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와 마초의 싸움터 임청문
소설 삼국지연의에 보면 유비가 촉한을 건설하며 가맹관이라는 이야기가 무척 많이 나옵니다.
가맹이라는 명칭은 지금의 소화고성의 옛 이름이죠.
처음 진나라 때 가맹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고 촉한의 선주 유비가 한수(漢壽)라는
이름과 같이 쓰던 이곳을 가맹이라고 완전히 바꾸었답니다.
그러니 유비 마음이라는 말이 아니겠어요?
왜?
이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완벽히 제거하고 안방마님 행세를 하는 중이니까요.
어디서?
바로 여기 가맹관에서 말입니다.
짚신이나 팔러 다녔던 유비가 이제 팔자 고쳤습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집은 아주 오래된 듯합니다.
저기 대문의 문설주에 기대서면 옛날이야기가 들릴 것 같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이 저 문을 드나들며 살았을 겁니다.
저런 모습을 보면 정겹고 그냥 우두커니 바라보고 귀 기울여보고 싶기도 합니다.
아마도 佳人이 미쳤나 봐요.
왜?
중국말도 모르며 귀 기울이다고 하니까요.
잠시 성 밖 외곽지역인 동쪽 길을 따라 걷습니다.
아무 이유 없습니다.
그냥 걷고 싶어 걷는 겁니다.
동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봉령산이 있어 자연히 가맹성의 외곽 방어가 이루어진
곳으로 이런 지형이기에 여기 가맹관이 오래전부터 성을 쌓아 사람이 모여 살게 되었나 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된 토성이 보입니다.
물론 사진처럼 그냥 방치되어 있습니다.
이곳의 토성은 놀랍게도 한나라 때 만든 것이라고 하네요.
믿기도 그렇지만, 여기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한나라 때라면 유 서방의 세상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저 토성이 2천 년도 넘게 저렇게 버티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토성이 아주 오래된 토성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가 있는 토성을 보호한다고 막대기 몇 개로 막아놓은 모습이
안쓰럽게 보이는데 지금은 오래되어 佳人의 장풍에도 무너질 것 같지만,
그때는 이게 마을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을 겁니다.
전국시대 진(秦) 나라가 역사상 처음으로 촉을 영토로 편입시킨 후
진시황이 이 지역을 가맹현으로 바꾸었답니다.
이게 파촉제일현으로 불리는 이유일 겁니다.
이 말은 파촉에서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는 말이 아니겠어요?
지금은 대부분 무너지고 사라졌지만, 이렇게 그 형태는 여기저기 아직 남아있습니다.
과연 한나라 때 정말 만든 것일까에 대해 의심이 가지만.
이곳에는 그때에 만든 토성이라고 안내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역사적인 유물로 보호하지만,
그전에는 그냥 내버려 두었을 것 아니겠어요?
돌로 쌓은 성벽도 아니고 흙으로 쌓은 토성이 2천 년 이상 버틴다는 게...
당시 중국의 최첨단 하이테크 공법으로 만들었다면
앞으로도 2천 년 정도는 더 버틸 것 같네요.
그 토성이 있는 곳에는 커다란 광장 하나가 있네요.
한수단(漢壽檀)이라고 부르는 광장입니다.
광장 바닥에는 촉한의 강성한 시기의 지도를 만들어 놓았네요.
한수단이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여기서 매년 소화고성의 주민이 모여 조상에게 제를 올리는 장소라 합니다.
조상이라 하면 바로 유 서방이 세운 한나라를 말하는 게 아닐까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서쪽으로 걷습니다.
용문서원이라는 건물이 보입니다.
소화 한성박물관을 겸하고 있네요.
원래 청나라 건륭 때 만든 서원으로 등용문에서 이름을 빌려 왔나 봅니다.
매기도, 붕어도 잉어도 모두 용이 될 수 있는 문이 바로 여기인가 봅니다.
그럼 피라미나 미꾸라지는 어쩌라고요?
세상에 아무나 용이 되는 나라가 중국이라 하지만, 사실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된 사람도 무척 많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도 입장료를 따로 받습니다.
그럼 당연히 안 들어가지요.
통표라고 팔았으면 고성 안의 모든 시설은 들어가야 하지 싶은데...
용문서원을 지나 좀 더 서쪽으로 걷다 보면 문이 하나 보입니다.
이 문이 바로 임청문이라는 유명한 문입니다.
임청문은 소화고성의 서문에 해당합니다.
우선 임청문 성루 위로 올라가 봅니다.
여기 올라가려면 통표가 있어야 합니다.
정말 중국은 장사 하나만큼은 잘합니다.
고성에 당연히 있는 성벽을 올라가는데 따로 돈을 받으니까요.
그런데 사람은 이상하게도 이런 곳에 오면 올라가고 싶은 걸요.
앞에 보이는 대포는 홍이대포라고 부르는 대포입니다.
물론 삼국지가 한창 진행될 때 이런 대포 하나만 있어도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을
것이며 관우가 아무리 청룡언월도를 폼 나게 휘둘러도 이 대포 한 방이면 끝나잖아요.
