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고한대(古漢臺)
2012년 11월 6일 여행 19일째
오늘 일정은 쓰촨성 광위엔(广元 : 광원)이라는 곳으로 갑니다.
한중도 사실 쓰촨성에 들어가야 하지만 여기는 서안이 있는 섬서성이라고 하네요.
사실 서안과는 진령산맥으로 막혀 오히려 소통이 어렵지 않나 싶지만, 한중이라는 것 때문에
중원에 편입시킨 것은 음모(?)가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그저께 보려고 했던 한중박물관인 고한대(古漢臺)를 보지 못해 아침 일찍 문을 열 때
구경하고 돌아와 배낭을 찾아 광위엔으로 가려고 합니다.
아침 시간도 이렇게 쪼개 사용하면 하나라도 더 볼 수 있습니다.
고한대(古漢臺)는 시내에 있어 찾기가 무척 쉽네요.
그저께 한번 와보았기에 그냥 아침 산보 삼아 숙소로부터 고한대까지 걸어서 왔습니다.
지금까지 중국 여행을 하며 박물관을 몇 곳 구경했지만, 이런 건물은 처음입니다.
고한대는 유방이 여기 한중왕으로 있을 때 궁궐자리라고 합니다.
어쩐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성벽의 모습이 아닙니까?
한중은 지형적으로 분지의 모습이라 사방에 가까운 곳에는 산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 고한대는 단을 쌓아 높여 놓은 그런 모습입니다.
지금은 한중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박물관은 별로 크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중국의 다른 곳에서 보았던 박물관은 무식하리만치 컸으나
여기는 그냥 아담합니다.
입장료도 착하게 무료입니다.
위의 사진을 다시 보겠습니다.
한중박물관을 보면 박물관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성을 보는 느낌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겁니다.
그러나 성이라 하기에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의 크기는 지금처럼 작지는 않았겠지요.
안에 들어가 전각의 모양이나 정원의 모습을 보면 "아! 맞아!"라고 무릎을 칠 것입니다.
고한대는 높이 8m로 3단의 계단을 북에서 남으로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정문이 제일 위에 보이는 북문이네요.
북문을 들어서면 먼저 앞을 가로막은 축대를 보실 겁니다.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망강루라는 건물이 보이네요.
망강루라는 말은 강을 바라본다는 말이지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중국혁명 진열관을 지나 남쪽인 제일 아래에 양쪽에 있는
석문 13품 진열관과 포사고잔도 진열관만 보았습니다.
그러니 한중박물관은 석문잔도에서 뜯어온 석문 13품이라는 글자나 그림이 새겨진
돌과 잔도를 알기쉽게 보여주는 박물관인 셈입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처음 보이는 건물이 아주 멋지네요.
처마가 하늘로 낭창 치솟아 날아갈 듯합니다.
망강루라는 건물입니다.
청나라 때 높이가 17m나 되는 멋진 누각인 망강루라는 건물을 세웠답니다.
망강루라는 이름은 아마도 한수를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한수라면 바로 한중의 이름이 유래했다는 강이 아니겠어요?
망강루가 바라보는 남쪽으로 바로 한수가 흐르기에 강을 바라보나 봅니다.
한중이 바로 한수의 기를 받아 여기에 터를 잡고 생긴 곳이고 이곳을 기본으로 나라를 세운
한나라이기에 한수를 바라보는 망강루야 말로 한나라의 시각이라고 봐야 하겠습니다.
전혀 박물관 건물이 아니라는 게 확실합니다.
올라가 보고 싶었으나 문을 잠가놓았습니다.
그곳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계음당(桂荫堂)이라는 건물이 보이고 안내판에는 한대사적 진열관이라고 했지만,
이마저도 잠갔습니다.
도대체 뭘 보여주고 뭘 보라는 말입니까?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라는 말인가요?
사실, 보여준다고 佳人이 뭘 알겠어요.
더 안으로 들어가면 후원처럼 생긴 곳에 담장이 있고 그 담장 안쪽에는
비랑이라고 하여 비각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리고 들어가는 문 안에는 양쪽으로 그림이 걸려있습니다.
우선 그림 두 개가 눈길을 끕니다.
하나씩 살펴보렵니다.
우선은 칼춤을 추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홍문연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그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홍문연이란 유방을 제거하기 위해 항우가 초청한 연회를 일컫는 말이지요.
유방 살해 미수사건 말입니다.
여기서 간신히 살아남은 유방은 항우가 아주 벽지로 보낸다고 한 게
바로 여기 한중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항우의 이런 결정은 치명적인 실수였죠.
너무 벽지에 보낸다는 게 여기서 아무도 몰래 힘을 기르게 한 악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진나라를 부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서 용맹하게 싸웠고 함양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오너가 되기로 약속했지만, 항우는 "그때그때 달라요!" 라고 하며 오리발을 내밀었지요.
