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기/윈난성 여행 2016

내마음속의 해와 달, 샹그릴라

佳人 2017. 1. 3. 09:00

내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샹그릴라.

이 지역은 지금은 윈난 성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토번(吐蕃)이라고 불렸던 티베트라는 다른 나라의 영토였지요.

토번이라는 명칭도 당, 송시대에 티베트를 중원에서 불렀던 이름이네요.

 

원래 이들은 투파(독발:禿髮)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했다는데 중원에서 저들 편의상 토번으로 불렀다지요.

중원과 이들 사이에 역사적으로 가장 큰 관계는 문성공주가 송찬간포에 시집갔던 일이겠죠.

그런 서로 다른 나라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밀어닥친 인민 해방군의 무력 점령으로 지금은 중국영토가 되었지요.

 

원래 토번이라는 이름은 동진 말년에 선비족 사람인 남량 국왕인 투파리루고(독발리록고:禿髮利鹿孤)의

후예라고 불렸기에 그들은 투파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했다 합니다.

이들은 나라를 잃고 지금의 티베트지역을 전전하며 살았기에 이들의 조상을 기리기 위해 독발이라 불렀고

이를 중원에서 토번이라 부르며 나라 이름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니 정확한 이름은 독발이라고 해야지 토번이라는 이름은 중원에서 편의상 불렀으니 고쳐야 하는데

이제는 나라가 사라지고 나니 지금은 중국의 영토의 한 부분이 되었네요.

 

티베트 지역을 하나의 깃발 아래 뭉치게 했던 제32대 찬보(贊普: 국왕)였던 송찬간포(松贊干布)는

청장 고원 일대의 여러 부락을 통일한 후 라싸를 중심으로 강대한 토번 왕국을 건설하였다네요.

나라를 세웠으니 이제는 단단한 기틀을 잡아야 하는데...

그래서 그는 중원의 강대국 당나라와의 친교를 맺기 위해 사신을 보내 공주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네요.

당시 당나라 주변의 많은 나라는 당과의 친교에 무척 노력했나 봅니다.

 

우선 앞선 문명국인 당나라의 부마국이 되면 쉽고 빠르게 중원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겠지만, 그러나 당나라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송찬간포는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와의 접경지역인

송주(松州: 지금의 사천성 松潘)까지 밀고 들어와 무력시위를 했다네요.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도 정말 여러 가지입니다.

 

여자 때문에 두 나라가 전쟁을 하게 생겼습니다.

당 태종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전쟁이란 백해무익하여 민초를 도탄에 빠뜨리는 일이라는 것을...

 

이런 생각을 지도자가 한다면 세상에 전쟁은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지도자의 머리에서 민초보다는 자기 욕심이 우선하는 게 세상의 역사죠.

처음에는 서로 다투었지만, 결국, 두 나라 사이에 원만한 해결이 났고

이에 따라 당나라는 문성 공주를 시집보냈다고 하지요.

그러나 문성 공주는 당 태종이 낳은 딸이 아니라 어린 시절 궁에 들어와 살던 여자였지요.

진짜 공주는 이미 주변 다른 나라에 시집 보낸 후였으니까요.

 

그러나 사실은 당 태종이 문성 공주를 보내주며 화친을 맺은 일은

이렇게 민초를 생각하며 내린 결정이 전혀 아니라는 것...

그런 결정의 이면은 바로 당시 동쪽에서 고구려와의 큰 전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동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서쪽까지 전쟁이 벌어진다면 나라가 사라져버릴 수도 있지 않겠어요?

 

삼국지에서도 조조가 쉽게 천하 통일을 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촉한과 동오가 서로 반대편에 서서 째려보고 있어서

두 곳에서 전쟁할 바보는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제갈량이 늘 동오와 친교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가 바로 그런 것 아닌가요?

 

결국, 당 태종은 문성 공주를 송 서방에게 시집보내며 서쪽을 얼버무리는 전략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시집오게 된 가장 큰 요인이 바로 고구려 덕분이라는 핑계도 통하지 않을까요?