성벽을 따라 걸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벽 위는 그리 길지도 넓지 못하군요.
한나라 깃발...
촉나라 깃발이 아직도 휘날리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때의 한을 품고 있단 말입니까?
그때가 그리웠나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겁니까?
성문 위의 누각 안에 이런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그때의 모습인가요?
장비와 마초가 여기에서 수백 합을 다투던 그때 말입니다.
그때 모습으로 보이네요.
그런데 과연 옛날 그때의 전투에 이렇게 일기토로 싸울 수 있었을까요?
모략과 속이는 전쟁통에 대군이 양쪽에 지켜보는 가운데 장수 두 사람이 각각 출전해
운동회에서나 보는 듯한 모습으로 정정당당하게 겨루다니..
기적과도 같은 일이 여기서 벌어집니다.
임청문 성루에 올라 성 밖의 광장을 내다봅니다.
바로 이 마당이 삼국지연의에서 말한 "가맹장비전마초(葭萌張飛戰馬超)"라는 고사에 나온
그곳으로 멀리 가릉강이 보이고 말입니다.
그때 유비가 낙성을 함락하고 면죽까지 차지하고 익주까지 위협하자 유장은 한중의 장로에게
서천 일부를 주겠다는 조건으로 유비의 뒤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에 장로는 마초에 2만의 병사를 주어 가맹관을 공격하게 하니 장비와 낮에 20여 합을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자 마초의 제안에 따라 야간전투에 돌입했다지요?
이를 야전마초라고 한다는군요.
싸움이 인생의 목표이며 행복인 사람의 이야기인가 봅니다.
물도 마시고 밥도 먹고 다시 싸우기로 했나 봅니다.
임청문을 다른 말로 가맹관문이라 부릅니다.
명나라 때 새롭게 완전히 복원해 지금에 이르렀다 합니다.
임청문은 소화고성의 육대경관 중 하나라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가장 인상에 남는 그런 곳이라 생각합니다.
임청(臨淸)이란 "관리는 맑아야 하며 그래야 민초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정해놓았겠지만, 사실은 당시의 관리 대부분은 부정, 부패, 혼탁, 뇌물...
얼마나 민초를 더 쥐어짜야 유능한가였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이란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청문회만 앉히면 모두 죽일 놈뿐이더군요.
좌우지간 관리가 아니더라도 뉴스거리 제공하는 인간군상도
모두 그 이면은 추악하고 더러운 모양입니다.
그런데 佳人이야 오죽하겠어요. 그쵸?
임청(臨淸)이란 이런 글을 쓰는 자체가 관리는 깨끗하지 않다는 말이잖아요.
유비가 촉 정벌에 나섰을 때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유장이 한중의 장로에게 원군을 요청했지요.
유비와 장로가 촉의 지배권을 놓고 한바탕 전투를 벌인 곳이 가맹관이었고 이 전투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전설로 남게 한 인물이 바로 장비와 마초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그때 두 장수가 싸우던 곳에 오늘 두 사람이 싸우나 봅니다.
남자와 여자군요?
지금 佳人이 사진을 찍고 있는 이 자리는 그때 공명과 유비가 장비와 마초의 싸움을
내려다보던 곳으로 장비와 마초는 3일 밤낮을 겨뤘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결국
제갈량의 반간계(反間計)에 넘어간 마초가 항복을 하면서 촉군의 승리로 끝났다고 하지요?
위의 사진에 보이는 소화고성의 서문인 임청문(臨淸門) 앞 광장이 당시 장비와 마초가
일기토(一騎討)를 벌였던 장소입니다.
잠시 그때로 돌아가 볼까요?
드디어 마초가 가맹관으로 군사를 이끌고 오고 면죽관에 있던 유비는
장비와 군사를 끌고 가맹관으로 나섭니다.
여기서 일전불사를 하려나 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삼국지에서 몇 안 되는 멋진 장면으로 기억합니다.
용호상박이라는 전투였던 마초와 장비의 싸움이 바로 이곳에서 벌어진 겁니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고, 사실 마초의 아비인 마등은 조조를
척살하자고 유비와 의견이 일치하여 혈판장에 혈서를 쓰며 뜻을 같이한 사이가 아니겠어요?
애초 그런 사이였기에 서로 적으로 만난다는 일은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마초 정도 되는 명장은 장로와 같은 인물 아래에서 살아서는 안 되죠.
호랑이가 개의 품에서 살아갈 수 있겠어요?
적어도 유비 아래는 되어야 체면이 서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 사이라 서로의 결투는 마음이 두근거리게 하는 가맹관 더비라 불러도 무방할 겁니다.
구름을 부르고 바람을 일으키는 그야말로 용이 솟구치고 호랑이가 날뛰는
그런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양쪽의 군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의 싸움은 쉽게 결판이 나지 않습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전승파(戰勝壩)라는 돌덩어리가 그때 두 사람이 싸웠던 곳을 입증한다고
만든 덩어리이지 싶은데 있지도 않았던 소설 속의 이야기를 사실인 양 이렇게 돌덩어리로
표지석까지 만든 사람의 배포는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마오쩌둥이 거짓말을 천 번이나 하면 사실처럼 된다고 해서 그랬을까요?
