지 광장 한가운데 얀 후스 군상(Jan Hus monument/Pomník mistra Jana Husa)이 있습니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 한가운데는 거대한 조각상이 보입니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기에 보통 군상이라고 말하나 보네요.
이 조각 군상을 얀 후스와 그를 따랐던 인물들의 조각상이라고 하네요.
얀 후스는 당시 부패하고 탐욕스러웠던 종교계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가였다고 합니다.
당시 종교계란 부패의 온상이었잖아요.
그러니 교권과 왕권이 서로의 권한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무언의 합의를 하고
민초에게서 수탈을 일삼던 시기였으니 성직자는 세속에 깊이 관여해 영지를 갖고
교구 내의 신도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사법권과 조세권까지 소유함으로
많은 사람의 원성을 들었던 것이죠.
두 세력이 민초를 두고 짬짜미 했다는 말입니다.
성직자는 때로는 지방 영주의 권한보다 더 큰 권한을 갖기도 했다네요.
여기에 면죄부라는 극한 상황까지 이르자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많은 사람이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시기였을 테니까 우리가 아는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사람이 바로 얀 후스였다고 합니다.
다만, 그가 있었던 보헤미아 지방은 당시에는 유럽의 변두리라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겠죠.
아비뇽 유수 이후 교황이 셋이나 있었을 정도로 당시 중세의 종교계는 혼탁했나 봅니다.
종교가 민초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데 종교는 민초를 그들의 주머니 불리는 데만
사용하는 도구였을 뿐이었지요.
얀 후스는 신학을 공부한 후 신부 서품을 받은 사람으로
카를 대학에서 시학과 인문학을 공부한 후
카를 대학 교양학부와 신학부 교수를 역임했다네요.
당시 귀족만 사용했던 라틴어로만 된 성서를 체코어로 번역하는 둥 활발한 활동을 했나 봅니다.
그즈음 보헤미아 출신 예로님이라는 사람이 영국에서 공부하며 종교계의 개혁을 주장한
영국인 존 위클리프의 책을 가져와 이를 두 사람이 체코어로 번역하며 의기투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카를 대학 총장으로 있던 얀 후스가 아무래도 많은 사람에 알려졌기에
그가 앞장서고 예로님이 지원하는 형세였을 겁니다.
이들의 이런 행동으로 점차 민중의 인기가 쏠리자 이를 막기 위해
교구나 힘 있는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네요.
이들이 볼 때 얀 후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들이 누리던 권한을
축소하려 한다고 생각했겠지요.
이때 세 명의 교황을 교통정리를 하기 위해 독일의 콘스탄츠라는 도시에서 공의회가 열리며
존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몰아 그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불태우고 그의 저서 모두를
악마의 서적이라고 분류해 불태우며 이를 추종했던 얀 후스를 공의회에 서게 했다네요.
결국, 그는 이단으로 몰렸고 화형에 처하는 벌을 받아 죽게 됩니다.
아울러 그와 같은 생각으로 활동했던 종교 개혁파를 모두 잡아 화형에 처함으로
종교개혁의 싹을 잘랐다네요.
일부 개혁을 부르짖던 사람은 이단자로 몰려 시청사 감옥에 갇히자 많은 시민과 개혁에
동참하는 성직자들이 앞장서 감옥으로 쳐들어가고 교회의 반부패 운동에
사회가 동참하며 매우 혼란한 지경으로 빠져들었나 봅니다.
이 과정에서 마침 시청사에서 날아온 돌에 시위대의 앞장에 서 있던 신부가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갑자기 시위는 과격해지기 시작하며 시위대는 시청사로 안으로 난입해
그곳에 있던 관리나 경비를 창문 밖으로 집어던져버렸답니다.
프라하에는 이렇게 사람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는 일이 무슨 행사였나 봅니다.
프라하에서 창문 투척 사건이 두 번 있었다는데 이게 처음이고 두 번째는 프라하 궁에서
신, 구교 간의 갈등으로 30년 전쟁의 실마리가 된 두 번째 창문 투척 사건이
위의 사진에 보이는 프라하 궁에서 있었죠.
여기 광장 가운데 있는 얀 후스 군상이라는 조형물은 그때 희생된 자들을 추모하기 위함이라
하며 이후 종교개혁을 부르짖는 시위대와 정부 측과의 투쟁이 15년간이나 지속했다네요.
결국, 교황청은 십자군을 파견해 진압했다고 하니 체코인의 종교개혁 열망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이 조각상은 그의 사후 500년이 지난 1915년에 세운 것이라 하니 100년이 넘었네요.
구시가지 광장의 한가운데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동판이 있습니다.
흑사병으로 숨진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성모 마리아 기둥이 있었던 장소를 알리는 동판입니다.
이 동판은 오스트리아에서 만들어 세운 성모 마리아 기둥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는 곳이죠.
위의 사진에 보이는 동판으로부터 길게 연결되어있는 선은 정오가 되면 기둥으로부터
생기는 그림자의 모양입니다.
이 위령비는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도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성 삼위일체
기둥으로 당시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 때 유럽인이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입니다.
후일 체코의 독립과 구시대의 지배 아래 만들어진 오스트리아의 위령비는 자연히 철거되었고
부근에 얀 후스의 군상이 세워지게 되었답니다.
이 또한 역사 지우기로 봐야 하지만, 이런 것은 그냥 두었으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얀 후스 동상 아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모두가 진실하기를 기원하라."
"신을 섬기는 국가여 죽지 말고 살지어다, "
"체코인들이여, 분노의 천둥들은 사그라질 것이며, 정부는
당신들의 손으로 돌아올 것을 믿습니다."
"신의 전사이자 신의 법을 지켰던 전사들, "
이로써 이곳은 공산 치하에서도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합니다.
이곳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저항의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이는 젊은이들의 만남의 장소로 굳어지게 되었지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