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위와 경후사
오늘은 영웅들이 싸움터를 벗어나 잠시 한가한 곳을 구경하려고 합니다.
이제 임청문 광장과 성루 구경을 마치고 잠시 성 밖 구경을 합니다.
임청문을 나서 조금 더 외곽으로 나가니 경후사라는 건물이 보입니다.
경후사는 촉한의 대장군이었던 비위의 사당이라 합니다.
비위는 제갈량이 죽은 후 이곳 가맹관에 승상부를 설치합니다.
그만큼 이곳 가맹관이 촉한에는 대단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아닌가요?
후주 유선을 보면 속이 뒤집혀 멀리 여기다 승상부를 설치하고 따로 있었을까요?
유비가 촉으로 처음 군사를 이끌고 들어올 때 공명이나 방통은 속전속결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유비는 군자인 척 민심부터 다독이느라 시간 끌기에 들어간 곳이 바로 여기 가맹관이라 합니다.
폼은 유비 혼자 다 잡고 결국, 방통이 죽음으로 유비에 구실을 만들어 주었고 결국, 유비는 방통이 죽음을 발판삼아
익주를 낼름 삼켰지요.
뭐.. 원래 급히 먹은 밥이 체할 수는 있지요.
그때부터 가맹관은 유비 일행에게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나 봅니다.
민심을 잡고 군사를 훈련하고 속으로 서천을 모두 삼길 음흉한 작당을 했던 곳이 바로 이 마을일 겁니다.
경후사는 언제 처음 세운 것인지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합니다.
왜 없었겠어요?
모두 사라졌을 뿐이랍니다.
그러나 부서진 때는 정확히 안다 하네요.
바로 홍위병이 설치던 문화대혁명시기에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08년에 다시 옛 모습대로 지었다네요.
그렇다고 어디 옛 모습 그대로겠어요?
명나라 시기에는 사당의 규모가 무척 컸다고 합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신도(神道)가 있었고 패방, 비정, 초당 등의 건축물이 있었다네요.
삼국지 정사에는 비의(費禕)로 기록되었는데 나관중은 이 사람의 이름을 비위(費偉)로 썼다 합니다.
이는 나관중이 ‘의(禕)’를 ‘위(偉)’로 잘못 보아 사람 이름마저 바꿔버렸나 봅니다.
의면 어떻고 위면 또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올 것도 아니고...
공명이 죽고 난 후의 삼국지연의는 재미가 반감되어 흥미를 잃었는데요. 뭘~
원래 한자는 쉬운 글이 아니기에 국어로 사용하는 중국사람도 어려워하긴 할 겁니다.
경후사 안에는 비위의 무덤이 있습니다.
무덤 반대편에는 제갈량이 출사표에 쓴 지려충순(志慮忠純)이라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이 말은 "마음이 충성스럽고 참되다." 라는 의미라 합니다.
비위를 칭송하기 위해 출사표에서 글을 따온 모양입니다.
다른 영웅에 묻혀 비위의 이야기는 그리 많은 사람에 사랑받지 못했지만, 비위도 대단한 인물이었던 모양입니다.
심모탁식(深謀卓識)이라 했나요?
佳人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니랍니다.
여기는 비의의 묘니까 비의를 두고 하는 말이지 싶습니다.
청 옹정 13년 과친왕이 이곳을 지나며 비위를 생각하며 남긴 글이라고 합니다.
그의 죽음 또한 특이했다네요.
정월 초하루에 대연회가 개최되었는데, 위나라에서 거짓 항복한 곽순이란 자가 그 자리에 나타나 비의가
만취했을 때, 곽순이 칼을 찔러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습니다.
자나깨나 불조심, 투항한 자도 다시 보자~
너무 잘났기에 위에서 거짓 항복한 곽순이 비위가 술에 취했을 때 칼로 찔러 죽입니다.
佳人처럼 못나면 누가 죽이겠어요?
아직 佳人을 죽이겠다는 사람 보지 못했어요.
사람도 너무 똑똑하면 제명에 가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정말 무식해서 행복해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곳에 와 비의 사당을 돌아보며 무식한 佳人이 행복함을 느껴봄니다.
무식해서 행복하다는 일...