 

지금도 송반에 가면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혼사를 기리기 위해 송 서방과 미스 문의 조각상을 세워두고

한장화친(漢藏和親)이라고 자랑하고 있네요.

환장화친이 아니고 한장화친입니다.

사실 송 서방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지요.

당시의 관례로 서방이 죽으면 다시 중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데...

그녀는 죽을 때까지 이들에게 중원의 많은 문물을 전하고 교육하는데 헌신적인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화려한 장안보다 푸른 초원을 사랑했고 산해진미보다 티베트의 소박한 밥상을 즐겼으며

오색 등불이나 화려한 노리개에 정신을 빼앗기기보다 파란 하늘과 푸른 초원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기름 독에 방금 건진 빤지르르한 장안의 사내보다 거칠고 투박한 티베탄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찍 송 서방이 요절하고 과부가 된 문성 공주는 한 사내를 품기보다

모든 티베탄을 가슴에 품은 여자가 되었다지요?

송 서방은 한 여자를 가슴에 품었지만...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르잖아요.

누구는 명품가방을 들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얼굴을 예쁘게 고치고 화장함으로 만족을 느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이라는 것은 답은 없지 싶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방법대로 살아가면 그게 행복한 일이 아닐까요?

 

그녀가 죽자 토번은 마치 친어머니가 죽은 것처럼 온 나라가 비통에 잠겼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녀를 기리는 사당을 티베트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네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 살아도 이렇게 아름답게 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죽은 자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다면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이지요?

 

어찌 보면 정략결혼이었고 공주도 아닌 공주로 포장되었고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 시집왔지만,

티베트는 그녀를 통해 중원의 앞선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임으로 천지개벽했고

그녀 또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으로 일관하지 않고 창조적인 새로운 삶을 열었습니다.

 

당나라는 늘 골칫거리였던 토번이나 그 이웃에 있는 민족의 시달림으로부터 해방되었으니 한시름 덜었겠지만,

그 동네서 가장 힘센 백만돌이 토번이 부마국이 되었는데 감히 어느 녀석이 까불겠어요?

그러나 이런 관계가 훗날 중국 공산당의 군대가 우리가 남이가? 하며 라싸로 들어온 빌미가 되지않았을까요?

비록 척박한 땅으로 시집왔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 않고 오히려 많은 일을 함으로 지금까지도

티베탄에게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 가운데는 송찬간포이고 왼쪽에 보이는 여인이 송찬간포의 조강지처인 브리쿠티 데비입니다.

오른쪽이 문성 공주로 그녀는 송 서방의 두 번째 부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녀 때문에 중국이 티베트에 대한 무력으로 침공해 강제지배를 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두 나라 사이에 혼사가 없었다면 그런 침공의 빌미 하나는 없었을 텐데...

뭐 그렇다고 먹성 좋은 당시의 중국이 티베트를 내버려 두지는 않았겠지만...

 

유엔도 외면하고 군사력도 미미한 티베트는 겨우 4만 명의 중국 인민해방군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중국 땅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중원을 식겁하게 하였던 송 서방이 있을 때는 그렇게 힘이 강했는데...

진정 살아남는 게 강한 것이 아니겠어요?

뭐 대단했던 남미의 문명도 불가사의하게도 겨우 수백 명의 스페인군에 멸망하기도 했지요.

 

할멈!

어디를 그리도 힘겹게 올라가십니까?

무슨 소망이 있길래...

 

그곳 다람살라에는 아직까지도 티베트의 망명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네요.

또 그곳 망명정부에서는 학교를 세워 후세 교육에 힘쓰고 중국을 탈출한 티베탄의 교육도 하고 있다네요.

아직도 꺼지지 않은 독립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고도 합니다.

미국 배우 리처드 기어는 영화 일이 없을 때면 늘 이곳 다람살라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네요.

그렇기에 리처드 기어는 중국에 입국할 수 없는 미국인이라고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생각

아무리 밤이 깊어 어둡더라도...

아무리 밤이 오래 지속되더라도...

아침이 오지 않는 밤은 없습니다.

............

남을 행복하게 하고 싶으면

자비를 베풀라.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자비를 베풀라.

(달라이 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