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돌다리, 카를교(Charles Bridge, Karlův most)
프라하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은 어디일까요?
물론, 몇 곳 손꼽을 수 있지만, 그중 카를교는 누구나 먼저 생각하지 않을까요?
어찌 보면 이 다리는 프라하의 랜드마크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 싶네요.
프라하를 소개할 때 언제나 1순위로 소개되는 곳이 여기가 아니겠어요?
세상의 많은 사람이 걸어보고 싶은 다리 중 하나겠죠.
프라하의 핵심인 구시가와 프라하성을 잇는 동맥의 역할을 하는 다리라네요.
우리나라 여행사에 패케제로 따라가면 아마도 이 다리를 제일 먼저 찾을 겁니다.
입장료도 없고 통제하기에도 가장 쉬운 곳이니까요.
이 다리의 야경은 유럽 3대 야경 중 하나라고 자랑합니다.
바로 다리 위는 또 하나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리 양쪽으로는 교탑이 두 개 서 있습니다.
이 다리의 역사는 카를교 이전에 10세기경 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었답니다.
그러나 큰 홍수가 나며 다리가 모두 쓸려내려가는 바람에 12세기 중반에 돌로 만든 유디틴 다리가 있었답니다.
이 다리는 독일에 이어 유럽에서는 두 번째로 만든 돌다리였다네요.
당시의 토목기술로 이런 강 위로 돌로 다리를 만드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 다리도 1342년 겨울 블타바 강으로 떠밀려 내려온 얼음덩어리 때문에 다리가 일부 부서져 버렸다네요.
이렇게 되자 프라하는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보헤미아 왕국의 군주였던
카를 4세는 프라하 성안에 성 비투스 성당을 짓고 있는 건축가 페트르 파를레지에게 어떤 자연재해에도
무너지거나 떠내려가지 않는 다리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네요.
1407년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다리가 돌로 튼튼하게 쌓은 지금의 카를교가 되었다네요.
12개의 교각, 그리고 16개의 아치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리 위에 서서 프라하성을 바라보는 풍경도 좋습니다.
이 돌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도록 쌓으려면 돌을 서로 단단하게 붙일 수 있는 시멘트 같은 모르타르가 필요하지요.
로마 시기에 만든 수도교나 콜로세움 같은 위대한 인류의 유적이 2천 년이 지나도 아직 남아있는 이유가
바로 시멘텀이라는 물질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여기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돌을 접착했으니 당시 기술로는 물 속이라 아무래도 견고하게 오래도록 지속하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에 접착제로 사용한 것이 달걀의 노른자라고 합니다.
따라서 카를 4세는 다량의 달걀을 프라하는 물론 주변 도시로부터 보낼 것을 지시하였고
정확한 그 내용을 몰랐던 어느 마을에서는 달걀의 파손을 막기 위해 삶은 후 보냈다고 합니다.
웃지 못할 충성심이네요.
명령을 충실히 따르겠다고 자기 딴에는 잘해보겠다고 그랬지만,
삶은 달걀은 접착제로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멍청한 사람을 부를 때 그 마을 이름을 넣어 "벨바리 사람이냐?"라고 한다네요.
또 운호슈테라는 마을 사람은 달걀을 삶지는 않았지만, 많은 달걀을 보내라 하니 나라에 큰 잔치를 하나보다 하며
달걀에 치즈까지 보냈답니다.
정확한 사용 용도를 모르니 그럴 수 있겠네요.
이 마을 사람은 시키지 않아도 오지랖 넓게 앞질러 가는 사람을 부를 때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네요.
그러나 처음부터 카를교라고 이름 짓지는 않았답니다.
처음에는 그냥 '프라하의 돌다리"라고 불렀답니다.
1870년에 이르러서야 카를교라고 명명했다고 하네요.
그 이유는 바로 카를 4세 동상을 다리 입구에 세워두었기에 많은 사람이 '카를 4세의 동상이 있는 다리'라고
부르며 자연스럽게 카를교가 되었다는 말이랍니다.
이전 다리는 나무 위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홍수나 자연재해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보듯이 오래도록 탈없이 사용할 수 있게끔 완전히 석재로만 만들게 되었다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외국의 사절이 오면 이 다리를 통해 왕궁으로 올라갔을 것이고,
보헤미아의 새로운 왕이 등극할 때 대관식으로 위해 지나갔을 왕의 길로써 영광스러운 길이었답니다.
그러나 늘 좋은 일만 있었을까요?
30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스웨덴군이 프라하를 침공했을 때 바로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것이기도 하다네요.
나치가 점령했을 때는 나치의 주요 이동로로 사용되었을 것이고
오랜 세월 동안 프라하 시민의 애환이 듬뿍 스며든 그런 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