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이(三臺)에서 조조를 생각합니다.
위의 사진은 업성 박물관에 만든 조형물로 업성인 이곳에 삼대를 짓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로 조조는 수시로 드나들며 삼대의 진척상황을 보고받았을 것이며 잘못된 곳은
지적하며 고쳤을 겁니다.
아니? 조조가 설계감리까지?
슈퍼맨이라 조조라면 했을 것 같지 않나요?
가운데에 동작대가 있었고 좌우로 빙정대와 금봉대가 자리하고 있어
그 높이가 10장(丈)이나 되었다 합니다.
10장(丈)이면 35.8m 정도라 하니 마치 하늘로 우뚝 솟은 하늘 궁전의 모습이 아니겠어요?
세 개의 건물은 각각 다리로 연결되어 다닐 수 있게 설계되었다 합니다.
이렇게 화려했던 이곳도 지금은 찾는 이 별로 없는 옥수수밭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세기의 걸작품인 삼대를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을까요?
얼마나 많은 세금을 수탈했을까요?
아니라고요?
불황에 대규모 토목공사는 오히려 경제를 살린다고요?
조조는 이게 민초를 살리는 일이라 여기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했을 겁니다.
쉬창에 운하도 팠던 조조가 아닌가요?
지금은 모두가 흘러간 구름 같은 호사였고 옥수수밭 사이로 지나가는
형체도 없는 바람처럼 마음만 시립니다.
마치 꿈을 꾼 그런 환상이 아닐까요?
지금은 명나라 때 주원장이 자신의 황제 등극을 반대한다고 이곳을 불을 질러 절단냈고
이어진 홍수로 이번에는 물로서 업성 대부분은 허물어지고 폐허만 남았습니다.
멀리 무심한 파밭 너머 신기루처럼 보이는 업성박물관은 아마도 삼대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조가 북방을 성공적으로 평정하고 기주로 돌아올 당시, 남쪽 땅속에서
찬란한 빛이 비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네요.
얼른 군사를 시켜 그곳을 파 보았더니 구리로 만든 동작새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고 놀랄 우리가 아닙니다.
원래 중국은 이런 기막힌 일이 수시로 일어나는 나라라는 것을 여행을 통해 이미 알았으니까요.
이미 우리는 이런 일이 생쇼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위의 사진은 생쑈의 증거물인데 초점이 빗나갔습니다.
딱 한 장만 찍은 사진인데 이렇게 초점이 흐리면 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이지만,
뻔뻔스럽게 올립니다.
이는 필시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조조는 이를 기념키 위해 동작대를 만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네요.
정말 신통한 일이 아닙니까?
아니라면 필시 사람을 시켜 미리 번쩍거리는 구리로 동작새를 만들어 묻게 하고
나중에 파 뒤집는 생쇼를 했다는 말일 테고...
조조가 하지 못할 생쇼가 뭐가 있겠어요? 그쵸?
이 정도의 일은 조조가 아니더라도 덜수 佳人 정도라도 능히 할 수 있는 웃기지도 않은 일이죠.
각 누각의 높이가 금봉대와 빙정대가 24m, 중간의 동작대가 30m에 이르고 각 대마다
방이 100여 칸씩 있었다고 전해지니 멀리서 바라보면 정말 삼대가 앉은
세 봉우리의 산과 같지 않았을까요?
조조는 여기에 각 대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아 서로 연결하게 하기도 하고 분리하기도
했다고 하니 가히 업성이 난공불락의 인공 요새라 불릴 만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남은 언덕은 금봉대 자리만 남았다고 하네요.
여기서 60보만 걸어가면 그곳이 바로 동작대 터라고 하고요.
황하가 범람한 자연재해는 이곳 삼대까지 삼켜버렸나 봅니다.
지금 남은 것은 금봉대가 있었다는 터만 일부 남아 있네요.
동작대의 모습도 보고 갑니다.
아래는 빙정대의 모습으로 이렇게 가운데 동작대가 있고 양쪽으로
서로 다른 누대를 다리로 연결해 건너다녔다 합니다.
이 다리는 나중에 삼국지의 최대전투라는 적벽대전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렵니다.
오죽했으면 훗날 수나라 양견이 누군가 이곳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업성을 흔적도 없이 몽땅 불태워 버렸을까?
이곳은 터가 무척 센 곳인가 봅니다.
