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기 2015/팔레르모

원죄의 시작부터 흥미진진한 에피소드 세상으로

佳人 2017. 5. 4. 09:00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복근을 보고 운동 중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때 예수와 같은 방법으로 죽을 수 없어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했다지요?

 

 

그는 네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피신하던 중 아피아 가도에서 오히려 로마로 들어가는

예수의 환영을 만났고 그곳이 바로 우리가 아피아 가도를 걷다가 들렀던 도미네 쿼바디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성당이라고 배드로가 딱 걸린 자리였는데

그 자리에 성당을 세웠더라고요.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 순교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 거꾸로 매달린 순교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이 모든 고통과 죽음은 어디서 왔을까요?

오늘은 그 스토리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원죄의 모습이 바로 위의 사진에 나타나 있지 싶습니다.

왼편의 모습이 바로 뱀의 유혹에 빠지는 이브의 모습이고 오른쪽이 선악과를 나누어

먹는담과 이브의 모습으로 그때는 남녀 구분 없이 근육질로 만들어 주셨는데...

이브가 한국여자였다면 "사과보다는 뱀이 남자에게 더 좋은데 정말 좋은데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네!"라고 했을까요?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어요.

사과 먹다가 딱 걸렸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아픔을 겪어야 하고 노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고 사망에 이르는

고통을 맛보아야 하고 이 모든 원죄는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래 수풀 속에 보이는 뱀은 시치미를 딱 떼고 납작 엎드린 체 사태 추이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살게 되면 운동을 일부러 하지 않아도 초콜릿 복근이 저절로 생기나요?

아담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자인 이브까지 복근관리를 오래도록 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쫓겨난 후로는 똥배가 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똥배도 선악과 때문이란 말입니까?

 

 

이제 천사가 나타나 에덴동산에서 방을 빼고 나가라 합니다.

정부에서 법으로 규제하는 2+2년이라는 제도도 여기서는 무용지물입니다.

부끄러움을 알기 시작해 몸을 가리기 시작합니다.

일해야만 살아갈 수 있기에 노동을 하게 됩니다.

이브가 유혹에 빠지지만 않았더라면 인류 모두 수저 타령하지 않고

모두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났을 텐데...

아담은 이때부터 가마우지처럼 살아가야 하나 보네요.

 

 

이제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일도 생깁니다.

아담과 이브의 두 아들이 나타납니다.

위의 사진에서는 왼쪽에 아벨, 오른쪽은 카인입니다.

카인은 농산물을 그리고 아벨은 양을 서로의 제물로 하나님에게 바치는 장면이죠.

 

 

두 사람은 자신이 기르고 키운 것으로 하나님에게 제물을 바치는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더 좋아했나 봅니다.

이에 화가 난 왼쪽의 카인이 아벨을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죽이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른쪽의 모자이크는 하나님이 살인한 카인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에 빠집니다.

하나님과 아벨을 죽인 몽둥이를 든 카인 사이에 아주 작은 사람의 모습이

바로 죽은 아벨의 형상이겠지요.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고 카인에 묻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퉁명스럽게 답을 했다지요?

감히 어따대고 아비에게 하는 대답입니까?

왜 하나님은 편애하셔서 질투를 유발해 아벨이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요?

하나님이 정착하며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보다 유목민의 후손이기에 그랬을까요?

 

 

라멕이 5대조 조상인 카인을 화살을 쏘아 죽이는 장면과 가운데 소년도 죽이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살인은 또 다른 살인을 낳습니다.

아벨을 죽인 카인에 하나님은 표시를 하고 그를 죽이면 7배의 벌을 받는다고 하자

카인을 죽이고 만약 자기를 죽이면 77배의 벌을 받는다고 했으며 777년간

살았다는 카인은 라멕의 5대조 조상이라지요?

그러니 존속살인이라는 말이네요.

인류 최초의 존속 살해 사건의 전말인가요?

 

 

또 라멕은 우리도 잘 아는 노아의 홍수에 나오는 노아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는 처음으로 두 명의 부인을 두어 일부다처제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다네요.

무슬림이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관습은 이 이야기를 근거로 했나 봅니다.

아브라함은 늘그막에 아들 이삭을 얻었다네요.

그러나 하나님이 왼편의 모자이크에 보듯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오른쪽 모자이크에 보듯

불을 붙이고 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칼로 찌를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삭에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마라, 네가 나를 위해 아들까지 제물로 바침을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나에 대한 너의 완전한 믿음을 보여 주었다."

아무리 테스트를 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아들의 목숨까지 놓고는 아니지 않나요?

 

 

이에 아브라함은 이삭의 옆에 보이는 수풀 속의 양을 잡아 제물로 올렸다는 에피소드입니다.

양은 왜 그때 바로 옆 수풀 속에 있었는지...

