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기행/삼국지 기행

문희귀한(文姬歸漢)

佳人 2013. 1. 18. 08:00

 

업성 유지 안으로 들어가면 안쪽 벽에는 이곳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화를 새긴

벽화가 있는데 그중에 문희 귀한(文姬歸漢)이라는 제목의 부조물이 있네요.

그 의미는 문희가 한나라로 돌아오다. 뭐 이런 이야기일 듯합니다.

아래 사진에는 문희사한(文姬思漢)이라고 적혀있는데 문희가 한나라를 그리워했나

본데 이는 분명히 문희에게 무슨 소중한 사연이 있는 듯합니다.

 

 

문희라는 여인은 성이 채(蔡) 씨로 중국 고대 4대 재녀(才女) 중 하나로 입에 오르내리는

여인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전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 실제 인물의 이야기라고

하며 채문희는 한나라 말기에 아주 유명했던 서예가며 학자며

문인이었던 채옹(蔡邕)의 딸이라 합니다.

 

채문희의 이름은 염(琰)으로 자가 문희 또는 명희라 불렸나 봅니다.

원래 자가 소희(昭姬)였는데 사마소의 이름을 피휘 하여 문희라고 고쳤답니다.

16세에 하동의 위중도(衛仲道)에게 시집을 갔으나 이듬해 서방이 죽는 불행한 일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 살게 되었다네요.

미인박명인가요?

 

 

이 아름다웠던 여인에게도 전해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네요.

그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능 중 문학에 아주 재주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거문고를 타다 줄이 끊어지면 몇 번째 줄이 끊어졌다는 것을 눈을 감고도

금방 알 정도로 음악에 재능이 많았다 합니다.

이 정도라면 백아절현의 고사에 나오는 지음이라는 종자기와 견주어도 전혀

뒤처짐이 없지 싶고 물론 이런 여자는 미모 또한 한 미모 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네요.

신은 불공평하다는 말을 듣게 했다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후한 말에 아비인 채옹이 역적이라는 동탁 아래에서 벼슬을 하게 되는 바람에

동탁의 시대가 끝나며 채옹도 감옥에 갇혀 죽었습니다.

그러면 채옹의 딸은 당연히 역적의 딸로 삼족을 멸해야 하는데 후한 말기는 격변의

시기라 아무리 줄을 잘 섰다 하더라도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그런 혼돈의 세월이었지요.

 

 

 

조조도 한치 앞을 보기 어려웠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채문희는 다행히 목숨은 건지게 되며 마침 흉노족의 침입 때 흉노의

좌현왕(左賢王) 유표에게 납치되었으나 워낙 출중한 문희의 미모에 유표가 흠뻑

빠지는 바람에 데려가 측실로 삼게 되었다네요.

이런 게 행복한 일인가 불행한 일인가 분간하기 어렵네요.

쌍둥이까지 낳았다니 본인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건안 13년 조조가 친구였던 채옹의 소식을 듣고 그의 후손을 수소문하던 중 딸인

채문희가 흉노족에게 붙잡혀 간 후 그의 측실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안타깝게 여기고

주근을 사자로 황금 1.000냥과 백옥 한 쌍을 주고 문희를 한나라로 다시 데려옵니다.

이 이야기를 여기에 조각으로 새겨놓고 문희귀한이라는 글을 남겼군요.

 

그런데 조조는 친구의 딸이라고만 생각하고 문희를 데려온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사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조는 문희를 짝사랑했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재기만 충만한 여인이 아니었고 미모 또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합니다.

제가 그녀를 만나보고 난 후 글을 써야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전언 통신에 따르겠습니다.

여기에 조조의 여성관이 한몫했다고 봐야 합니다.

 

 

조조가 누굽니까?

꽃보다는 처녀요

처녀보다는 유부녀라 했습니다.

특이하게도 조조는 처녀보다는 유부녀를 매우 우대했던 고상한 취미생활을 즐긴 사내라네요.

사람을 평등하게 대했다는 박애주의자였나요?

그의 처첩 중 대부분이 처녀가 아니고 유부녀였거든요.

 

 

그러나 세상일이 그래요.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가졌더라도 평생 마음속으로만 생각했지 품지 못한 그런

여인이 있고 사랑은 이루어져야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이렇게 이루어지지 못해 애태우며

살았던 것도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겁니다.

조조는 문희만큼은 아끼고 사랑했기에 가슴에 품지 않고 마음으로만 품고

동사(董祀)에게 다시 시집보냈다지요?

채문희는 미모만이 아니라 대단히 영특한 여인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세상이 공평하다고요?

가끔 하늘은 우리 같은 사람을 슬프게 하더군요.

재능도 있고 미모 또한 받쳐준다면 세상은 살만하다고 할 겁니다.

