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에는 돈황, 남쪽에는 대족(北敦煌, 南大足)
북쪽에는 돈황, 남쪽에는 대족(北敦煌, 南大足)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곳 대족이 돈황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물론 규모는 작지만, 예술적인 표현이나 풍부한 내용은 돈황에 버금간다는 말일 겁니다.
책가방 크기와 공부와의 연관성을 이야기하지 않았나 싶네요.
지금은 예전의 채색 모습이 많이 퇴색되어 지저분한 모습이지만,
처음에는 정말 누구나 여기에만 서면 감동이 마구 몰려왔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냥 조각이 아니라 예술작품을 보고 있는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야외에 전시한 위대한 예술작품 말입니다.
佳人 혼자만의 생각이라고요?
모두 불교적인 것만 있다고요?
이렇게 신선이 용을 타고 유유자적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석벽이 생긴 모습 그대로를 이용해 구석까지도 빈틈을 두지 않고 조각했네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이곳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佳人의 능력이 부족하기에 모두 알 수는 없지만,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곳입니다.
설마 그냥 튀어나온 돌을 그대로 두기 뭣해 연습한 기분으로 만들었다고는 하지 않겠지요?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 석가열반성적도(釋迦涅槃聖迹圖), 부모은중경변상(父母恩重經變像),
대방변불보은경변상(大方便佛報恩經變相) 등은 예술작품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고 화려합니다.
이번에는 대방변불보은경변상(大方便佛報恩經變相)을 구경하렵니다.
제일 가운데 석가모니 반신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운뎃손가락이?
아니 아니 아니 돼 옵니다.
이것은 요즈음 서양 애들이 하는 욕이 아닙니까?
석가모니께서 설마?
천여 년 전 당시에 조각할 때 그런 내용을 몰랐으니 용서되겠네요.
아니면 이미 서양 사람에게 이것은 심한 욕이니 하지 말라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조각했을 겁니다.
아닌가요?
혼탁한 세상을 향한 포효인가요?
이곳 대방편불보은경변산(大方便佛報恩經變相)은 도교와 불교의 융합된 모습이라 합니다.
이 말은 석가모니의 효심을 표현한 석각군이라는 말이라네요.
바위를 파내고 그곳에 돌을 쪼아 석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석상에 칠을 해 예쁘게 장식했지만, 세월이 흐르며 오히려 더 지저분해지는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함부로 덧칠해서도 안 되는 일이잖아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두 남자는 어깨에 막대기를 메고 있는 모습이고 그 위에 글을 보면
관거(棺擧)라고 쓴 것으로 보입니다.
관을 든다는 말인가요?
높이가 7.3m이며 폭이 15.6m로 여기도 무척 큰 대작입니다.
깊이 또한 1.82m로 이 석감 안에 모두 68존의 조각상을 새겼답니다.
가운데에는 석가모니 반신상을 만들어 모셨네요.
그리고 석가모니 양쪽으로 12군의 석상을 만들어 모셨네요.
아래 보이는 막대기를 매고 양쪽 끝에 사람을 매단 저 모습은 무슨 일일까요?
사람의 죄를 무게로 달아보나요?
저렇게 사람의 죄를 판단할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청문회는 할 필요도 없이 바로 알 수 있잖아요.
그들은 불법을 수행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경건한 자세로 수행함으로 영혼의 안식을 얻은 그런 모습도 보여줍니다.
이곳에 만든 석각은 스스로 깨달아 성불하는 그런 부처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무척 많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냥 보기에 글일 뿐입니다.
처음에는 무척 화려했겠지만, 세월이 이곳도 색칠마저 하나씩 사라지게 하나 봅니다.
부근에 있는 석문산의 석각도 도교와 불교 양식이 함께 혼재해 있다고 하니 당시의 종교관은
그 경계가 모호했나 봅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모습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 병이란 무척 큰 의미로 다가왔나 봅니다.
우리 나이가 되면 저런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닌가요?
조지봉대사가 불교에 도교까지 섭렵하셔서 그랬을까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아가야 품위있는 자세의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관점에서 만든 것인가 봅니다.
부처님 부처님 우리 부처님~
그래도 손가락만큼은 아니 아니 아니 돼 옵니다~
가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뒤돌아 봅니다.
멀리서 보니 정말 아니 돼 옵니다.
가운뎃손가락이 더 선명히 보입니다.
이번에는 불법의 가르침 속에 나오는 이야기인 육창일원(六窓一猿)이라는 비유에 관한
조각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위의 사진 중 제일 위에 보이는 창문처럼 생긴 것을 보세요.
육창일원(六窓一猿)이라는 말은 여섯 개의 창문이 있는 방에 한 마리의 원숭이를 넣어 둔
이야기로 원숭이의 성격상 조금도 가만있지 않기에 이 방의 여섯 창문에서 차례로 얼굴을
내밀고는 숨고, 또 숨어 있다가는 다른 창문으로 뛰어가 얼굴을 내미는 동작을 되풀이합니다.
한 마디로 오두방정을 떠는 일이지요.
원숭이의 행동에 비유했지만, 이 말은 사실 인간의 마음이 침착하지 못해 생기는 행동을
원숭이에 비유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바로 佳人같은 어리석은 사람 말입니다.
한 마리의 원숭이란 인간의 마음을 말한 것이라면, 여섯 개의 창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기관을 가리키는 말이지 싶습니다.
여기에 말하는 여섯 가지 기관을 육근(六根)이라고 한다는군요.
그것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여섯 기관을 말한다고 하네요.
이 중에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은 신체의 외부에 갖추어진 감각기관이고
마지막 의(意)는 감각기관이 아니라 내면의 식별기관(사물을 판단하는 기관)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그런데 한 마리의 원숭이가 여섯 개의 창문에서 얼굴을 내민다는 것은 인간 마음의 번뇌가
여섯 기관에 차례차례 분출하는 모습을 의미한다고 봐야 하겠지요.
욕심이나 유혹에 빠지는 일 말입니다.
여섯 기관을 육근이라 말하는 것은 각각의 번뇌가 작용하는 데 근원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佳人처럼 무식하면 이렇게 혼자 생각만으로 여행합니다.
번뇌란 분노하는 마음이나 한없이 욕심을 부리는 마음,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마음, 자만하는 마음, 의심하는 마음 등등 번거로운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세상만사 모두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오늘은 아주 쉬운 이야기를 佳人의 능력이 부족해 어렵게 했나 봅니다.
이 또한 佳人의 마음이 어리석고 아직도 정리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개인의 능력이 부족하면 이렇게 엉뚱한 생각으로 여행하기도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佳人도 원숭이가 되어 여섯 개의 창을 돌아다니며 얼굴을 내밀고 다닙니다.
지금보다 좀 더 나은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게 모두 탐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은 다른 창을 통해 내다봅니다.
이렇게 살아 언제 성불하겠어요?
그쵸?
뭐 성직자라고 하는 사람도 그러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저기 정치판도 기웃거리고 돈 냄새에 취해 비틀거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