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성 천자가육박물관(周王城天子駕六博物館)
어제 이야기 중에 백이, 숙제가 제후국 처지에서 군주국인 상나라를 치러 가는 대목에
오지랖 넓게 나서 꾸짖다 죽을 처지에서 태망공이 나서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한마디 거드는 바람에 겨우 살았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당시 무왕의 처지에서는 형의 인육을 아비에게 먹인 상나라 주왕은 군주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며 당시 군주국 하나에 여러 제후국으로 나뉘어 지금의
연방정부처럼 지방자치를 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군주국에 매년 조공을 바치며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군주국을 무찌르고 새로운 세상을 열었던 주나라도 시간이 지나자
다시 상나라 말기와 똑같은 일이 생기게 되었답니다.
역사는 반복한다고 했나요?
아니면 욕하면서 배운다 했나요.
이 박물관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졌네요.
차마갱이 출토된 곳은 유물 자체를 있는 모습 그대로 단단하게 굳게 하여 변질하지
못하게 처리하여 보여주는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여기서 발굴된 유물 중 그런대로
정리정돈이 끝난 것만 모아 전시실을 마련해 보여주는 곳이라 합니다.
우선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것부터 보렵니다.
유물이 사실 제자리에 있는 게 가장 유물답습니다.
그런 면에서 중국의 이런 행동은 칭찬받아야 합니다.
중국도 이렇게 잘 할 수 있어요.
이 차마갱에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위의 천자가육 사진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차마갱 중에 가장 차별화되는 곳.
바로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말과 함께 묻힌 곳입니다.
아~ 저런 하나 둘... 세어보니 다섯 마리만 보이네요.
이거 어쩌면 좋겠습니까?
한 마리가 부끄러워 바로 발아래 숨었나 봅니다.
이제 제대로 된 사진으로 보시겠습니다.
숨어있던 한 마리가 "서프라이즈!"하며 나왔지요?
저 말은 사람 얼굴 가리는 내숭 떠는 말인가 봅니다.
다시 다른 각도에서 봅니다.
이제 여섯 마리 모두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이 박물관 이름이 주왕성천자가육박물관(周王城天子駕六博物官館)이라는
이름으로 정했을 것이고 여기에는 많은 말과 마차가 함께 있지만,
오직 위의 사진에 보는 것만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입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청동 솥 중 그 안에 명문을 새긴 것을 찍어보았습니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청동 솥의 주인이나 목적 등을 적은 글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낙양은 작년에 이어 이번에 또 오는 곳입니다.
작년에 여기에 왔을 때 먼저 일정에 예상하지 않았던 곳을 다니느라 많이 건너뛰었기에
용문석굴과 고묘박물관만 구경하고 지나친 곳입니다.
이번 여행은 삼국지 기행도 잠시 하기에 여기에 있다는 관우의 머리만 뭍은 관림이나 보려고
들렀는데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시간을 기원전으로 팍 당겨 그때의 모습을 구경하게 되었네요.
관림을 구경하고 박물관에 들렀다가 오늘 월요일은 휴관이라 문이 닫혀 헛걸음하고
시내로 나오다 우연히 주왕성 천자가육박물관(周王城天子駕六博物館)이라는 아주 읽기도
어려운 이름의 박물관이 있어 들렀는데 낙양은 13개 왕조나 도읍으로 삼았기에
이런 화려한 유적을 지닌 도시도 흔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삼국지 속에서도 여기는 동탁이 황제를 납치하고 여기를 불을 지른 후에 시안인 장안으로
도읍을 옮긴 후 다시 동탁이 죽은 후 황제는 돌아왔지만, 폐허뿐이라 결국 조조의 건의에
넘어가 조조의 홈그라운드라는 아랫동네 쉬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게 바로 조조의
등짝에 날개를 달아준 셈으로 이때부터 조조 팔자가 활짝 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2002년 서울에서는 월드컵 경기로 대한민국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꿈의 4강에 올라 세상의 주목이 쏟아질 때 낙양의 중심부인 왕성 광장이라는
곳에서는 가을이 물들어가는 10월에(우리 부부가 온 지금이 10월입니다.) 세계고고학상
아주 중요한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낙양문화광장을 조성하다 차마갱(車馬坑)이라는 동주 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것입니다.
여기는 워낙 지하에 유물이 많기에 빗자루질도 살살해야 하는데
낙양에 포크레인으로 공사하다 말입니다.
동주라 하면 기원전 수백 년 전의 나라가 아니겠어요?
공사현장은 바로 동주 시대에 왕성 구역 동북쪽이라 하네요.
발굴 결과 390점의 유물과 18기의 거마가 발견되었다 합니다.
그때까지 발견된 차마갱으로는 아주 완벽한 최대규모라 합니다.
그 중 길이가 42.6m 너비가 7.4m에 이르는 유구 한 기에서는 여섯 필의 말이 끄는
아주 폼 나게 생긴 수레 한 대와 수십 대의 수레와 말과 개의 뼈가 발견되었으며
사람의 인골도 한 구 발견되었다 합니다.
그런데 웬 개뼈다귀입니까?
