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삐양삐양 면을 아세요?

佳人 2013. 3. 27. 08:00

이곳은 아마도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서역의 상인이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인

여기에 터를 잡고 살았나 봅니다.

그들의 종교 이슬람을 믿으며...

이제는 중국 어디를 가나 이슬람을 믿는 사람을 만날 수 있지만, 처음에야 이곳에

장사하러 온 아라비아 상인이 대부분이었겠지만, 지금 중국 사람도 제법 되나 봅니다.

 

그러니 원조는 여기 이슬람 거리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그러다 보니 이슬람 고유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도 여기가 아닐까요?

중국인은 돼지고기를 즐기고 이슬람은 돼지고기는 전혀 먹지 않고...

그래서 고기값이 들쑥날쑥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잠시 길을 걷다 보니 서양시라고 부르는 골목이 나옵니다.

이곳은 무척 좁고 혼잡합니다.

우리는 작은 골목 안으로 구경하며 들어갑니다.

이 골목길은 관광객보다는 이곳에 사는 지역주민의 시장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상한 글씨가 아까부터 보입니다.

혹시 위의 사진에 보이는 글씨 보신 분 계십니까?

뭐라고 읽는지요?

무슨 면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국수의 일종인가 봅니다.

 

이슬람 사람들의 고유 음식인가요?

아니면 이 거리에서만 볼 수 있는 음식인가요.

위의 간판에 보면 오른쪽에는 고대면(裤帶面)이라고 쓴 것은 허리띠 국수라는 의미일 테고...

왼쪽의 글씨는 처음 보는 글입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물어봅니다.

사전에는 없는 글이라 합니다.

직접 영어 알파벳으로 알려 줍니다.

발음은 삐양삐양 미엔이라고 한다는군요.

그래서 어떤 면 국수인가 궁금해 주문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국수 드셔 보셨수?

이렇게 넓은 국수가 중간에 끊기지도 않고 한 가닥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번 입에 넣고 후루룩 마시면 끝까지 먹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다보니 별 이상한 국수도 먹어 봅니다.

 

가격은 한 그릇에 15원입니다.

맛도 제법 우리 입맛에 맞습니다.

시안에 가시면 이슬람 거리를 걷다가 이상한 글자가 보이면 그곳에 들어가셔서

삐앙삐앙 미엔을 시켜서 드셔 보세요.

맛도 좋습니다.

 

길을 걷다 보니 나이가 제법 든 장사하는 아낙이 영어로 라이스 케이크라 합니다.

영어로 유식하게 라이스 케이크이지 순전히 우리말로 하면 떡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지금 "똑 사세요~ 똑 사세요~" 하는 게 아닙니까?

생긴 게 우리 눈에도 익숙한 떡입니다.

 

가격을 물어보니 5원이랍니다.

사서 맛을 보니 우리나라 찹쌀떡과 똑같습니다.

단지 단맛이 나는 무슨 시럽을 뿌려주는 데 아주 맛있습니다.

이슬람 거리 골목길을 걷다가 위의 사진에 보이는 아주머니가 "똑 사세요~ 똑을 사세요~"

라고 하면 5원 주고 사 드셔 보세요.

우리의 찹쌀떡 맛입니다.

소스는 이것저것 다 뿌려 달라고 하시고요.

 

이슬람 거리에는 노점에 똑 파는 아주머니도 영어를 합니다.

물론 영어 하는 거지도 만났습니다.

뭐라고 했느냐고요?

우리가 외국인임을 알고 "아임 헝그리~"라고 하더군요.

시안이라는 도시는 역시 실크로드가 열리며 이미 국제적인 도시가 되었으니

그 역사 또한 오래되었을 겁니다.

 

잠시 이슬람 거리를 걸어가다 보니 문이 하나 보입니다.

주마문(走馬門)이네요.

말을 타고 문 안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한때 이 집 주인은

세상에 부러운 게 없이 살았다는 말이겠네요.

 

문 위에 방안급제라는 현판이 자랑스럽게 걸렸습니다.

이 말은 성공한 사람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지방에서 치르는 시험에 합격해도 성공한 사람이었을 텐데 방안급제라는 말은

황제 앞에서 치룬 시험에서 장원급제 다음의 차석이라는 말이 아닌가요?

편액 가장자리로 벌써 용이 꿈틀거리네요.

가문의 영광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고악송(高岳松)이 아홉 살인가 열두 살 때 과거시험에서 2등을 해 황제로부터 이 저택을

선물 받았다고 하며 그래서 방안급제라는 현판을 자랑스럽게 걸어두었나 봅니다.

당시 시험이 암기위주였으니 고악송은 어린 나이에 암기의 신이었나 봅니다.

입구에는 고부(高府)라는 등을 걸어놓았습니다.

고 서방네 집이라는 말이겠지요. 

 

고부라는 말은 이 집이 고 서방네 집이라는 말로 청나라 건륭제 때 과거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한

사람의 집이고 삼등은 탐화 또는 랑이라고 했나요?

탐화라는 말은 3등 급제자가 황제로부터 어사화를 받아 나머지 등외 급제자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해 탐화라 불렀다 합니다.

그러니 임금은 3등까지만, 직접 챙겼나 봅니다.

그런 그 아래는?

이하 동문이라고 했을까요?

 

집이 400여 년이 된 모양입니다.

집의 규모가 원래는 80간 정도였으나 지금은 아니겠지요.

나중에는 재상까지 지냈다고 하니 무척 머리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원래 장사를 해 돈을 벌었던 집안으로 공부로 성공해 재력에 권력을 더하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이 살았을 겁니다.

 

고 서방네 집은 중국의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사합원이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면

무척 답답힘을 느끼는데 제법 돈도 있었고...

왜?

그가 잘 때 베고 자던 목침이 금고니까?

권력도 있었으면 베이징 공왕부의 주인이었던 화신의 집처럼

화원도 꾸미고 주거 공간도 넓게 만들지...

 

돌아보다 보니 어느 방 침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옴마야~

어쩌면 좋겠습니까?

고악송의 딸이 자던 방이랍니다.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만 처녀의 방을 범했습니다.

 

난방시설이 없어 겨울에는 무척 추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랬나요?

개나 고양이를 안고 잤나 봅니다.

궁궐에서조차...

 

그런데 왜 햇볕조차 비치지 않을 정도로 건물을 붙여지었을까요?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두렵고 힘들었나요?

정원도 좁고 담장은 왜 이리 높게 쳤을까요?

이런 집에서의 느낌은 높은 담장, 좁은 공간,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실내 그리고 음침한

느낌뿐인데 사합원을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은 이웃과 등을 돌리고 사는

폐쇄적인 그들의 성격을 보는 듯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중국의 주거문화는 우리나라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았고 수시로 나라가 바뀌었으며 북쪽으로부터 매년 가을 추수가 끝나면

추수한 곡식을 가지러 내려오니 중원에 살았던 사람은 무척 힘든 삶이었나 봅니다.

넓은 곳에서 살아 성격이 호탕하기보다는 오히려 남을 믿지 못하고

등 돌리기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