그런데 문희는 이때까지는 전혀 행복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조조는 어느 날 채옹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에 뛰어난 학자였던 채옹이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책을 수소문합니다.

채옹은 당 시대에는 가장 뛰어난 서예가며 문인이며 학자였잖아요.

여기서 조조는 문학을 무척 사랑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넌지시 이야기하네요.

사실 조조는 문학도였습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 조조만큼 문학을 사랑했던 사람이 있으며 나와보라고 하세요.

 

그래서 어느 날 조조는 조용히 문희를 부릅니다.

이어지는 선문답입니다.

 

"????"

 

"......"

 

"!!!!"

 

"~~~"

 

무슨 소리냐고요?

저들이 중국어로 이야기하는데 佳人이 어찌 알 수 있답니까?

그렇지만, 70년 이상을 눈치로만 살았던 佳人이기에 아래와 같이 유추해 봅니다.

 

"아버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그 많은 책과 문학작품이 어디에 있을까???"

"저도 그 책의 행방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전란 중에 모두 불타버렸고

한 권도 남은 게 없나 봅니다...."

"아이고! 아까운 책! 책이란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생명의 양식이 아니겠니!!!!"

"승상!!! 아버님의 쓰신 작품을 모두 외우지는 못하지만, 제가 그중에 수백 권의 책과 내용은

대부분 외우고 있어 많은 부분은 되살릴 수 있어요~~~"

 

이상은 위의 선문답을 佳人의 능력으로 다시 풀어보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유추해 봅니다.

 

 

문희는 조조에게 아버님이 쓰셨던 문학작품 수백 권의 책을 외우고 있어 그것만이라도

되살릴 수 있다고 하자 조조는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해보라 합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서요.

사실 佳人은 방금 읽은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 다시 보아야 아는데...

 

정말 문희는 그동안 외우고 있었던 4백 편을 거미가 거미줄 뽑듯 술술 외워 적어 내니

조조가 대경실색할 수밖에요.

이러니 조조가 속으로 문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이게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뻔한 이야기지만, 그만큼 재능이 뛰어났다는 의미로 받아주어야

할 것 같으며 우리는 조조라 하면 평생을 권모술수로 어렸을 때는 동네를 다니며 빨래에

똥칠이나 하고 커서는 전쟁터만 누비며 남의 뒤통수나 치고 나쁜 짓만 골라했다고

생각하지만,이렇게 문학에 관심이 있고 학문하는 사람을 배려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네요.

 

조조가 늘 했던 말 '오로지 재주가 있는 이를 천거하면, 나는 그를 등용해 쓰겠다.

(唯才是擧 吾得而用之)’라는 말로 당시까지 효렴이라는 폐단을 일거에 정리했던

대단한 행정가이기도 했지요.

정말 조조는 인재라 생각하면 적도 거두려고 했잖아요,

관우를 보면 말입니다.

 

당시 한나라에서는 인재 등용을 효렴이라는 방법으로 주로 천거에 의해 채용했다는군요.

효렴도 좋은 방법이지만, 사실 배경 있는 사람만이 나갈 수 있는 나쁜 면도 많잖아요.

그러나 보니 권력자의 친인척이 늘 벼슬을 하고 능력이 있어도 줄이 없으면

찬밥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지금으로 보면 추천서나 봉사 활동 증명서만으로 사람을 뽑았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제도는 지금까지의 폐단을 줄이고 공평하게 하려고 만들지만,

그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에 따라 악용되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치세에는 능신이요, 난세에는 간웅"이라는 허소의 인물평처럼 조조는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 180도 다른 사람일 듯합니다. 

조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가 있지 싶습니다.

삼국지란 한족의 입장에서 쓴 한실을 위한 편파적인 이야기이기에 유비만 짝사랑한

이야기가 맞나 본데 위의 사진 속의 여인이 업성 박물관에 만들어 놓은 문희로

지금 외웠던 책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요~

채문희는 영특할 뿐 아니라 미모도 갖추었다 합니다.

그래서 조조가 늘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문희는 안아보지 못했다

하고 사실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둘만 방에 있을 때 佳人이 직접 보지 않았기에

장담은 하지 못하겠어요.

佳人이 문희를 보았는데 정말 예쁩니다.
꿈속에서...

 

문희는 정말 기억력이 대단한 여인이었나 봅니다.

佳人은 책을 읽고 그 다음날 다시 읽어보면 늘 처음 읽어보는 기분입니다.

하루만 지나도 몽땅 다 잊어버렸기에 그 책이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관우도 그랬으니 크게 문제 되지 않겠지요?

관우가 왜?

위의 사진에 보듯이 관우를 상징하는 춘추루에서 맨날 춘추만 읽었다고 하더군요.

