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강언 복룡관과 이빙(李冰)
중국에서 왕이 아니면서 왕으로 불리는 사람이 몇 사람 있지요.
공자, 관우, 악비 그리고 오늘 우리가 구경하는 여기 도강언을 만든 이빙(李冰)이라고 합니다.
왕이라 불렸다고 모두 존경받을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의 면면을 살펴보면 과대 포장된 사람도 있고 정말 존경할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할만한 사람은 이렇게 우러러보아야 하지요?
공자는 그때까지 있는 자의 자식만 교육했던 것을 일반 민초까지 확대한 보편적 교육을 처음 시도하였으니
존경받을만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관우와 악비는 과대 포장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특히 관우는 돈독이 오른 백성이 만든 허구라는 생각입니다.
요즈음 중국이 역사공정을 하다 보니 시급히 정리해야 할 부분이 악비였을 겁니다.
지금까지는 중국인이 가장 존경한 한족의 자존심이라고 가르친 악비는 단지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볼 때
대단한 위인이지만, 금나라도 중국의 역사에 포함하려니 이제는 거추장스러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한족의 나라에서 오랑캐라고 불렀던 주변국의 역사까지 송두리째 먹으려니 악비의 존재는 아무래도...
악비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환장했을 겁니다.
역사 공정을 시도하려는 자들을 모두 요절내려고 했을 겁니다.
그게 이민족의 역사지 왜 중국이고 중국역사냐고요.
만리장성 바깥의 일은 중국의 이야기가 아니라고요.
그럼 관우는 어떨까요?
악비와 같은 맥락으로 보면 이 또한 정리대상이 아닐까요?
지금은 아니라고 하지만...
관우는 공연히 재물과 연관해 민초 스스로 만든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풍선껌 같은 존재 말입니다.
그러나 이곳 도강언의 주인공인 이빙 부자는 중국인에게만이 아니라 정말 누구에게나 칭송받을
위대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강언을 돌아보며 그 과학적인 방법에 "정말 존경받을만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빙으로 말미암아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생각 자체도 바뀔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우공이산이라는 말을 헛된 망상이라 생각했지만,
여기를 와보니 정말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게 하루 이틀 공사로 끝날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게다가 수천 명만으로 끝날 일은 더더욱 아니지요.
그러다 보니 결국, 완성은 이빙의 아들 이이랑(李二郎)에 와서야 겨우 그 끝을 볼 수 있었다네요.
포크레인도 없이 사람의 손으로만 하는 삽질이었기에 공기는 무척 길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시도한 시기가 기원전이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나라 광서 때인 1899년에 이퇴(離堆)라고 쓴 석비입니다.
글씨가 아주 힘이 있어 보입니다.
이퇴란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을 일컫는 말이지요.
그러니 예전에 바로 강이 흐르는 건너편 옥루산의 끝자락이었지만, 그 사이를 뚫고 수로를 만들며
잘려나가고 남은 곳입니다.
이퇴라는 말 자체가 떨어져 나간 언덕이라는 말이 아닐까요?
이제 이빙의 기념관 같은 역할을 하는 복룡관(伏龍觀)을 구경합니다.
아마도 어디 엎어진 용 한 마리가 있나 봅니다.
앗! 추녀 밑에 매달린 웃고 있는 용이 보이고 새끼용까지 합이 두 마리입니다.
옛날에는 이곳을 범현관(范贤馆)이라 불렀나 봅니다.
이 건물은 서진(西晉) 말에 지었다 하며 북송 시대에 이빙 부자의 위대한 치수사업을 설명하기 위해 복룡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안에 이빙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했다고 하네요.
청동으로 만든 솥으로 그 표면에 용이 새겨졌기에 비룡철정(飞龙铁鼎)이라고 부르는 발이 셋 달린 솥입니다.
명나라 때 만든 솥으로 청나라 함풍 연간인 1831년 청성산 상황관에서 출토된 것이라 합니다.
둘레기 0.74m, 높이 1.60m 무게가 500kg이니 되는 대단히 큰 청동 솥입니다.
용도는?
그냥 권위를 보여주는 장식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언공석상(堰工石像)입니다.
삼국지의 이야기가 막 시작되는 동한 말기의 석각으로 1975년 1월 18일에 어취 부근의
외강 바닥에서 출토된 석상입니다.
비록 머리가 사라졌으나 삼신석인(三神石人) 가운데 하나로 밝혀졌답니다.
높이 1.85m, 무게 2톤인 이름 없는 언공(堰工)입니다.
삼신석인(三神石人)의 다른 두 사람은 이빙의 석상과 이빙의 아들인 이이랑을 일컫는 말이지요.
당시에 공사 도구로 사용된 삽을 들고 있습니다.
기원전에 저 삽으로 열심히 삽질했다는 위대한 삽입니다.
이빙 석상입니다.
동한 건녕 원년인 168년에 만든 석각으로 1974년 어취 부근에서 발견된 석상입니다.
양 옷소매에 "故촉군수 이빙, 건녕 원년 윤달 25일 만듦, 석인진수는 만세에 이어질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졌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소매자락에 글이 보이실 겁니다.
이빙의 석상이 발견됨으로 도강언의 역사와 한나라의 석각 예술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합니다.
정말 대단한 발굴이지만, 조금 의심도 갑니다.
조조가 동작대를 지을 때 그 인근을 지나다 땅바닥에서 번쩍거리는 느낌이 들어 병사에게 파보라 하니
황금으로 만든 동작새가 나왔다고 그곳에 동작대를 비롯한 삼대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조조를 보고 중국인을 평가하면 안 되겠지만...
왼쪽부터 석각수당(石刻水塘), 석마(石馬) 그리고 석용(石俑)입니다.
1984년 동한말기 묘에서 출토된 동한 시기의 석각입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워낙 사람이 많았기에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일찍이 시작했습니다.
업성유지가 있는 임장현에서 우리는 서문표라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황하의 범람으로 그때 만든 수리시설이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여기도 그와 같은 사람이 있어 그 작품을 여태 사용하고 있다 합니다.
위대한 인간승리라고 하고 싶습니다.
서문표의 업적도 여기에 뒤지지 않지만, 터가 나빠 모두 홍수에 사라지고 말아 안타깝습니다.
복룡관 앞에 놀라운 나무가 전시되어 여기 사진으로 보여 드립니다.
상목(商木)이라는 나무입니다.
그러니 이 나무가 상나라 때 나무라는 말이네요.
상나라라고 하면 환장하게도 달기와 함께 불살라진 나라가 아니겠어요?
3.000여 년이나 된 나무라는 말이네요.
중국이란 나라는 유물뿐 아니라 나무까지도 이렇게 오래된 게 발견되는 나라인가 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중국에서는 지금까지 많은 인간의 역사가 남아있는 나라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바로 만리장성의 축조일 겁니다.
그러나 지금의 만리장성은 순전히 관광용이지 그 목적에 사용하는 것을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 도강언의 수리시설은 아직까지 인간을 이롭게 하고 지금도 처음 목적대로 사용하는 삽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