이곳에서 얼쩡거리다가 그냥 묻을 때 쓸려 들어갔을까요?
당시의 순장제도를 보면 말뿐 아니라 사람은 물론 기르든 개도 함께 묻었든 모양입니다.
개는 꼬리 치며 늘 주인을 충성으로 섬겼을 뿐인데 젠장! 죄라면 꼬리 친 죄밖에 없겠네요.
周王城天子駕六이라는 말은 천자가 말 여섯 필이 일렬로 서서 끄는 마차를 몰았다는
의미로 쉽게 생각하면 벤허의 한 장면으로 보면 되지 않겠어요?
이제 벤허라는 영화도 중국에서 특허침해소송에 들어가면 꼼짝없이 당합니다.
벤허는 네 마리의 말을 끌었는데 천자는 두 마리 더해서 여섯 마리로 끌었으니
벤허가 한 수 아래로군요?
주나라 천자의 묘 옆에 이렇게 부장품을 묻는 것을 배장(陪葬)이라 하나 봅니다.
이 유물이 발굴됨으로 지금까지 고대문헌에 나왔던 '천자는 말 여섯 필이 끄는
마차를 탄다.'라는 "천자가육(天子駕六)"이란 말이 사실로 입증된 셈이네요.
뭐 부러워 할 것도 아닙니다.
겨우 6마력이니까요.
당국에서는 발굴된 현장 그대로 그 자리에다 박물관을 꾸미고 일반에 공개하니 현장은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데 이 말은 낙양이라는 도시의 지하에는 아직도 우리가 알 수조차 없는
엄청난 유물이 숨어있다는 말도 되니 황하의 범람으로 고대도시가 지금까지 수차례
묻히다 보니 홍수로 쓸려온 토사가 유적을 덮고 있는 셈이네요.
이곳에다 도읍을 정한 동주의 평왕(기원전 770-720년)은 서융의 잦은 침범으로
시안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겨왔던 모양입니다.
원래 서쪽에 자리했던 주나라는 구분하기 위해 서주라 했고 천자는 제후들이 연합하여
자꾸 집적거리고 포사 때문에 결국 봉화놀이 하다가 나라를 철저하게 말아드셨지요.
서주(西周)의 마지막 왕이었던 유(幽)왕이 말입니다.
불장난하며 밤에 오줌 싼다고 예전에 어른들이 말씀하셨죠?
불장난하다가 나라 말아먹은 왕도 있답니다.
그 이야기는 내일 다시 포사와 함께 이야기해야 할 듯합니다.
원래 서주는 지금 서안 인근에 도읍을 정했던 모양입니다.
워낙 막강한 힘으로 주변의 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군주국의 왕을 천자라 할 정도로
막강했으나 일소천금이니 여산 봉화니 하는 일화를 남긴 포사와의 일 때문에 결국,
집안만 망한 게 아니라 나라까지 말아드셨지요.
나라마다 유적에 사람의 직급에 따라 구분하는 게 따로 있지요.
동남아 캄보디아의 앙코르 제국 유적 중 앙코르 와트에 가면 엄청난 크기의
벽화를 새겨놓았는데 그 모습으로 보려면 사원을 한 바퀴 돌아야만 합니다.
그곳에서는 계급을 양산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왕과 장군의 구분은 양산 숫자가 몇 개냐에 따라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더운 나라기에 양산이 필수였나 봅니다.
호텔의 급수는 무궁화로 나누듯 당시 주나라에서는 말의 숫자가 그 사람의 신분이랍니다.
한 마리 말을 끌면 일반 평민이고, 그다음 직급에 따라 올라가다 천자는 여섯 마리라네요.
또 솥으로도 구분하지요.
천자는 솥을 아홉 개로 정했습니다.
제후국의 왕은 천자에 두 개를 빼고 일곱 개로 정했습니다.
제후국과 군주국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결국 솥 따먹기 전쟁이 되는 건가요?
그럼 우리나라에서는 압력밥솥 사장이 제일 높은 겁니까?
솥이란 권력의 상징으로 많으면 그만큼 많은 사람을 먹인다는 의미일 겁니다.
결국, 그 숫자는 군사를 얼마나 거느리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에 있는 유적을 보면 평민은 빼고 말이 두 마리부터 있네요.
죽어서고 또 차별당하는 민초는 슬픕니다.
당시에는 순장제도가 있었나 봅니다.
사람이 죽으면 말도 함께 순장시켰기에 순마갱이라고도 부른다는군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중국의 마차문화는 그 역사가 무척 오래전부터였나 봅니다.
로마제국보다도 더 일찍 마차를 만들어 이용했다 합니다.
우리와는 다른 문화인 마차 문화는 아마도 지형적인 문제 때문일 겁니다.
산악지대가 많은 우리 땅에서 마차는 오히려 불편한 도구고 중국의 중원은 둘러보아
산이라고는 언덕도 보이지 않기에 일찍 말을 이용한 마차문화가 발달하였을 겁니다.
마차는 빠르고 한 번에 더 많은 물자를 운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사는 곳의 환경에 따라 그 문화가 다르게 발달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