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석각예술의 보고, 대족석각.
불교에 대한 지식이 佳人에 전혀 없기에 이런 곳은 자세히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지만, 여기에 만든 모든 조각은 그 의미가 없이 만든 게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佳人은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내용을 알지 못하기에 본다고 마음에 느낄 수 없어서 주로 사진으로만 보여 드릴
생각인데 그러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아름다움과 의미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석각을 조각한 사람의 의도가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곳 보정산에 있는 석각은 무척 다양한 편입니다.
열반상에서부터 여러 가지 내용을 종합적으로 만들어 이곳을 찾는 사람의
입맛을 맞추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조각의 솜씨 또한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위의 사진은 왼쪽에 학 한 마리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피리를 연주하는 사내를 새겨놓았네요.
이런 조각의 의미는 정확히 모르지만, 목가적이며 아름답다는 생각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학이 아니고 오리면 또 어떻습니까?
여기 목우도(牧牛圖)라는 석각이 있습니다.
목우도를 이렇게 석벽에 만든 것은 이곳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이렇게 길을 따라 돌의 모습을 상황에 맞게 석각으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어디 종교적인 것만 만들었습니까?
민초의 삶도 그 안에 녹아있습니다.
바로 보정산 석각에 말입니다.
바로 보기 드문 생활밀착형 석각입니다.
목우도의 크기는 높이 5.7m이고 길이가 29.1m의 대형 돌에 소와 목동이
여러 개의 조각군을 이루고 있습니다.
목동은 수행한 사람이고 소는 민초로 그려 아마도 처음에는 길들지 않은 그런 모습이지만,
목동에 의해 차차 길들여 순종하게 되니 이게 바로 종교의 힘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의미로 말입니다.
종교의 위대함을 암묵적으로 그려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佳人의 생각은 "아니면 말고" 입니다.
목우도는 원래 송나라 때 유명한 시인 양걸(楊杰)이라는 사람이 지은 목우송을 바탕으로
했다하며 목동과 소와의 교류와 사랑을 10폭의 석각으로 이곳에 만들었습니다.
그냥 들판을 떠돌던 어리석은 소가 목동을 만나 교류하며 교화되는 과정을 노래했다네요.
그러나 "소는 목동에 의해 길들여지기보다는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게 더 자연의 이치가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佳人에게는 성불이란 어림도 없는 말이지요?
소의 모습에서 우리가 하나씩 변해가는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위의 석각은 소를 잡아끌어 순종하게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이렇게 아무리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짐승일지라도 사람의 잡아끄는 고삐에 따라
길들여 온순한 동물로 변해갈 수 있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의미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 길들여 지는게 바로 인간의 깨달음은 아닐까요?
여기에 모두 10여 개의 석각이 새겨져 있습니다.
목우도는 이 지방에 살던 민초에게 가장 쉽게 알게 하기 위한
토속적인 방법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이 지방 사람 누구나 소를 길들여 농사짓던 농부가 아니겠어요?
따라서 소를 바탕으로 하나씩 깨달음을 얻어가며 변화되는 모습을 그린 게 아닐까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땅에 떨어진 새끼줄 하나 집어 왔는데 소가 따라왔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기는 하더군요.
요즈음 잘 나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빠떼루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佳人 눈에는 썩은 새끼줄도 보이지 않는 겁니까?
그게 능력의 차이라고요?
위의 사진이 바로 줄을 잡고 있는 목동의 모습입니다.
이 사람도 남의 소를 끌고 온 게 아니고 단지 땅에 떨어진 새끼줄만 잡고 왔을까요?
노자는 가끔 소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더군요.
이는 힌두교에서 시바가 난디라는 소를 타고 다닌 모습과 오버랩되는 부분이죠.
위의 사진이 시바가 난디라는 소를 타고 그의 부인 파르바티와 함께
천하 주유하는 모습입니다.
위의 사진은 씨엠립 반티아이 스레이라는 사원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시바는 힌두교에서 슈퍼 갑이라지요?
소라는 의미는 옛날에는 농경사회로 농사를 짓기 위한 가장 소중한 동물이
소이기에 시바가 타고 다녔을 겁니다.
이렇게 이곳에 불교의 모습만이 아니고 노자나 공자의 모습도 보이는 것은 외래종교와
함께 아직 토착화되지 못한 시기에 만든 것이라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것도 佳人 혼자만의 엉뚱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목우도를 지나 아래로 내려갑니다.
이번에 보이는 것이 호법 12신상의 모습입니다.
호법신은 불교의 법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얼굴부터 험상궂게 생겼습니다.
법을 수호하기 위해 험상궂어야 한다는 것 또한 편견이 아닐까요?
사채업자라고 모두 그렇게 생기지는 않았을 것 아니겠어요?
