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기 2014/까미노

사리아...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시작

佳人 2015. 1. 29. 08:00

까미노에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방향과 남은 거리까지 알려주는

마일스톤이 있습니다.

휴대전화의 지도를 켜면 GPS로 우리가 있는 지금의 위치까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까미노 길에서는 내가 가야 할 방향과 위치 그리고 남은 거리까지 알려주지만,

살아가는 인생길에서는 아무도 그런 방향과 남은 일정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길이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내일 일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오늘 이 순간에도 더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 제일 중요하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이제 까미노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무슨 마력이 있어 이리도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까?

세상의 길은 모두 같은 길이지만, 그 길을 걷는 사람에 따라 평범한 길일 수도

신비한 마력을 지닌 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통상적으로 이 순례길은 프랑스 피레네 산기슭의 작은 마을 생장 피에드포(Saint-Jean-Pied-de-Port)를 출발해

스페인 북부인 메세타 고원지대를 지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어지는

약 800km의 길을 까미노라고 한다네요.

이 길이 제일 많은 사람이 걷는 길이지만, 사실 스페인에서는 산티아고로 이어지는

모든 길이 까미노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싶습니다.

처음엔 순례자들이 걷던 길이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이 걷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인식하고 있다지요.

 

그러나 한때 이 길은 죄수들이 형벌 대신 걷던 길이기도 했고 죄를 면해주는 면죄의 길이기도 했다네요.

어떤 해는 평생 지은 죄를 모두 사면해주기도 했고 어떤 해는 삼분지 일을 사면해주기도 했답니다.

그런 일이 점차 문제로 비화하자 순례길은 사람들의 사랑에서 멀어져가게 되었답니다.

세상일이란 이렇게 유명세를 타면 갑질을 하게 되나 봅니다.

 

 그러던 중 파울루 코엘료(Paulo Coelho)라는 작가가 이 순례길을 걷고 그 느낌을 바탕으로 쓴 "순례자"라는

이야기가 수많은 독자에게 읽히며 이 길을 걷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지요?

지금은 다시 세상에서 가장 걷고 싶은 길이 되었다네요.

 

요즈음 까미노길을 흉내를 내 우리의 올레길부터 세계에 많은 길이 생기게 되었지요.

이런 모방은 좋은 일이 아니겠어요?

걷는 일이란 육체적인 건강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안정감을 주는 일이니까요. 

 

우리는 지금 왜 이 길을 걷고 있을까?

이렇게 힘들게 걸어서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사실 걷고 있는 우리도 그게 궁금합니다.

분명 면죄부를 받기 위함도 아닙니다.

 

처음 스페인 여행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이 바로 까미노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고민 없이 무조건 스페인으로 가자고 결정하게 한 가장 큰 동기가 바로 까미노였습니다.

우리나라 올레길의 조상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해도 어느 누가 아니라 하겠어요?

 

그러나 여행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며 가장 걱정스러운 게 또한 까미노였습니다.

까미노를 위해 우리 여행에 적어도 1주일의 시간을 추가로 배정해야 하고 무엇보다 저질 체력에

나이 또한 적은 나이가 아니기에 무척 망설이게 한 곳입니다.

특히 울 마눌님의 체력은 최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까미노 길을 걷지 않고 스페인 여행을 했다면, 평생 후회하는 마음의 짐 하나를 남겼을 겁니다.

그렇다고 까미노를 위해 다시 스페인으로 갈 이유도 없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워낙 멀고 경비 또한 만만한 게 아니거든요.

 

비록, 힘에 부쳐 완주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후회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말입니다.

그리고 가다 못 가면 차라도 타고 가면 되지 않겠어요?

여러분이 응원해주신다면 완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목적은 완주보다는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전하는 거리는 전체 800km가 넘는 길을 모두 걷는 일도 아니고 순례자로 인정받는 최소한의 거리인

100km가 조금 넘는 길입니다.

제대로 까미노를 느끼려면 프랑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합니다.

 

앞으로 걸어야 할 거리가 얼마나 될까요?

지금 아침이라 우리 부부의 그림자가 이만큼 길어졌습니다.

아마도 그림자의 길이가 가장 짧게 변할 때면 오늘의 쉼터에 도착하지 않을까요?

 

이 길을 체력이 받쳐주고 혈기왕성했던 더 젊은 나이에 걸었다면 佳人 인생에 바뀌는 것은 무엇이고

변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도 궁금합니다.

 

그러나 지금 확실한 것은 우리가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여기 걸어갈 아름다운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이란 게 인류가 만든 대단한 유적만 보기 위해 떠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웅장하고 기이한 자연의 모습만 보기 위해 가는 것만은 아니지 싶습니다.

여기 까미노처럼 민초들이 수천 년간 대를 이어 살아가며 그들의 땀이 흠뻑 밴 질곡의 땅에 만들어진 길을

걷는 것은 어떻습니까?

 

다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단, 우리는 지금 길을 걷는 일에 몰두하고 즐길 뿐입니다.

인간은 때로는 이런 어리석고 무모한 시도를 하곤 하나 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부부에 있어서 영원히 잊히지 않을 하나의 추억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기에 마지막 상대를 마음속에 담아두기 위함일 겁니다.

