佳人 2013. 4. 3. 08:00

 

우리가 병마용을 갔을 때는 당시 2호 갱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기에 볼 수 없었고 3호 갱을 보게 되었습니다.

2호 갱에는 1.400여 개의 도용과 주로 전차와 기병을 보충하기 위한 모습으로 편제되었다 합니다.

 

3호 갱은 1호 갱과 비교하면 규모가 무척 작습니다.

물론, 이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유물이고 대단한 발견이지만, 1호 갱의 엄청난 규모의 도용을 보고 나니

조금 실망스럽기는 하네요.

 

아직 머리부분을 복원하지는 못했나 봅니다.

저 모습을 보니 장비와 관우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이번 여행에 그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행 하려고 했으니까요.

삼국지에서 머리가 분리된 장비와 관우 말입니다.

 

저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목에 스카프를 두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중국의 어린 학생들은 목에 빨간 스카프 두르기를 좋아합니다.

단체로 말입니다.

중국의 그런 모습을 흉내 내 북한의 학생들도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더군요.

그게 단합을 도모하고 일체감을 주어 체제를 하나의 목적으로 끌고 가는 아주 단순하며 효과적인 방법이지요.

물론 유니폼이라는 옷도 그런 역할을 하지만...

 

저런 모습은 중국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모습입니다.

바로 군사가 했던 모습이지요.

중원을 두고 피 터지게 싸울 때 아군과 적군을 어떻게 구분하겠어요.

바로 가장 쉬운 방법이 목에 두른 스카프의 색깔이 아닐까요?

 

군복의 모습이 나라마다 다르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당시는 그런 구분이 모호했을 겁니다.

정수를 따라 많은 군사가 이동할 때야 장수 이름과 나라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들었지만,

백병전이 벌어지면 그놈이 그놈이잖아요.

때로는 모자에 깃을 꽂기도 했지만,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스카프로 적과 아군을 구분했다 하네요.

 

3호 갱에는 모두 68개의 도용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는 바로 진나라 군대의 지휘부로 보인다 합니다.

모두 갑옷을 입고 있어 장수로 보입니다.

 

지금 머리부분이 복원되지 못하는 이유는 머리가 달아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진시황 사후에 농민반란 등 아주 시끄러웠다 합니다.

시황의 변태적이고 폭압적인 정책에 반발심으로 말입니다.

 

게다가 아방궁이라는 대규모 국책사업은 미국의 뉴딜정책처럼 경제를 살리는 일이었다면 오죽 좋겠어요?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아방궁은 모든 민초의 땀과 피와 원망이었지요.

또한, 북으로부터 늘 침략하는 흉노를 막는다고 만리장성이라는 대단한 삽질을 시작했지요.

남동방향의 광동과 광서지역 그리고 베트남 북부 일부까지 정복한다고 일으킨 전쟁 등..

대규모 전쟁과 공사는 개혁의 피로감을 느낀 민중이 봉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전국이 어수선해지면 지방에 소 영웅들이 준동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진시황 사후 4년 만에 항우와 유방의 연합군에 진나라는 폐업절차에 들어갑니다.

이윽고 한나라가 신장개업한다고 동네방네 떡도 돌리지요.

진시황의 꿈은 꼴랑 죽은 지 4년 만에 일장춘몽이 되었네요.

 

이제 유비의 조상이라는 유방은 이곳 장안에 새로운 나라를 열게 되었지요.

장막 안에서도 앉아서 천 리를 보았다는 장자방은 서면 얼마나 더 볼 수 있었을까요?

뭐... 앉으나 서나 마찬가지겠지요.

佳人도 앉아서 천 리보다는 더 먼 우주도 봅니다.

새로운 세력이 새로운 기운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면 구세력의 기운을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

아방궁을 불을 질러 석 달 열흘이 탔다고 하고 여기 병마용에 주로 3호 갱의 장수들의 목을

쳤다 하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부관참시에 해당하나요?

 

병마용은 진시황릉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전투 태세를 갖춘 체 동쪽을 향하고 있다 합니다.