아무리 믿음을 시험한다고 아들의 목숨을 걸라고 하는 일은 너무 심한 시험이 아닌가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젤은 여자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시간인 저녁때에 성 밖 우물가에

도착하게 되었으며 이때 목마른 엘리에젤이 물을 청하니 레베카는 물을 건네고 다시

물을 길어 아브라함의 낙타에 물을 먹이는 장면입니다.

우물가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의 정분이 싹트는 곳일까요?

우리나라의 우물가도 이뿐이나 금순이 같은 동네 처녀 바람났다고 유행가에도 나오잖아요.

엘리에젤의 여행 목적은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배필을 구하기 위해

주인의 명령에 따라 떠나온 것입니다.

 

 

왼쪽의 이야기가 결혼을 위해 이삭을 만나러 떠나는 레베카의 모습입니다.

레베카는 이렇게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부인이 되었다죠?

오른쪽은 세월이 지나 나이 든 이삭 그리고 큰아들인 에서와 쌍둥이 동생 야곱의

모습으로 레베카는 이삭이 앉은 자리 위로 창문을 열고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는 얼굴이 보이네요.

밖이 무척 궁금한지 커튼까지 젖히고 내다봅니다.

 

 

이삭의 큰아들 에서는 활달한 성격으로 사냥을 즐겼다고 하며 쌍둥이 동생

야곱은 내성적이라 주로 집안에만 있었다고 하네요.

이삭은 레베카와 결혼 후 쌍둥이 형제를 낳습니다.

큰아들 에서는 사냥을 잘해 들에서 살았고 동생 야곱은 내성적인 성격이라 주로

집에서 지냈다는데그런데 이삭은 활동적인 에서를 더 사랑했고 레베카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이삭이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지자 큰아들 에서를 불러 염소를 잡아 오면

에서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여 사냥을 나간 동안, 레베카는 작은아들 야곱에게 에서의

복을 가로채라고 하여 눈이 어두운 이삭에게 에서처럼 다가가 축복의 기도를 받았다네요.

그야말로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새치기했다는 말이죠.

그런 성경 이야기를 위의 모자이크에 새겨놓았습니다.

왼쪽의 작대기에 토끼를 달고 룰루랄라 걷고 있는 젊은이가 장자인 에서고

오른쪽 이삭에게 다가가 복을 가로채는 야곱이 보입니다.

 

 

이로써 야곱이 에서를 대신해 이삭의 상속권자가 되고 큰아들

에서는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네요.

이를 알게 돼 화가 난 이삭은 야곱을 어머니의 고향으로 좇아보내고

그는 그곳에서 라반의 두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네요.

그 내용이 위의 모자이크 제일 왼쪽의 모습이고 가운데는 야곱이

사다리의 꿈을 꾸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요르단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얍복 개울을 건너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이겼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네요.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과 겨루다는 의미라 합니다.

여기서는 오른쪽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아닌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입니다.

천사를 희롱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과부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모습을 그린 모자이크화입니다.

예수는 죽은 자를 살린 세 가지 기적 중 하나가 바로 나인 성에서

과부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께서 다가가 “청년아,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함으로

살아나게 하는 기적을 보였다는 일화입니다.

 

 

피 흘리는 여인을 치료하는 모습이라는 모자이크화입니다.

예수께서 카르페나움에서 혈루증으로 피 흘리는 여인을 치료하는 모습입니다.

카르페나움은 예수의 제2의 고향으로 이 지역 출신인 베드로, 안드레아와

마태오를 제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야이로 딸의 부활이라는 모자이크화로 야이로는 카파르나움 회당을 관리하던

회당장으로 그의 딸이 12살의 나이로 혈우병이라는 병으로 죽게 되어 예수를

찾아가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답니다.

회당장이라면 유다교의 중요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모두 벗어던지고 예수를 찾았다네요.

 

이에 예수께서는 일행을 데리고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의 딸은

숨을 거둔 후였다고 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눈물 흘리며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예수께서는 죽은 아이의 침대로 다가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는 죽은 게 아니라 자는 것이라며 "일어나라" 하시니

아이는 신비하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지요.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을 들러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했다는 에피소드를 그린

모자이크로화로 베드로는 장모가 열병에 걸려 앓아눕자 자기가 아는 세상에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장모를 치료하였지만, 실패했다는데 역시 베드로의 한계인가 보네요.

 

이제 베드로는 모든 일을 내려놓고 마지막 희망을 안고 예수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주님! 저의 장모께서 열병에 걸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입니다."라고 간청하자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간청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집을 찾아가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하자 그동안 심한 열병으로 꼼짝도 하지 못하던 베드로의 장모가 그 자리에서

씻은 듯이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보였다는 일화입니다.

잘 둔 사위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성경의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은 이런 곳에 서면 그 느낌이 다르지 싶습니다.

그야말로 장대한 대서사시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겠어요?

여기는 창세기나 구약, 신약을 통틀어 주요한 에피소드를 1억 개가 넘는 모자이크

조각으로 새겨놓았는데 우리 같은 신앙이 없는 사람도 그 모습을 보면 대단한 작품을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던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