어제 읽은 춘추가 생각나지 않으니 매일 읽었을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관우 사당이 춘추관이라고 하고 그의 손에는 늘 춘추라는 책만 들고 있잖아요.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원래 조조는 유부녀 킬러였다고 합니다.

늘 처녀는 안중에도 없고 주로 유부녀만 골랐다 합니다.

그가 거느렸다는 12명의 처첩 중 처녀는 두 명에 불과했다고 하니

참말로 난해한 취미생활을 했나 봅니다.

문희를 오랑캐로부터 찾아온 이유도 그래서였는지 모릅니다.

 

 

조조의 특이한 취미생활이라 뭐라 하기도 그렇습니다.

장제의 처 주씨, 원술의 처 오씨, 원소의 며느리 견부인, 여포의 연인인 초선(연의

속에서만). 유독 점령지마다 그곳의 미인 중 유부녀만 골라 수청 들게 했답니다.

혹시 그날 밤 조조는 정욱(程昱)에게 암호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했을지 모릅니다.

왜?

온고이지신이란 옛것을 익혀 새롭게 사용한다는???

 

 

위의 사진도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벽화로 조조가 완성에서 동탁의 잔당인 장수라는

이름의 장수와 전투를 하고 장수가 패하자 항복을 받았답니다.

그런데 조조가 또 기묘한 취미생활이 발동해 그만 장수의 숙모인 추 부인을 그날 밤

처소로 불러들였는데 이에 장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눈에 뵈는 게 없으니

조조의 영채를 급습한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이때 술에 취해 잠들었던 조조의 호위대장인 전위는 그만 조조 대신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조조는 이상한 음심 때문에 아까운 수족 한 사람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때 장수가 조조의 숙소를 급습하며 뭐라고 소리쳤겠어요?

"조조 이 개**야~~" 라고 분명히 했을 겁니다.

 

 

또 다른 그림 하나 더 볼까요?

바로 유비의 둘째 부인 미부인은 서주에서 얻은 부인으로 아두를 낳은 여인이죠.

유비가 조조의 공격을 받고 식솔 모두 팽개치고 혼자만 살겠다고 줄행랑친 후

그것도 서방이라고 아들인 띨띨이 아두를 데리고 형주로 도망간 유서방 찾아

나섰다가 당양벌에서 조조의 기습을 받고 오도 가도 못할 때입니다.

이때 조자룡이 조조의 100만 대군 속으로 단신으로 뛰어들어가 아두를 구하는

장면으로 그러나 조자룡은 아두만 품에 안고 조조의 군사를 헤치고 탈출해 장판에서

장비의 도움을 받았지만, 미부인은 주군의 부인으로 조자룡도 품에 안을 수 없었을 겁니다.

 

어찌합니까?

그냥 여기 우물가에 있다가는 또 조조의 눈에 띠일 게 아니겠어요?

미부인은 바로 조조가 제일 좋아하는 유부녀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위의 사진에 보이는 우물로 몸을 던져버렸답니다.

조조의 그런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일만 없었다면 살아보았겠지만...

 

 

서방도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가는 서방은 서방도 아닙니다.

그런 서방 믿고 어찌 평생을 함께 살 수 있겠어요.

유비는 서방으로는 크게 점수받기 어려운 사내였던 모양입니다.

이때 미부인이 우물 속으로 뛰어들며 뭐라고 소리쳤겠어요?

"유비 이 개**야~ 혼자만 살겠다고 처자식 버리고 혼자 도망친 놈 잘먹고

잘살아라~"라고 소리치며 우물 안에 몸을 던져 죽었을 겁니다.

 

위의 그림은 관우가 조조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미부인과 감부인을 모시고

있을 때로 이 대목에서 부인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서방인 유비와

비록 적이지만, 유비의 두 부인을 돌보아 준 조조의 인간성을 알 수 있습니다.

유비가 마누라보다는 더 큰 일인 한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웅지를 볼 수 있다고요?

 

 

오나라 주유가 적벽대전을 결정하게 한 것도 바로 조조의 이런 여성관을 주유에

어필했기 때문일 것인데 대교, 소교 자매는 바로 손책과 주유의 부인으로 조조가 바로

여기 업성의 삼대가 있는 두 개의 다리인 이교에서 즐기겠다는 동작대부라는 시를

두 사람인 이교로 바꿈으로 공명은 주유의 속을 긁어놓았기에 벌어진 전투였지요.

그때까지는 오나라에서 전투에 대해 미온적이었지만,

공명의 세 치 혀로 적벽대전이 일어나게 되었지요.

 

 

위의 사진 속의 두 여인이 이교로 만약 처녀의 몸이었다면 이 계책은 성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연의 속에서만 말입니다.