얼마 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떠나면 남은 사람이 먼저 간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웬수로 기억하기보다 이런 길을 함께 걸었다는 아름다운 기억이 좋지 않겠어요?

 

이렇게 두 사람이 마주 보거나 같은 곳을 바라보며 길을 걸었던 기억은 분명히 잊히지 않고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지 않겠어요?

때로는 미워하고 또 사랑하며 살아온 기억과 함께 말입니다.

난 당신의 남편으로 당신과 함께 이 길을 걸었고 당신은 내 아내로 나와 함께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내 기억 속에 언제나 당신이 있고 당신 마음속에 영원히 내가 있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것은 상큼한 냄새요.

얼굴을 간지럽히는 것은 바람입니다.

발끝에 들리는 것은 그동안 이 길을 걸었던 많은 사람의 사연입니다.

걷는 도중 지천인 산딸기, 그리고 밤송이도 많습니다.

 

들판에 아무렇게나 피어나 누구 하나 관심조차 없는 들풀이 있고 거친 자갈길에 작은 오솔길도 만납니다.

무심히 흐르는 구름, 스치는 바람...

이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이게 바로 당신과 나만의 행복한 여행이 아닐까요?

 

까미노라는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라도 좋습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순례자가 되어 신앙의 힘으로 걸어갈 수 있어 좋습니다.

우리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도 그냥 느낌이 좋은 아름다운 길을 걸을 수 있어 좋습니다.

여기 까미노가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 사람과 함께 걸어도 좋고 부부 두 사람만 걸어도 좋습니다.

 

성자도 무신론자도 걸을 수 있고 부자도 가난한 자도 이곳에서는 차별하지 않습니다.

빨리 걸어도 좋고 천천히 걸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걷는 길마다 만날 수 있는 알베르게라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에 머물고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누가 만들었을까요?

길이란 바로 인간이 살아온 역사가 아닌가요?

 

길에서 길을 묻고 살아가는 지혜를 물어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바란 것은 무엇이고 원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내가 움켜진 것은 또 어떤 것입니까?

 

지금 이 길을 걸어가며 내게 가진 것이란 달랑 작은 배낭 하나뿐입니다.

지금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은 물 한 모금, 밥 한 그릇 그리고 오늘 피곤한 몸을 눕힐 수 있는

지붕이 있는 작은 공간뿐입니다. 

이렇게 1주일을 걷기도 하며 이번 스페인 여행을 46일간이나 하면서 필요한 것은

위의 사진에 보이는 이 작은 배낭 안에 든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면 집안에 살림살이가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정리라도 하다 보면 "이런 게 언제 있었지?" 하며 의문이 드는 물건도 있고

또 무엇에 사용하는지도 모르는 것도 있더군요.

 

우리 집의 살림 중 10년 이상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게 반이 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년간 사용하지 않은 게 또 나머지의 반도 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끼고 사는 집안의 물건은 대부분 그리 필요하지도 않은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게 바로 욕심이고 움켜쥐고 싶은 탐욕이 아니겠어요?

그러고 보니 佳人의 삶은 탐욕 덩어리였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며 세상에 움켜쥐고 살았던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 아무리 하찮고 작은 돌멩이라도 모두 내려놓고 가야 합니다.

솔이 누워버린 칫솔마저도 가져가지 못하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요?

 

어느 하나 영원히 가져갈 수 없고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가지고 싶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오늘도 욕심을 부립니다.

길을 걸을 때 짐이 가벼워야 편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 자꾸 채우려고만 합니다.

 

다른 동물은 한 끼 먹을 것과 둥지 외에는 욕심이 없고 갈무리하지 않지만, 사람만이 물건에 욕심을 부립니다.

지혜롭게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많이 움켜쥐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버리느냐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게 물질에 대한 욕심만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까미노 여행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도 하게 되네요.

삶도 여행처럼 채우는 게 아니라 얼마나 더 비우느냐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大廈千間(대하천간)이라도 夜臥八尺(야와팔척)이요,
良田萬頃(양전만경)이라도 日食二升(일식이승)이니라. 

대궐 같은 큰집이 천 간이나 되어도 밤에 몸뚱어리 눕힐 장소는 고작 여덟 척뿐이고

아무리 좋은 밭을 만 이랑을 가졌어도 하루에 먹을 양식은 겨우 두 되면 넉넉합니다.

 

공명이 유비 아들 후주 유선에 이르기를...

신의 집에는 뽕나무 8 백 그루와 거친 밭 50 두락이 있어 자손들의 의식을 해결할 수 있사옵니다.

신은 밖에 있어 필요한 것은 관에 의지하였으므로 달리 재산을 지닌 것은 없습니다.

신이 죽은 후에 따로 여유 있는 재산이 없으니 또한 폐하께 짐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佳人은 당장 내일 일도 알지 못하고 백 년을 계획하고

백 년도 살지 못하며 천 년을 꿈꾸고 있지는 않나 모르겠습니다.

사람 되기는 애시당초 틀렸다는 말이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