호법신이 일렬로 서서 그 앞을 지나가는 관광객을 째려보고 있습니다.
죄가 많은 佳人이기에 앞을 지나려니까 공연히 위축되네요.
이래야 佳人 같은 민초가 겁을 먹나요?
요즈음 웃는 얼굴로 법을 수호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도 무서운 호법상 사이마다 부처상을 만들어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
높이가 4.3m이고 길이가 12.6m의 대형 조각상입니다.
깊이가 1.2m이며 여기에 새겨진 석각이 위와 아래에 모두 33존이 새겨졌네요.
상하 두 개 층으로 나누어 조각했는데 상층부 가운데에는 9존의 호법신상이 있습니다.
좌우로 6통 신상이 새겨져 있고 하층부에는 7존의 귀졸상을 새겨놓았습니다.
호법신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신이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민초보다 먼저 잡아가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사바세상에 찌들어 돈과 권력 그리고 향락을 즐기는 구도자 말입니다.
또한, 도장을 호위하는 일도 하고 괴수를 억누르는 일도 하니 무척 바쁜 존재이네요.
이렇게 두 발로 누르고 있으니 발밑을 받치고 있는 괴수는 얼마나 힘들겠어요.
너무 힘든 듯하여 조금 쉬게 해주자고 하고 싶지만, 佳人보고 "니가 해라!"고 할까 봐
그냥 미소만 짓고 옆으로 갑니다.
그 중 하나는 물이라도 떠 오나요?
호법신이 있는 상층으로 물동이를 들고 오르고 있네요.
이렇게 귀졸은 견마지로를 다하는 모습을 호법신에 보이면
특사를 받아 복권이라도 될까 봐요?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나쁜 죄를 지은 정치가라도
세월만 잠시 지나면 모두 복권되더만요.
참 좋은 나라입니다.
그다음에 있는 것이 거대한 육도윤회도(六道輪回圖)입니다.
그런데 육도윤회상을 들고 있는 무상대귀(無常大鬼)의 얼굴 모습이
마치 닌자 거북이에 등장하는 거북이로 보입니다.
佳人의 삐딱한 눈에는 말입니다.
이 석상은 무상대귀가 커다란 둥근 바퀴 모양의 판을 입에 물고 두 팔로 들고 있습니다.
저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높이가 7.8m이며 넓이가 4.8m라고 합니다.
깊이는 2.6m이고 이 안에 각인된 인물상이 90존이 있고 동물상이 24개가 있답니다.
무상대귀가 양팔을 벌리면서 육취윤(六趣輪 : 天, 人, 畜生, 地獄, 餓鬼, 修羅)의
육도윤회의 수레바퀴를 안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육도 중생들의 각자의 윤회과정을 정교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육취유심(六趣唯心), 인과 업보(因果業報), 십이인연(十二因緣)이라는
불교에서 말하는 교의를 형상화하는 것이라 하네요.
바퀴 모양의 원판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바세계의 고해라고 봐야 하겠지요?
원판 가운데 부처의 모습이고 그 가슴으로부터 여섯 갈래의 빛이 뻗어나옵니다.
이 여섯 개는 하늘, 인간, 축생, 지옥, 기아, 그리고 수라의 여섯 개의 길로
나뉜다는 그런 의미인가 봅니다.
그 여섯 갈래에는 다시 작은 구멍이 보입니다.
그 작은 구멍 안에 또 부처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둥근 원판 안에 생사고락과 삶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녹아 있을 겁니다.
이 의미는 만물의 시작은 심장에 있고 심장은 일체를 의미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심장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이 마음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 누구나 노력하고 착하게만 살아간다면 누구나 부처가 되고
나한이 되며 보살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여러분의 심장을 살며시 만져보세요.
쿵쾅쿵쾅~ 오늘도 우리가 시키지 않아도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심장은 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장으로부터 36.5도의 따뜻한 피가 우리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갑니다.
사랑의 온도는 36.5도입니다.
미움의 온도도 같은 36.5도입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심장으로부터 나오고 미워하는 마음도 심장으로부터 나옵니다.
사랑도 미움도 같은 곳에서 나오는 같은 온도입니다.
세상 모두가 같은데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랑도 되고 미움도 되는 게 아닐까요?
佳人은 36.5도 안에 사랑도 미움도 함께 지니고 살아가는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이중인격자인가 봅니다.
어쩌겠어요?
불쌍한 중생 佳人이 아니겠어요?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랍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오늘 이 육도윤회도를 보시고 모두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佳人은 어렸을 때 길거리에서 번데기가 걸린 뺑뺑이 돌리며 했던 찍기가 생각나는 겁니까?
왜!
이런 생각만 하는 佳人은 영원히 성불하기는 글렀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