이런 모습은 진시황이 동쪽을 무척 경계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북서쪽은 진령산맥이 있는 험준한 산악지대로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자연 지형지물이 방어해 줍니다.

우리 부부는 이번 여행에 서안을 떠나 바로 그 험준하다는 진령산맥을 넘어 한중이라는 곳으로 갔지요.

그 길이 바로 공명이 북벌을 감행한 루트였어요.

바로 다섯 차례나 풀 방구리 쥐 드나들 듯 오르내린 북벌 루트가 되겠네요.

 

그러나 동쪽과 남쪽은 물산이 풍부하고 너른 평야 지대라 곡식도 풍족한 지역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쪽을 늘 노려보고 있었나 보네요.

바로 중원이라고 불렀던 곳 말입니다.

 

오늘도 병마는 진시황의 출전 명령만 기다리고 대기 중입니다.

제일 앞쪽으로는 갑옷을 입지 않은 경무장 부대가 신속히 움직일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입니다.

그 뒤를 갑옷으로 중무장한 부대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호위 부대는 양쪽 측면에 대기 중입니다.

 

가만히 병마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아주 결연한 표정으로 보입니다,

모두의 모습이 달라 千人千面이라고 해야 하나요?

무릅을 꿇고 앉은 궁수가 보입니다.

장수는 투구를 썼고 일반 병사는 상투를 튼 모습입니다.

병사들은 약간 아랫배가 나온 모습으로 식사 후인가요?

 

도용을 만들 때 거푸집을 이용했을 것이고 거푸집에서 나온 도용은 장인의 손에 의해 다듬어지며

모두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 겁니다.

이들이 장인이라는 상징으로 자신이 만든 도용에는 모두 실명제를 도입해 이름이나 사인을 했다 합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장인의 숫자가 모두 87명에 이른다 합니다.

물론, 한 명의 장인 아래 여러 명의 보조를 두어 여러 해 동안 만들었을 겁니다.

 

만드는 순서는

먼저 도용이 조각된 거푸집 안에 진흙을 넣어 내부를 손으로 다지고 막대기로 두드려 단단히 붙입니다.

그다음 속의 흙을 손으로 긁어내고 하루를 둔 다음 거푸집에서 분리했을 겁니다.

 

이렇게 분리된 도용을 장인이 일일이 손으로 형태를 정밀하게 만들어가며 표정을 다르게 만들어 갔을 겁니다.

이런 모습은 같은 틀에서 찍어냈을지라도 그 모습이 새로운 병마로 탄생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원본은 같지만, 마무리가 다르기에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된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요? 

모서리가 둥글면 특허논쟁에 휘말릴까요?

사과는 둥글지만, 둥근 것이 모두 사과가 아니잖아요.

 

이렇게 몸체가 완성되면 두 개의 앞뒤 조각 붙이게 되고 다리와 머리를 만들어 합체하면

하나의 토용이 완성되었겠지요.

그 후 그늘에서 말린 후 7박 8일을 굽는다 합니다.

 

이렇게 하면 도용 하나를 만드는데 한 달 정도 걸리나 여러 사람이 하나의 장인 아래 서로 분담을 하기에 동시에

여러 개의 도용이 만들어졌을 겁니다.

그 후 도용에 채색하면 흙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겠지요.

비록, 속도 없는 녀석이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도용은 마지막으로 발밑에 고정장치를 한 사각형의 바닥 틀에 올리고 이곳으로 운반되면

각자 자기 소속에 따라 편제되었을 겁니다.

그다음 고랑 사이의 담장 위로 가로막대를 올리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누각을 위

올렸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병마용에 사용된 흙은 인근에서 나온 흙으로 지표 아래 1-2m에서 파낸 흙이라 합니다.

이 흙을 햇볕에 말린 후 다시 물에 풀어 흙을 가라앉힌다 합니다.

그다음 규사를 적당한 양으로 섞어 사용했다 하네요.

 

내일은 병마용 전시실을 둘러볼까 합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일부에서는 도용 하나를 만드는데 3명의 작업자가 사망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었고 그만큼 고생이 많았다는 의미일 겁니다.

흙으로 만든 도용이 도공을 살해했다면 모를까...

도용이 무슨 처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