조조는 천하가 아는 유부녀 마니아였기에 가능했던 전투가 바로

적벽대전이라고 해도 되지 않겠어요?

 

사실, 손권의 형인 손책의 부인이 교씨로 대교(大乔)라 불렀고 그 동생이

주유의 부인이 소교(小乔)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공명은 짐짓 모르는 척 주유에 재촉하니...

주유는 열을 받을 수밖에요.

주유는 부인을 무척 사랑한 젊은 장수가 아니겠어요?

그런데 자기의 부인과 주군의 부인까지 모두 조조에게 넘겨주라니 말이 됩니까?

 

 

그러니 두 자매는 성이 교(乔)씨로 다리라는 뜻도 있잖아요.

그런데 동작대부에 나오는 구절 중

"동서로 이어진 두 다리가 마치 무지개처럼 하늘에 걸려있다

(连二桥于东西兮, 若长空之蝃蝀)."라는 말을 공명은

"동남쪽 두 교씨 미녀를 끌어안고 아침저녁으로 즐겨보리라(揽二乔于东南兮,

乐朝夕之与共)."라고 바꿔버렸다 합니다.

 

여기서 동남쪽은 바로 동오가 자리한 곳이잖아요.

이교란 또 주유 아내와 손책의 아내 자매라는 겁니다.

이교 중 누구와 아침에 즐기고 누구는 저녁에 즐길지는 번호표로 정하면 될 것이고요.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두 자매의 미모에 견줄만한 여자는 없다 합니다.

이런 예쁜 여자를 공명이 세 치 혀로 나불거려 약을 올렸으니 주유도 참을 수 없었지요.

 

 

위의 사진 속의 두 여인은 미부인과 감부인으로 조조의 홈그라운드 쉬창의

감미 이후 궁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마누라는 둘이나 버리고 도망간 서방을 대신해 조조가 궁을 지어 보살펴 줄 때의 모습니다.

궁 앞에는 정자 하나가 있는데 매일 아침저녁으로 관우가 그 정자 아래까지만 들어와

문안 인사를 올렸다고 하는 문안정이라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문안정에서 서서 감미 이후 궁을 올려다보며 뭐라고 했을까요?
"형님! 식사하셨습니까?"가 아니고 "형수님! 식사하셨습니까?"라고 했지 싶습니다.

문안정이 있는 그곳까지가 남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그곳부터는 금남의

구역이지만, 佳人은 내실까지 들어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위의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감미이후궁으로 남자는 절대로

발을 들이밀어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영웅은 미녀의 관문을 넘기 어렵다는 영웅난과미인관(英雄難過美人關)이라는 말이

있는데 꼴에 조조도 영웅이라꼬...

뭐 여포도 영웅이라고 그랬으니까요.

그럼 혹시 佳人도? 설마...

미인만 보면 눈이 저절로 돌아가시는 분은 분명 영웅이십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제 업성을 떠나며 오늘 과거의 화려한 색을 모두 벗어버리고 아주 순박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업성을 노래한 시가 있어 소개합니다.

잠삼(岑參)이라는 성당 시대의 유명한 시인이 있었답니다.

잠삼이 썼다는 등고업성(登古鄴城)이라는 시가 여기 있네요.

 

下馬登鄴城(하마등업성) : 말에서 내려 업성에 오르니

城空復何見(성공부하견) : 성은 비어 있어 다시 무엇이 보이리오

東風吹野火(동풍취야화) : 봄바람 동풍이 불어 들불을 일으키고

暮入飛雲殿(모입비운전) : 날 저물자 비운전으로 불어 든다

城隅南對望陵臺(성우남대망능대) : 성 귀퉁이 남쪽으로 망릉대를 마주 보고

漳水東流不復回(장수동류불부회) : 장수는 동으로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는구나

武帝宮中人去盡(무제궁중인거진) : 무제의 궁인들 다 사라지고

年年春色爲誰來(연년춘색위수래) : 해마다 봄빛은 누구를 위해 오는가.

 

 

이 시는 무제(武帝)의 허무함을 노래합니다.

무제가 누구입니까?

바로 조조를 일컫는 말이 아니겠어요?

잠삼이 지은 시는 바로 지금 佳人의 마음과 같습니다.

佳人은 말에서 내려 업성에 오르지 않고 마을버스 타고 삼대촌 종점에 내려

업성에 올랐지만, 바라보니 마음은 잠삼이나 같습니다.

장수(漳水)란 바로 업성 옆을 흐르는 강입니다.

이 강의 범람으로 업성은 모두 물에 잠기고 지금은 황토벌만 남아있습니다.

그 땅을 파보니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유물과 유적이 쏱아져 나온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곳 발굴이 모두 끝나면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했던 유적이 그 모습을 보여주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