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춘추루에서의 관우

佳人 2013. 2. 6. 08:00

공원을 가로지르면 앞에 큰 건물이 보입니다.

바로 여기가 관우가 조조의 배려로 살았던 관택(關宅)이라는 곳인가 봅니다.

이곳을 통틀어 춘추루라고도 하고 관제묘라고도 부른다네요.

 

이름이 여러 개면 또 어떻습니까?

오늘 佳人과 함께 관 서방네 집을 들러볼까요?

문표는 25원이고 반표는 12원만 받네요.

 

원래 문은 세 개입니다.

가운데 문에는 관택(關宅)이라는 문패가 붙어있습니다.

왼쪽의 문은 공자를 모신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영성문이고 오른쪽에는 감미이후궁으로 들어가는

숭령문인데 두 문은 잠겨있고 가운데 춘추루와 관성전으로 들어가는 관택이라고 쓴

문패가 걸린 산문만 열려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 통하니 크게 신경쓸 일이 아니네요.

 

우선 이곳을 제대로 한눈에 알 수 있는 지도부터 먼저 봅니다.

아래 가운데 문인 산문이라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이곳은 세곳으로 구분되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 왕래할 수 있도록 문이 열려있더군요.

 

가운데 춘추루와 관성전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공자를 모신 대성전이 있고 오른쪽에는

유비의 두 부인인 감부인과 미부인이 함께 잠시 머물렀던 감미이후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이곳 관우의 집에서는 경비실도 아니고 귀퉁이에

세들어 사는 것처럼 볼품이 없습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곳을 찾지 않으셔도 아주 자세히 사진으로 확실하게 모두 보여 드릴 예정입니다.

위의 사진이 산문을 통과하며 보이는 춘추루의 모습입니다.

 

춘추루를 바라보고 양쪽으로 어느 곳이나 쉽게 만나는 종루와 고루가 있습니다.

그래도 종루에 올라 여기에 방문한 자국을 남겨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한 번 크개 종을 울렸습니다.

그래야 잠자던 관우 귀신이 벌떡 일어날 것 아니겠어요?

 

죽은 관우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말입니다.

이렇게 크게 종을 쳐야 관우가 우리가 온 것을 알게 아니겠어요?

위의 사진은 종루 위에서 바라본 고루의 모습입니다.

똑 같은 쌍둥이 건물로 고루는 올라가지 않고 그냥 종루 위에서 찍은 사진으로만 보여드립니다.

 

종루 위에서 안쪽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앞에 보이는 건물이 춘추루이고 멀리 보이는 큰 건물이 바로 관성전이라고 하는 건물입니다.

하나씩 모두 자세히 구경하려고 합니다.

 

여기가 원나라 시기에 처음 만들었고 명, 청 시대로 이어지며 황제들이 공들였다는 관우의

집으로 나중에 조조가 있었던 조승상부도 찾아갔지만 그곳과 비교하면

여기가 훨씬 크고 잘 꾸며 놓았습니다.

이런 말을 주객전도라 해야 하나요?

관우를 통한 민심잡기에 왕조마다 공을 들인 결과 관우는 신이 되었나 봅니다.

 

그때는 조승상부가 훨씬 잘생겼겠지만, 세월이 흐르며 관우만 귀여움을 받았나 봐요.

조조가 후세에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무척 슬플 것 같습니다.

여기가 조조의 나와바리인데도 조조보다 관우라...

 

참 세상 일이란 알 수 없네요.

조조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없지만, 관우의 모습은 늘 저렇게 폼을 잡았고...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던 청룡언월도를 들고 카리스마가 풀풀 풍깁니다.

조조가 만일, 이런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섭섭할까요. 그쵸?

 

보세요.

역시 관우와 아주 깊은 관계가 있는 불사동군의로 시작하는 관제시죽이 있잖아요.

이 시죽도는 관우의 상표특허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얼마나 많은 탁본을 떴으면, 저렇게 낡아보이나요?

관제시죽이라는 비석을 보면 꼭 등장하는 게 저 도장이지요.

 

관우가 저 도장을 무척 중히 여겨 가보로 남겼을 겁니다.

항상 보면 관우의 아들은 저 도장을 들고 옆에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지요.

