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가맹관이었던 소화고성

佳人 2013. 6. 15. 08:00

이제 패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패방은 만든 지 오래되지 않아 보입니다.

여기도 문화대혁명의 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합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란 문화말살 대혁명인가요?

 

왜 옛날은 무조건 타파 대상이 되었을까요?

새로운 질서를 위해 그랬나요?

사실 버려야 할 것은 자신들의 일방적이고 편협한 편견이 아닌가요?

사상이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어리석고 맹목적인 사람으로 만드나 봅니다.

소화고성은 그때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유명한 곳이라 합니다.

 

佳人은 이런 성문을 통과할 때는 늘 설렙니다.

왜?

성문 안에 어떤 세상이 있을까 궁금하니까요.

 

사실 들어가면 뻔한 곳이지만, 늘 문밖에서 안을 상상할 때는 공연히 설레지요.

인간은 이렇게 늘 껍질 속의 모습을 혼자만의 상상을 하며 궁금해 합니다.

그 껍질을 깨기 위해 여행을 떠나나 봅니다.

 

나만의 편견도 껍질이요,

그곳의 사실적인 풍경도 문을 통과해야만 볼 수 있잖아요.

삶에 정답이 없듯이 여행에도 정답이 없지 싶습니다.

그냥 나만의 방법으로 즐기며 구경하면 되는 게 바로 여행이 아닐까요?

 

여행이란 늘 우리가 사는 곳의 모습과 다르기에 그곳을 찾아가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 이런 성문을 통과할 때마다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고 두근거립니다.

여행이란 이렇게 궁금증에서 시작하나 봅니다.

 

그리고 우리와 다른 모습을 찾았을 때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잖아요.

또 같은 모습에도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와 다른 모습에 당황하고 불편해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참 여행자가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겠어요?

 

여행이란 그냥 그곳의 모습을 내가 보고 싶은 방법대로 보고 느끼면 되지 않겠어요?

어느 사람은 어떻게 봐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편견입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에 남의 생각마저 자신의 틀에 넣으면 안 되는 일이 아닐까요?

 

이곳에 남아있던 옛 모습과 보관 중이던 옛날의 자료는 문화혁명 당시 모두 부서지고

불타버렸다고 하니 중국 근대사에 가장 아픈 일이 바로 문화대혁명이라는 문화 대말살 운동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느데 과연 시간이 지나 이들이 했던 일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다면 부관참시가 아니라 자손 대대로 욕먹을 집안이 많을 겁니다.

 

패방 안으로 들어오니 문이 하나 보입니다.

이 문은 소화고성의 정문 역할을 하는 동문인 첨봉문입니다.

이 문이 세워진 시기는 명나라 때라 합니다.

 

역시 명나라는 성벽 쌓기의 지존이라 아니할 수 없네요.

아마도 명나라 시기는 천하가 공사판이었을 겁니다.

만리장성부터 천하를 안과 밖으로 갈라놓으려고 곳곳에 성벽을 쌓았나 봅니다.

어디 다른 세상과만 벽을 쌓았나요?

이렇게 마을마다 안팎을 구분하며 또 성벽을 쌓았네요.

 

물론, 그전에도 문은 있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돌로 된 성을 쌓고

문을 튼튼하게 만든 시기가 바로 명나라 때라는 말이겠지요.

그랬기에 지금 제법 옛 모습을 간직한 마을이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비무환의 생각이었을까요?

오늘 여기도 개판인가 봅니다.

 

명나라가 성벽을 높고 튼튼하게 친 그 이유가 아마도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오랑캐라고

깔보며 살았던 흉노족에게 중원의 황제가 포로로 잡혔기 때문이 아닐까요?

젠장... 대국이라는 자부심이 하루아침에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산 표에는 첨봉문 성루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 수리 중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막아놓았는데 첨봉문이라는 이름은 봉황을 쳐다볼 수 있다는 의미로 쳐다볼 첨(瞻)을 써

첨봉문(瞻鳳門)이라 했나 봅니다.

높지도 않은 성벽에 올라야만 보이겠어요?

아래에서 바라보니 정말 봉황은 보이지 않네요.

 

전설에 따르면 성루에 올라 맞은편 봉령산을 바라보면, 봉황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여 정말, 봉황이 있나 올라가 확인하려 했지만, 감추고 싶었나요?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놓았습니다.

그냥 성벽 너머로 봉령산만 바라봅니다.

봉황은 쥐뿔이나~

벽오동 심은 뜻도 봉황을 보자고 했나요?

 

성문 안으로 들어서니 왼편으로 제일 먼저 보이는 건물이 이심원(怡心園)이라는 건물입니다.

청나라 때 지은 건물로 중국 남북 건축의 모양을 모두 갖춘 그런 건물인 모양입니다.

복도는 마치 배(船)처럼 만들었으며 천장은 그윽하고 고요하다고 하며 그 안에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즐거워지고 분위기도 좋아진다, "고 합니다만...