이게 라운드 별로 싸워야 합니다.
하프타임만 주면 너무 지치니 중간에 라운드를 두어 물도 마시고 간식도 먹고
때로는 술도 한 잔 걸치고...
물론 스폰서를 위한 광고방송도 내보내며 말입니다.
술 한 잔에 돼지비계 한 점 먹으면 장비가 싸움에서 조금 유리하고..
중간에 목도 축이고 잠시 땀도 닦고 지친 말도 바꿔 타며 말입니다.
라운드걸이라도 있다면 비키니 차림으로 올라와 엉덩이를 실쭉샐쭉 흔들며 지금
여기 광장 한 바퀴 돌며 알려주겠지만, 덜수는 두 영웅의 싸움보다 중간중간 뜨는
라운드걸에 눈이 풀어지고 가슴이 콩닥거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합니다.
중국의 이야기처럼 아침부터 시작한 두 사람의 싸움은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결판이 나지 않습니다.
유비는 북을 쳐 장비를 불러들이려 하고 내일 다시 싸울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마초는 야간전투도 준비했다 합니다.
평생을 오늘을 위해 산 사내처럼 마초는 야간에도 싸우자 합니다.
그 말에 장비도 질 수는 없잖아요.
"커이!!!" 라며 좋다는군요.
징그러운 자슥들...
이때부터 야간경기가 시작되었나 봅니다.
이 사람들은 서로 싸우는 일을 오락하듯 즐겼나 봅니다.
이러기를 사흘 밤낮...
마초는 부하에게 횃불과 화톳불을 준비하게 하고 그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위에 보이는 가맹관의 앞마당이 아니겠어요?
마초는 싸움의 달인이었나 봅니다.
아무리 싸움이 좋다 하더라도 야간경기까지 준비하며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야구도 비 때문에 순연되면 더블헤더로 열리지만, 투수는 두 번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 유비가 나서 중재함으로 야간경기는 몇 라운드 진행되다 내일을 기약합니다.
여기서 유비는 마초에 반하게 됩니다.
사내란 이성 간에 빠지는 경우와는 다르게 사내끼리도 이렇게 빠질 수 있습니다.
이에 공명은 유비에게 한중의 장로를 한녕왕에 봉한다는 조건으로 마초를 거두어들이라 하니
마초가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장로와 마초 사이가 벌어지며 공명이 생각한 대로
마초는 유비에 귀순하게 되며 해피엔드로 끝을 냅니다.
마초는 그 집안이 무장의 집안입니다.
서량 출신의 용맹한 무장 말입니다.
대대로 한나라 황실을 섬긴...
그의 조상인 마원장군의 동상이 계림에 가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이미 佳人의 여행기를 읽으신 분은 구면인 셈이지요.
그런 마초가 유비를 만난 후 동생 마대에게 한 말이 있지요.
오늘 두 형제의 이야기를 살짝 귀동냥할까요?
"마대야!"
"네~ 형님~"
"난 말이야~ 지금 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을 본 것 같아...
지금 유비를 만나보니 정말 참된 주군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형 니임! 왜 또 그러세요?
뽕 하셨수?"
"아니란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그냥 남을 위해 거짓으로 산 것 같아~
유비를 만나 보니 이제 내 삶을 찾은 것 같구나.
이제부터 정말 인간으로서 보람되게 살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여러분~ 마초가 약간 맛이 간 것 같습니다.
마초가 왜 그랬을까요?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기로 한 마초가 정신이 이상해진 모양입니다.
어디 마초 눈에 한 줄기 빛만 보았겠어요?
왜? 쌍무지개 뜨는 장면이 3D로 보였을 텐데...
우리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작가는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게 된 마초를 통해 유비를 신격화하고 우상으로 만듭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말입니다.
한 줄기 빛 운운하며 마초는 개의 품을 박차고 나와 유비의 품으로 갔다고 했나요?
달리는 도중에 말을 갈아탄 마초를 통해서 말입니다.
이 얼마나 편파적인 이야기입니까?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유비는 더는 피를 보지 않았고 게다가 유능하고 용맹한 장수 하나를 다 얻었으니 행복
두 배로 처음 촉의 땅으로 명분 있게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주둔한 곳이 면양의 부락산과
이곳 가맹관이고 이곳에서 한중의 장로와 전투를 끝낸 곳이기에 아마도 유비에게는
영원히 마음에 남아있는 곳일 겁니다.
그러니 이 마을은 유비에게는 행복이 시작되는 그런 곳인 셈입니다.
용맹한 장수 하나가 아니라 동생 마대까지 얻었으니 1타 쌍피인 셈이지요.
마대는 공명이 죽고 난 후 한중 고호두교에서 역심을 품었던 위연을 단칼에 척살한 그 마대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