관우가 아마 이곳에 있을 때 유비에게 쓴 편지라지요?

아무리 조조가 스토커보다 더 집요하게 붙잡으려고 해도 행님에게 돌아간다고요.

 

동한 시대인 건안 5년인 서기 200년에 조조가 동쪽 정벌에 나서며 선주인 유비와 와 장비는

혼자 살겠다고 튀어버리고 관우만 하비(下邳)에서 버티다 결국, 조조에 잡히는 신세가 되었지요.

이때 전투에서 관우는 조조군의 공격을 받고 유비의 두 부인인 감부인과 미부인 때문에

더는 싸울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때 조조는 수하의 장료가 관우와 인연이 있다고 그를 관우에게 보내 투항할 것을 권유하고

관우는 "토산삼약(土山三約)"을 걸고 조조에게 투항합니다.

 

물론, 소설 속에서 관우를 띄어주려는 작정한 의도적 이야기입니다만...

그러나 연의에서는 조조가 "토산삼약(土山三約)"을 받아주지 않을 때까지는 버텼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관우의 뻔뻔스러운 그 요구조건을 그대로 포용한 대인이었지요.

 

이렇게 약속을 받고 조조의 품에 안긴 관우는 조조를 따라 바로 지금 우리가 있는

쉬창으로 오게 되었지요.

조조는 관우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극진한 대접에 들어갑니다.

사흘에 한 번 작은 잔치, 닷새에 한번 큰 연회...

 

물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여기에 관우와 유비의 부인이 살 집도 따로 마련해주고 말입니다.

조조가 얼마나 마음 씀씀이가 세심했느냐 하면 유비의 두 부인이 사는 곳은 아예 담장을 치고

그 옆에 별도의 건물을 마련해 주었지요.

지금은 그곳이 관우가 거처했던 곳 밖으로 보이지만, 당시는 내택에 두 부인이 살게 하고 자기는

밖을 지킨 모양으로 살았답니다.

 

관우에게는 황제에게 건의하여 편장군이라는 직책을 내려 벼슬을 주어 봉읍에서 나오는

녹을 먹도록 함으로 관우는 평생 처음으로 황제가 내린 벼슬자리에 오르지요.

사실, 패장이며 포로에게 이런 대우를 한다는 일은 조조 외에는 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천하의 적토마도 주지요.

아래 사진이 바로 안 가겠다고 버티는 적토마를 끌고 관우에게 주려고 하는 모습이고

왼쪽에는 연회도 마련한 모습입니다.

관우를 향한 조조의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야~

 

관우는 미염공(美髥公)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그랬나요?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수염을 쓰다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책은 그냥 건성으로 사진 찍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니겠죠?

관우를 그린 그림 대부분은 이렇게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금은보화에 많은 재산도 관우와 유비의 두 부인에게 내립니다. 

어디 그것뿐인가요?

관우의 트레이드 마크라는 미수염을 보호할 비단 주머니까지 내려줍니다.

여기에 우리는 감동해야 합니다.

 

조조의 이런 자상한 배려는 아마도 삼국지연의 내용 중 상대를 배려한

가장 후대했던 장면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런 세심한 선물을 하는 조조 같은 사내 흔치 않습니다.

비록 작은 비단 주머니였지만, 그런 세심한 생각을 한다는 조조는 정말 자상한 사내라

생각되며 그렇게 공을 들였지만, 관우는 춘추라는 책만 읽으며 전혀 한 눈 팔지 않고

조조의 애간장만 태웠던 곳입니다.

 

춘추루가 보입니다.

아니군요?

넙죽 절하는 사내의 아주 잘생긴 엉덩이가 보입니다.

저 사내의 엉덩이를 보니 관우가 얼마나 중국인의 가슴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나를 보여주는

엉덩이라 생각되네요.

 

다른 말로 춘추루를 대절정(大節亭)이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그 의미는 관우의 고결한 도덕성을 나타내는 곳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밤이면 밤마다 눈알이 뻘게지도록 춘추라는 책만 읽었다 해서 춘추루라는 곳.

 

과연 그때 죽간이 아니고 종이로 된 책이 흔했을까 하는 의심도 가지만...