업성은 반골의 기질인가요?
그 삼대라는 누대가 위의 사진과 같은 모습일까요?
양쪽으로 두 개의 다리로 연결하고 말입니다.
지금은 이 부근은 땅만 파면 옛 궁궐터가 발견된다 합니다.
아마도 조조가 만들었다는 그 황궁터도 일부는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삼대를 잇는 이 다리를 이교(二橋)라 하는데 이 건물을 완공한 후 조조는
아주 큰 연회를 열었고 그 자리에서 조조의 아들 조식이 동작대부라는 부(賦)를 지어
조조에게 헌상했다 합니다.
여기가 어디 연회만을 위한 곳일까요?
별의별 생쇼를 다하며 삶의 기쁨을 듬뿍 누렸을 겁니다.
성벽 수비를 위한 군사적 기능을 갖추어 조조가 정치권력의 상징으로 천하를 호령하려
만든 곳일 것이기에 벌써 마음만은 천하를 통일하고 여기를 천하의 중심이라 여기며
최고의 고귀한 자재로만 만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것에서 황제보다 더 높은 명칭을 만들어 사용하고 싶었나 모릅니다.
조조는 이곳에서만 16년을 살았다 하니 이 동네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나 보네요.
아방궁이 이와 같을까?
정말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조조의 힘이라면 하지 못할 일이 없었을 겁니다.
바닥에 이태리 대리석인들 깔지 못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이렇게 좌우로 문무 대신을 거느리고 가운데 서면 그 기분이 어땠을까요?
우리는 조조를 잔인하고 인정도 없는 냉혈한이라 생각하지만, 당시에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 중 가장 문학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합니다.
그러니 예술인이라는 말인데 예술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많지 않습니다.
캬바레 춤도 예술행위라 하며 누님만 찾는 제비과에 속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많지만요.
위의 사진은 적벽대전을 코앞에 두고 오나라 주유와 대치했던 수채에 정박한 배 위에서
시를 읊는 모습입니다.
생사를 가를 전쟁터에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짓누르는 그런 시간에
이렇게 여유롭게 시를 읊는 사람 흔치 않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하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조조는 전쟁도 예술로 승화하고 삶과 죽음도 초월한 외계인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당시 노벨상이 있었다면, 조조는 문학상을 떼놓은 당상이라 했을 겁니다.
안 주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면 되니까요.
조조를 문학적으로 가장 돋보이게 한 게 바로 여기에 만들었다는 삼대였을 겁니다.
그래서 금봉대가 있었던 터 안에는 건안칠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조조는 많은 문인을
불러 여기에서 연회를 베풀고 그들이 마음껏 문학과 예술을 노래하게 했다
하니 바로 여기가 조조에 의해 시작된 건안문학(建安文學)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꽃을 피운 곳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일곱 사람이어야 하는데 여덟 명이 있네요.
제일 왼쪽에 여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문희라는 여류 문학가를 하나 더 챙겼습니다.
문희는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려 합니다.
건안칠자라는 인물은 공융, 진림, 왕찬, 서간, 완우, 융창, 유정을 말한다 하네요.
佳人도 오늘 모처럼 여기 온 김에 한마디 하고 가야겠어요.
누대를 올려다보니
봉황과 용이 내려앉은 듯하구나.
누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기는 구름 위 천상의 세상이어라
누대에 기대어 천하를 바라보니
이 세상 모두가 발밑에 보이누나
땅 위에 내가 있고 하늘 아래 내가 있으매
음 하하하~ 천하가 내 것 이로다.
이랬던 동작대가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모래 위에 지은 누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하를 품었던 조조가 세웠다는 삼대가 말입니다.
황제가 살았던 황궁보다도 더 화려하고 더 웅장하고 더 아름다웠던 황궁과 누각은
이제 구름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은 다만, 이야기만 남은 전설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佳人과 여러분은 전설 속으로의 여행을 즐기고 있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조조가 황제로부터 위왕으로 책봉 받고 16년간을 지냈다는 곳이 바로 여기랍니다.
이곳은 이후에도 후조(後趙) 염위(冉魏) 전연(前燕) 동위(東魏) 북제(北齊)의 수도로써 약 370년간
6개 왕조의 도읍으로써 북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중요한 곳이랍니다.
아마도 그만큼 지리적인 장점이 있었던 지역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