이때 불문곡직하고 유방을 보냈어야 합니다.
조금 무리수를 두더라도...
그래야 항우가 황제가 되어 새로운 세상을 열었을 게 아니겠어요?
또 하나의 그림은 바로 한신을 대장군으로 모시는 그림입니다.
역시 이 또한 유방이 지닌 장점이라고 봐야 합니다.
유방이 원래 시정잡배와 같은 날건달 같은 조폭의 삶을 산 사람이기에 이렇게
어깨들 간의 폼 잡는 일을 좋아했나 봅니다.
소하의 의견을 따라 그냥 넘버 투로 채용하는 게 아니라 모셔온다는 기분이 들게 한 거지요.
유비의 삼고초려 때문에 공명이 개나 말처럼 견마지로를 다해 줄을 둥 살 둥 달리다
진을 모두 다해 죽었듯이 역시 사람 부리는 방법을 알았나 봅니다.
원래 그런 사람의 세상은 義니 信이니 하는 말을 매우 중시하잖아요.
따거라는 단어도 그 조직에서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둥근 돌이 보입니다.
누각 안에 모셔둔 걸 보면 무척 소중한 돌인가 봅니다.
그리고 그 옆에 비석 하나가 서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하마석입니다.
뭔 마?
하마석 말입니다.
여기에서 유방이 말을 타고 내릴 때 오르내렸던 바로 그 돌인가 봅니다.
이렇게 누각 안에 모셔둔 것은 그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루는 유방이 말에 오르다 이 돌을 잘못 밟아 그만 미끄러졌답니다.
우리 같은 민초는 그냥 툭툭 털고 다시 올라갔을 겁니다.
그러나 유방은 칼을 뽑아 사정없이 이 돌에 화풀이했나 봅니다.
젠장! 잘못은 지가 하고 왜 돌에다 화풀이한답니까?
역시 날건달 본색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옛날 본색이 나오자 옆에서 가만히 서서 쳐다보는
佳人을 바라보고 멋쩍은 웃음을 보입니다.
아무리 한중왕에 되고 한나라를 세워 고조가 되어 황제라 칭해도
그 순간적인 천박함이 어디를 가겠어요. 그쵸?
천하에 돌에 대고 빌거나 화풀이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을 겁니다.
박물관 전시실 내에서는 사진촬영을 금지하네요.
그냥 눈으로만 보라고 합니다.
사실 플래시를 터뜨리지만 않으면 크게 문제 될 게 없을 텐데...
전시실마다 직원이 서서 지키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구경하는 사람도 없는데...
그래서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고 찍겠다고 이야기하니 한 두 장은 허락하네요.
그러면서 감시 카메라를 가리키며 많이는 찍지 말라고 합니다.
박물관 입장료가 무료였기에 항의도 못하고 몇 장만 찍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워낙 이런 고고학에는 아는 게 없어 그냥 눈으로만 보아도 되겠네요.
그러나 그 중 하나는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여기 소개합니다.
어제 석문잔도 입구에서 보았고 또 쉬창의 조승상부에서도 보았던 곤설이라는 글입니다.
여러분도 눈에 익은 글씨일 겁니다.
이 글은 조조가 여기 한중에 왔을 때 포사잔도 석벽에 썼다고 알려졌습니다.
지금까지 남은 조조의 유일한 필체라 하니 잘 보아야겠네요.
어떻게 조조의 글이라 생각하느냐고요?
왼쪽 끝에 위왕(魏王)이라는 글자 때문이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조조가 새겼다는 곤설(袞雪)이라는 진품을 사진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조조는 일생 동안 한중을 두 차례 찾았다지요?
첫 번째는 215년 오두미도(五斗米道)와 장로를 토벌하기 위해 한중을 공략한 것이며,
두 번째는 219년 유비와의 한중 쟁탈전을 벌일 때였을 겁니다.
배수진을 친 정군산 전투에서 하후연이 황충의 칼에 두 동강이 나며 전세는 조조의 수세로 변합니다.
이에 유비가 한중전투의 유리한 지형을 점령해 우위를 확보하면서 조조는 유비를 상대로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지요.
당시 조조는 이런 숨도 마음껏 쉬기 어려운 시기에 포하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결이 바위에
부딪혀 사방에 흩어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물방울이 마치 눈처럼 흩어져
내리는 듯하다 하여 그 자리에서 위의 사지에 보이는 곤설이라는 두 글자를 썼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죽일 놈의 멋쟁이 조조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조조는 적벽대전을 앞두고도 밤에 달이 뜨자 전함 위에서도 흥에 겨워 시를 읊고
노래까지 한 멋쟁이 로맨티스트 문학가입니다.
이런 조조를 어찌 미워할 수 있겠어요. 그쵸?