 

그래서 이 집을 즐거운 마음이라는 이심원이라 지었다 합니다.

무슨 마약한 것도 아니고 그 안에만 있으면 마음이 즐겁고 안정된다고 하니

정말 신기한 일이군요.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려면 따로 돈을 내야 한다는군요.

우쒸~, 그럼 통표는 왜 팔았답니까?

 

중국 여행 중 제일 억울한 게 두루 구경할 수 있다는 통표를 사서 들어갔는데

또 따로 돈을 더 내라고 할 때입니다.

이심원은 저절로 마음이 즐거워지고 분위기도 좋아진다고요?

마음만 얹잖아 그냥 지나칩니다.

 

마을을 구경하는 데는 무료입니다.

그러나 고성 안을 돌아다니며 들어갈 수 있는 통표를 팔았거든요.

중국이라는 나라는 이렇게 자꾸 따로 웃돈 받기를 좋아하더군요.

그러면 모두 따로따로 받던가 아니면 통표로 모두 돌아볼 수 있게 하던가...

 

원래 여기는 청두에서 북으로 올라가는 관문이 있었든 곳으로

삼국지가 한창이었든 시기에는 이름이 가맹관이라고 했지만,

이곳에 사람이 많이 모여 살며 소화고성이라고 바꾸지 않았나 생각되네요.

왜 이름을 바꾸었을까요?

 

그냥 가맹고성이라 하면 안 될까요? 

소화고성보다는 가맹관이라는 이름이 더 예쁘지 않나요?

소화라는 이름은 970년 북송 시기에 태조인 조광윤(趙匡胤)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역시 그랬습니다.

강한 자가 바꾸라 했나 봅니다.

그러니 갑 중의 슈퍼 갑이라는 甲님 말입니다.

 

그러니 이름이 바뀐 게 벌써 1.000년도 더 넘은 오래된 곳입니다.

그래도 여태 가맹이라는 글을 새겨놓은 이유는 아직도 삼국지에 나왔던

지명을 잊지 못하고 있나 봅니다.

 가맹관이라는 명칭은 관문의 의미가 강해 그랬나요?

 

좌우지간 여기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마을인 셈입니다.

처음 가맹관을 구경하고 싶어 이 지명을 찾았으나 찾지 못해 무척 서운했는데

소화고성이 가맹관이라고 해 즐거운 마음으로 구경하렵니다.

 

삼국지를 읽을 때 가맹관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왜?
만 명의 적을 혼자서도 너끈히 감당한다고 해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고 하는

시커먼스 장수 장비와 훗날 촉한의 오호상장(五虎上將)에 이름을 올리는 마초가

역사에 남을 대결을 펼친 장소가 바로 여기가 아니겠어요?

그들이 사생결단을 했다는 장소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죠.

 

지금의 소화고성은 작은 관광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삼국지의 이야기 속에서는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가맹관이 됩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아주 오랜 고성인 셈입니다.

2.2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파촉 제일현이라고 부릅니다.

파촉 제일현이라는 의미는 촉한의 시작을 이곳에서 현실로 다져갔기 때문일 겁니다.

위의 사진 속 대문의 문지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밟고 건너 다녔는지 U자 모양으로 닳았습니다.

 

그래도 아직 가맹이라는 한자가 남아있는 곳이지요.

이런 역사가 오래된 고성을 걸으면 걷는 것만으로도 그냥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런 곳은 삶의 애환이 가득한 곳이 아니겠어요?

바로 우리 이웃의 정겨운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 소화고성을...

아니, 가맹관을 파촉제일현(巴蜀第一縣), 또는 촉국제이도(蜀國第二都)로 부른다 하네요.

이 말은 촉한에서는 이곳 가맹관이 가장 유명한 현이고 촉나라에서 황궁이 있었던

청두 다음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마을이라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면, 여기 가맹관에 제일 유명한 볼거리가 여섯 개가 있다는 말이고

그 하나하나를 모두 다니며 사진으로 찍으며 구경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삼국지를 좋아하는 사람에는 유명한 곳이기에 흥분된 마음으로 돌아다니지만, 

삼국지라는 소설에 흥미없는 사람에는 그냥 중국에서 흔히 만나보는 작은 고성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통표를 끊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다니는 佳人은 즐거워하지만, 울 마눌님은

통표도 끊지 않고 그냥 고성만 다닙니다.

이렇게 부부간이라도 같은 곳을 가더라도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 게 다릅니다.

그렇다고 왜 통표를 끊어 들어가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일은 어리석은 사람의 바보같은 일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추녀 끝에 걸린 풍경은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아름다운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야만 맑은 소리를 냅니다.

인생에 있어서 무사평온하다면, 삶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합니다.

힘들고 여려운 일이 있기에 비로서 인생의 참맛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여행지로 직접 뛰어들어 골목마다 기웃거리며 구경하다 보면

여행의 참맛을 느끼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