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소화현서와 문묘

佳人 2013. 6. 22. 08:00

 

이번에는 문묘로 갑니다.

문묘는 관제묘만큼 중국에서는 흔한 곳이지요.

文으로는 공자요, 武로는 관우가 아니겠어요?

워낙 작은 고성이라 어디에 어떤 곳이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차례대로 다 만나게 되네요.

굳이 알고 찾아갈 필요도 없는 작은 고성입니다.

 

 

그런데 이 고성에는 공자 사당은 있어도 관제묘는 없나 봅니다.

왜?

여기 가맹관에는 도원결의했던 유비나 장비가 유명한 곳인데 관우만 미워하는 겁니까?

혹시 관우에 나쁜 감정이라고 가지고 있나요?

그럼 유비가 촉으로 들어올 때 관우는 따라오지 않고 그냥 형주에만 남아 있어 그랬나요?

좌우지간, 관우는 이곳에서는 왕따신세인가 봅니다.

 

 

여기 소화고성의 문묘는 송나라 시기에 세워졌으며 그동안 일곱 차례나 보수했지만,

건축물 대부분이 너무 많이 훼손되었고 얼마 전까지는 청나라 가경 22년에 세운

대성전만 남고 모두 폐허로 변했다 합니다.

결국, 2008년에 완전 리모델링에 들어가 지금에 이르렀다 합니다.

입구로 들어서니 석패방이 무척 많습니다.

곡부에 가봐도 공묘로 들어가는 길에 석패방이 연속으로 이어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역시 반원의 연못을 앞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연못에 붓을 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천하를 얻은 그런 기분이 아니겠어요?

아까 고붕에서 본 자들 중 이곳에 붓을 씻을 수 있는 자는 몇 명 없었을 겁니다.

 

 

영성문이라는 패방안에는 문묘가 있고 역시 공자를 모신 곳입니다.

입구에 있던 직원이 따라오며 설명을 해주겠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헐~

중국어를 알아야 설명을 들을 게 아니겠어요?

그녀도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고 머쓱해하네요.

 

 

대성문입니다.

안에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가 있지요.

그러나 문묘 안의 공자 조상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하네요.

공자의 고향 취푸의 공묘에서는 사진을 찍어도 되는 데 왜 여기는 안 된다 할까요?

본사에 있는 오리지널이 된다고 하는데...

정말 웃기는 곳입니다.

본사의 정책을 대리점이 따르지 않나 봅니다.

 

 

도관고금(道冠古今)이라 쓴 패방이 보입니다.

지금 패방을 세운 위치는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리모델링 하며 적당히 그냥 구석 빈자리에 모셔둔 그런 느낌이 듭니다.

도관고금(道冠古今)이라는 말의 의미는 현자의 말은

세월과 관계없이 위대하다는 칭송이 아닐까요?

 

 

덕배천지(德配天地)라는 패방도 보입니다.

이 말은 공자의 덕이 하늘과 땅의 짝이 될 만도 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국이나 동양권에서 공자의 위치는 신과 동격인 듯 합니다.

이런 패방은 취푸 공자 마을에 가면 모두 볼 수 있는 것으로 그곳을 흉내 내

여기도 만든 패방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하늘은 스스로 높고

땅은 스스로 두터우며

해와 달은 스스로 밝다고 했습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또 걷습니다.

고기는 씹을수록 맛이 있다 했습니까?

이런 고성은 걸으면 걸을수록 편안합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시간여행을 보내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길 가운데 멋진 석패방 하나가 보입니다.

정절이라는 글이 새겨졌네요.

잠시 글을 읽어보니 오 서방네 집에 시집온 여인을 칭송하여 세운 패방으로 보입니다.

 

 

32살에 서방이 죽자 그 후 서방이 없어도 부모공양 잘하며 살았다는

여인을 칭찬하기 위해 만든 패방이랍니다.

그래서 행복했을까요?

아니면 불행했을까요.

먼저 죽은 서방이 밉지나 않았을까요?

정말 그녀만이 알 것 같습니다.

 

여성에 대한 생각도 나라마다 다르고 또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게 아닌가요?

이렇게 패방 하나 세웠다고 그녀의 삶이 행복하고 고결했을까요?

이런 패방이 다른 여인에게 무언의 압박으로 다가서지나 않을지 걱정됩니다.