조조가 붓을 들어 곤설이라는 글을 쓰자 이를 바라보던 덜수가 "곤(袞) 자에 삼수변(水)이
빠졌나이다” 라고 아뢰자 조조는 크게 웃으며 “이 친구야! 여기에 이처럼 많은 물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물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그러니 자네는 평생을 덜수처럼 사는 게야~” 하며
계곡을 흐르며 바위에 부딪혀 튀어오르는 물방울을 가리켰다고 하니 그곳에 있던 많은 이들이
조조의 재치에 감탄했다고 하지요.
마치 佳人이 옆에서 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佳人도 중국 여행을 몇 번 했다고 점점 그들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같은 글이라도 그 글이 방안에 있을 때와 물가의 석벽에 썼을 때는 이렇게 멋진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비와의 전쟁에서 수세에 몰려 힘든 순간에도 이처럼 여유롭고 호기로운 모습을 보이니
조조야말로 가히 천하를 호령할 만한 영웅이 아니겠어요?
글자를 보면 조조의 영웅적 기개만큼이나 필체도 매끄럽고 시원시원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여러분은 어떻게 보세요?
그냥 의자에 앉아서 본다고만 하지 마시고요.
예전에 이 잔도는 워낙 유명한 곳이라 많은 문인이 오가며 멋진 작품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 중 하나 더 볼까요?
여러분은 무슨 글자로 보이십니까?
석호(石虎)라고 쓴 글이라 합니다.
저 글자가 왜 범 호(虎) 자냐고 따지시면 곤란합니다.
여기에도 사연이 있디고 하니 들어보고 가시겠어요?
포곡 석문 입구에 산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 산의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포효하는 형상이라고 하네요.
이곳에 은거해 살던 정자진이라는 아주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그곳의 모습을 석호라고 부르며 글을 남겼다 합니다.
워낙 인품이 뛰어났기에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은 정자진은 당시 왕봉(王鳳)이라는
장수가 찾아와 지도자로 모시고 싶다고 했으나 점잖게 사양했다 합니다.
당나라 때 시인 이백도 정자진의 인품과 학식을 높이 사 존경했다 하네요.
그런데 이렇게 은거에 들어가면 백수라는 말이 아닌가요?
완백 佳人처럼 말입니다.
더 많은 사진을 찍어 보여 드리고 싶지만 이렇게라도 몇 장을 허용해준
근무자에게 감사하고 나와 건너편으로 갑니다.
여기는 포사잔도를 만들 때의 그 모습을 보여주네요.
잔도의 모습을 조형물로 만들어 보여줍니다.
이 돌이 바로 잔도 공사에 쓰였던 돌이라 합니다.
잔도를 만들 때 우선 절벽에 구멍을 파고 그 후 이런 돌이나 나무를 끼워 가로대를 설치했을 겁니다.
위의 사진의 왼쪽을 보면 절벽에 네모난 구멍을 파고 끼우기 위해 다듬은 모습을 볼 수 있잖아요.
초창기의 잔도는 이렇게 가로막대만 끼워 징검다리처럼 만들어 건너다녔다 합니다.
잔도 공사에 사용된 정이나 도구라고 합니다.
철이 문들어질 때까지 두드리고 또 두드렸을 겁니다.
그 두드리는 사람의 생명이 끊어질 때까지 말입니다.
이런 열악한 도구로 포사잔도의 전체길이는 235km를 만들었을 겁니다.
이 잔도를 만드는 데에만 76만 명의 인력이 소요됐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눈물과 땀을 모두 흘리고 나면 마지막으로 피를 요구했을 겁니다.
지금은 댐으로 수몰되어 볼 수 없지만, 예전 사진으로 보니 일정한 간격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은 것이 보입니다.
저렇게 길을 낼 수 없으면 석벽에 구멍을 뚫고 돌이나 나무를 끼워 다녔을 겁니다.
누구는 포사잔도(褒斜棧道)의 공정을 만리장성이나 대운하 공사와 함께
중국의 3대 공정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공이산의 정신을 피로 이어받은 민족이라 인간의 힘을 이렇게 보여주나 봅니다.
이제 우리는 광위엔으로 갑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한중 박물관 고한대(古漢臺)는 박물관으로는 그리 볼 게 없습니다.
규모가 크지도 않고 전시 유물도 변변한 게 없습니다.
다만 석문잔도가 댐 건설로 물에 잠기며 수몰되는 석벽에 있던 훌륭한 작품을 뜯어와
전시한 것이 전부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실망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이곳이 원래 중원에서는 멀지는 않지만, 진령산맥이 가로막아 문명이 전파되지 않았기에
유물다운 유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역사에 제대로 등장한 것은 유방이 이곳으로 오면서부터가 아닐까요?
그러니 귀양오는 그런 벽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