천하의 조조라도 당시 죽간 외에는 구하기 어려운 게 종이로 만든 책이 아닐까요?

이중 처마를 가진 지붕으로 된 춘추루는 처음 만들어진 때가 원나라 지원년간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의 유래는 아마도 관우가 조조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유부녀 킬러라고 소문 난 조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조가 밤에 음심이라도 동하면 어떡합니까?

빠떼루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중대한 범죄가 아니겠어요?

 

관우는 늘 밤에도 밤을 자지 않고 불을 밝히고 춘추라는 책을 읽었답니다.

그래서 춘추를 읽었던 곳이기에 이 건물을 춘추루라고 하나 봅니다.

중국 여행을 하다 보면 관우를 모신 관제묘라는 사당도 많지만, 간혹 춘추루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춘추라는 책을 읽는 관우를 만날 수 있지요.

그러나 그 많은 춘추루 중에 여기가 바로 오리지날 춘추루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위의 사진을 다시 봅니다.

이 모습은 무릎을 굽힌 사람이 관우로 보이고 그 앞에 허리를 굽혀

일어나라고 하는 사람이 조조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오른쪽에 말 한 마리가 보입니다.

바로 조조가 관우에게 그 유명하다는 적토마를 선물하는 장면이라 생각됩니다.

적토마를 받을 때만 관우는 조조에 무릎을 꿇었고 떠나갈 때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청룡언월도로만 전포를 걷어간 사내죠.

얼마나 관우라는 사람이 싸가지 없고 얍삽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관우는 비굴하게 무릎까지 꿇고 적토마를 받았지만, 여기를 떠날 때는 파릉교에서 배웅 나온

조조를 적토마에서 내리지도 않고 조조가 건네준 옷을 청룡언월도로 걷어가 버렸지요.

이미 말머리는 돌리고 뒤로 돌아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습니다.

 

모든 귀중품에 봉인을 하고 남겨놓았다고 하지만, 제일 값나가는 적토마는 타고 갑니다.

저 모습은 말머리를 돌린 것으로 보아 적토마를 조조에게 반납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말일 겁니다.

사람이 화장실 갈 때와 다녀온 후가 다르다고 하지만, 관우처럼 표리부동한 사람도 흔치 않지요. 

 

위의 그림을 보면 청룡언월도로 전포만 걷어가는 관우가 보입니다.

저 다리가 파릉교라는 다리입니다.

나중에 파릉교도 구경하러 가볼 거예요.

 

이 그림 몇 장으로 관우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네요.

주변에 있던 조조의 사람들이 모두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싶었을 겁니다.

어디서 굴러 온 개뼈다귀에게 주군이 적토마까지 선물하며 아양을 부리고 지금까지 사선을 넘어

수많은 전쟁터를 누비며 생사고락을 함께 한 우리는 개털이냐고 생각하며 말입니다.

 

그리고 유비의 두 부인을 모시고 파릉교를 넘어 오관육참의 험난한 길을 떠납니다.

마차의 창을 가린 커튼을 살짝 열고 내다보는 저 여인은 누구일까요?

감 부인일까요?

아니면 미 부인일까요.

세상일이 무척 궁금했나 봅니다.

 

이 춘추루는 처음 원나라 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랬기에 건물을 살펴보면, 옛 건축의 기술을 볼 수 있다 합니다.

만리장성을 넘어온 민족이 중원의 한족이 세웠던 나라보다 더 관우나 공자를 섬겼습니다.

누가 문화민족입니까?

 

그 후 명대와 청대를 거치며 보수하며 내려온 건물이라 합니다.

건물의 형식은 하나의 건물에 두 개의 정원을 갖추고 밖으로는 산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종루 고루가 있고 춘추루가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구경하렵니다.

내일은 더 안으로 깊이 들어가 보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만리장성을 넘어온 오랑캐라 비하했던 민족이 세운 나라가 공자나 관우 섬기기에

더 열심이었던 것은 아마도 소수 이민족이 다수 한족을 통치하려는 방편으로

공자나 관우를 내세웠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민족 간의 벽 하나를 허물 수 있잖아요.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우리가 느꼈던 관우나 공자는 원래 본모습보다 많이 부풀려져

바람만 잔뜩 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것도 佳人의 편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