느낄 수 있다면 그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닐까요?
그래요. 어디 세상은 100점짜리 완벽한 사람만 살아가나요?
세상은 이렇게 부족한 60점짜리 佳人도 함께 살아갑니다.
살아가며 채워가는 즐거움...
佳人 같은 부족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이랍니다.
비위가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평소 해학을 좋아하고 비웃기를 즐겼던 손권이 그의 신하들과 함께 비위를
몰아붙여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모두 당당히 답변함으로 마지막까지 비위를 넘지 못했다 합니다.
결국, 손권은 당당함에 반해 비위를 보고 하는 말이 "그대는 천하의 미덕을 갖춘 사람입니다.
분명 촉에서 제일 신임하는 신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중요한 자리에 등용되기에 오나라를 자주 오지 못할까 걱정입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답니다.
여기도 남은 게 무덤뿐...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는 도중에 하고 싶은 일도 하며 즐겁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무덤이라도 온전하게 남아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어요?
장비나 관우는 대단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따로 묻혔다잖아요.
삼국지가 쓰였던 그 시절에 이곳 가맹관은 유비에게는 무척 중요한 곳으로 취급했다는 의미겠네요.
그러니 여기는 군사적으로 무척 중요한 길목이라는 말이 아닐까요?
여기가 무너지면 촉의 도읍도 풍전등화라는 말이겠지요.
물론, 유비가 촉을 LIVE로 삼킬 때도 여기서 출발했을 겁니다.
오늘 佳人이 여기를 돌파해 청두까지 파죽지세로 군마를 이끌고 몰아붙여 볼까요?
이제 며칠 후 우리는 촉의 심장인 청두로 들어가야 하니까요.
전략적 요충지이기에 촉으로는 여기를 무척 소중히 여겼을 겁니다.
한중은 한나라의 시작이고 여기는 촉한의 발상지라고 인정하는 곳입니다.
촉한은 그 후 비위가 이곳에 승상부를 열어 나라의 업무를 보았답니다.
위의 그림이 비의가 승상부를 열고 집무를 시작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왜 후주 유선이 있는 익주에 가지 않고 승상부를 여기에다 열고 나라를 다스렸을까요?
수도이전 때문에 나라가 난리난 것도 아닐 텐데...
촉한은 이곳 가맹관에서 일어났고 검문관에서 끝났다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위의 그림이 바로 촉한이 가맹에서 흥했다는 이야기인가 봅니다.
유비가 촉한을 세우며 이곳을 가맹이라고 이름 지었고 방통이 성도를 취하는 계책을 주었던 곳입니다.
장비가 마초와 아주 징그럽게 불까지 켜놓고 밤낮으로 다투었고
유비가 유장을 습격할 때 곽준이 바로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유비의 근거지인 이곳 가맹성을 지켰지요.
유장의 장수 부금과 상존 등이 만여 명의 군사를 끌고 가맹관을 공략했지만, 곽준은 겨우 수백 명의 군사로
가맹관을 1년 이상 완벽히 지켰습니다.
그 후 촉의 근거지 익주로 진군할 때도 이곳만은 군사를 남겨 꼭 지켜두었습니다.
그게 아마도 유비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라 생각해서가 아닐까요?
아니면 여기서 그 꿈을 구체적으로 다듬어 서천 침공을 하기위해 출발한 곳이라 그랬을까요.
황충이 지략과 용맹성으로 장합을 패퇴시켰고 비의는 또 여기에 승상부를 두고 촉한을 경영했습니다.
강유는 이곳 부근의 우두산에서 병을 얻었지요.
이러니 촉으로서는 여기를 중요한 곳이라 여겼기에 파촉제일현(巴蜀第一縣),
또는 촉국제이도(蜀國第二都)라 했나 봅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소화고성을 걷다 보면 촉한의 시작임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는 글이나 그림을 자주 보게 됩니다.
유비가 처음 촉한을 세울 때 여기서 기병했고, 한중의 유장의 군사를 이곳에서 물리쳤기 때문일 겁니다.
남북의 주변정리를 이곳에서 계획하고 마무리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촉한의 시작은 이곳 가맹관이고 끝은 검문관이라는 말을 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