 

 

이번에는 소화현의 관청인 소화 현서를 찾아봅니다.

역시 성내에서는 제일 높은 곳에 건물을 지어놓았네요.

건물 위치가 벌써 민초가 사는 곳과 차별화를 했네요.

 

민초를 섬기려는 자세인가요?

아니면 군림하려는 자세인가요.

슈퍼 갑이란 역시 있는 위치부터 다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도 관공서를 보면 도대체 민초의 생각은 하지 않고 주리를 틀어

걷은 세금으로 빚을 내 어마어마한 건물로 무슨 유리의 성을 짓고 있더군요.

그런 건물에서 근무하면 민초를 더 잘 섬긴다 생각하는 건가요?

 

 

관청이라 입구부터 등골이 오싹한 글을 적어놓았습니다.

옛날에도 무고를 많이 했나 보네요.

이게 당시의 빠떼루였나 봅니다.

때리고 지지고 주리를 틀고...

 

 

이유는 폼 잡고 싶은 이유일까요?

아니면 민초를 높은 곳에서 더 잘 살펴보려고 해서일까요.

그런데 현판에는 친민당이라고 썼네요.

순전히 글로만...

 

지고무상(至高無上)...

바로 권력의 힘이 하늘 아래 짱이라는 말이 아닌가요?

 

 

여기도 모든 내용물은 역시 문화대혁명 때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답니다.

중국의 문화혁명이란 중국을 후진국으로 만들고 미개한 나라로 이끈 일등공신이지요.

제일 처음 이 건물을 지은 시기는 당나라 때라 합니다.

그러니 이 소화고성은 당나라 때 성벽부터 모두 새롭게 뜯어고쳤다는 말이겠네요.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현령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저 자리가 틀림없이 아닐진데...

그래도 친구는 저기가 자기 자리라 우깁니다.

 

 

어때요?

이제 제자리를 잡은 것 같지 않습니까?

죄 많은 인생...

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죄 많은 세상이니까요.

바닥에는 그곳에 무릎을 꿇고 앉도록 자리가 정확히 그려 있습니다.

어쩌면 저리도 정확하게 들어맞는지...

마치 저 자리는 친구만을 위한 맞춤자리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가야 할 숙소는 바로 여기일 겁니다.

국립 호텔이잖아요.

밥도 주고 운동도 시키고...

이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했다는 후문이 있더군요.

 

 

이제 성내를 거의 둘러보았습니다.

소화고성의 동서를 관통하는 제일 번화가가 태수가(太守街)라고 합니다.

그 길에는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바닥에 깔린 돌길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가운데 길은 관리들이

다니던 길이고, 그 옆 길은 가마꾼들이 지나던 길, 제일 가장자리로 난 길은

일반 백성들이 오가던 길이라고 합니다.


당시에 민초는 길도 마음대로 걸을 수 없었나 봅니다.

이러고 민초에 봉사하니 친민이니 헛소리 하고 자빠졌어요?

을은 갑이 아무리 공경한다 해도 영원한 을입니다.

 

 

이제 소화고성을 떠나야겠습니다.
1시 30분에 고성으로 들어가 5시까지 구경했으니 3시간 30분이면 충분하네요.

이제 다시 아까 버스 내린 곳에 가 광위엔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명월협 잔도를 걸어보고 이곳으로 버스를 타고 와

소화고성까지 구경하니 딱 하루가 지납니다.

 

내일은 장비가 죽었다는 랑중이라는 마을로 갑니다.

장비라 하면 원조 덜수와도 같은 우리의 친근한 이웃이잖아요.

함께 가시렵니까?

랑중고성은 그곳도 여기처럼 오래된 고성이지만, 여기와는 다른 고성이라고 하네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광위엔은 마사지 비용이 무척 저렴합니다.

발마사지는 1시간에 30원입니다.

전신 마사지도 그 가격에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일본 관광객이 많이 왔으나 중일 관계가 삐걱거리며

그나마 관광객이 없어 공치는 날이 많은가 봅니다.

 

광위엔은 여기서 청두처럼 구채구도 바로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구채구를 청두에서만 가지 마시고 이곳을 경유하면 더 많은 것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구경할 곳도 많습니다.

숙박비도 100원 내외로 저렴하고 모든 물가도 저렴한 곳입니다.

서안이나 성도보다는 접근성이 떨어지지만, 이런 곳도 구경하기에 무척 좋은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