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
오늘은 진시황릉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렵니다.
물론, 예전 여행 때 이야기입니다.
그날도 역시 운무인지 황사인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동탁이 죽던 날도 하늘 우러러보고 해가 보이지 않았다 합니다.
동탁은 마지막 숨을 거두며 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똑똑해야 하는데 동탁은 그게 자신의 황제 등극을 축하하는지 알았다고 하니...
공명 또한 남만 정벌에 나섰다가 짙은 황사로 전투까지 멈추었다고 하니
중국의 이런 자연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가 보네요.
입구에는 진나라 복장(?)을 한 사람이 마네킹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네요.
무덤이라기보다 작은 산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책가방만 크면 공부 잘한다는 전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만든
모양인데 중국은 살아서도 크게 만들고 죽어서도 크게 만드나 봅니다.
이웃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이 이렇게 컸으면 참 좋겠습니다.
무덤주변에는 석류나무가 무척 많습니다.
석류는 서안을 대표하는 상징의 시화라 하더군요.
중국은 아직 나라의 꽃인 국화가 없는 나라이지만...
원래 이란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건너온 석류가 이곳 시안의 기후와
아주 썩 궁합이 맞았던 모양이에요.
그러나 진시황릉 주변에 나는 석류는 먹지 않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그 이유는 수은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진시황릉 정상까지 계단을 만들고
능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게 만들었네요.
물론, 6년 전입니다만...
그래서 올라가 봅니다.
왜?
진시황릉에 두 다리로 밟고 서보고 싶어서요.
정상에는 능 모형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물론 아직 발굴하지는 않았지만, 상상하여 만들어 놓았습니다.
진시황은 좌우지간 무덤만 제일 큰 게 아니라 그가 짧은 시간 이룬 업적 또한 대단한 것으로
생각되네며 영정이라는 이름의 진시황은 처음으로 왕의 칭호를 황제로 칭했다 하고
그의 친 아비는 이화접목이라는 이야기가 있는 여불위라는 말도 있고...
아무튼 무척 이야기가 많은 수수께끼의 인물임은 틀림없나 봅니다.
춘추시대 100여 개의 나라에서 전국시대로 접어들며 한, 위, 조, 제와 진, 초, 연나라의
7개국으로 교통정리가 되며 세상은 이들 일곱 나라를 전국 7웅이라 불렀다네요.
이런 복잡한 상황에 합종연횡이 생겼고 서로가 복잡하게 얽혀갈 때
이를 원샷에 끝낸 사람이 영정이라고 했던가요?
영정의 성격으로 보아 그의 아비라는 자초 이인보다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해
큰돈을 벌고 나라를 세우는 데 투자를 한 여불위가 쪼다 장양왕인
이인보다 더 잘 매치가 됩니다.
왜 그날 밤 이화접목이라는 말로 여불위가 한단이라는 동네에서
한단의 스타였던 여불위 애첩인 조희를 보고 한눈에 필이 꽂혀...
정말 그때의 처지를 생각하면 주제넘는 짓이었지만, 여불위의 도움으로
사내구실도 해봤으니
장양왕의 처지에서는 여불위가 한 줄기 빛이었을 겁니다.
여불위와 자초의 만남은 진시황이 태어나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비에 젖은
개털 같은 처지의 진시황의 아비가 어떻게 다시 화려한 복귀를 했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일 겁니다.
여불위는 하남지방에 이름난 거상으로 어느 날 한단에 애첩을 만나려고 들렸다
우연히 자초를 만납니다.
자초는 진나라 공자로 진나라에 볼모로 파견 근무 중이었답니다.
당시는 여러 나라가 서로 침략하지 말자는 의미로 왕자 하나씩 상대국에
머물게 하여 살게 했는데 사실 볼모인 셈입니다.
만약, 전쟁이 나면 바로 죽고 전쟁이 없다면 그냥 거기서 살다 죽는 겁니다.
이렇게 상대방의 나라에 보험용으로 파견근무한다는 왕자는 대권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쭉정이 왕자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두 사내는 운명적으로 만나며 여불위는 자초에 올인하고 그의 재산 모두를
자초에 투자하는데 단, 나중에 왕위에 오르면 나라를 반으로 나누기로 하고요.
사실, 자초는 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불위는 진나라의 실세 화양부인을 "색쇠이애이(色衰而愛弛)"라는 말로 구워삶고
자기가 사랑했던 애첩 조희까지 자초에 넘겨주며 자초 키우기에 열정을 다 바쳐
드디어 화양부인의 양아들이 되어 진나라로 돌아가게 되며 화양부인의 서방인
안국군이 고맙게도 즉위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남으로 나머지 짱짱했던
20여 명의 공자가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냉큼 보위에 오르는 행운을 누려
얼떨결에 왕위에 오르니 이가 진시황의 아비인 장양왕이라네요.
그러니 여불위의 포지션이 어디겠어요?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승상이 아니겠어요?
그것으로 입 닦으면 안 되겠죠?
네.. 그래서 문신후에 봉하고 낙양 10만 호를 식읍으로 하사합니다.
사실, 나라를 반타작하기로 하고 시작한 일이기에 이 정도는 많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자초인 장양왕은 이제 왕의 자세가 막 나오려는 즉위 3년 만에 또 급하게 가버립니다.
어쩌겠어요.
출신성분도 복잡한 조희의 아들 영정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기원전 246년 보위에 오릅니다.
왜 조희의 아들이겠어요.
장양왕의 씨인지 여불위의 씨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희가 낳은 것만은 확실하니 조희의 아들입니다.
친자확인을 할 기술적인 시대가 아니었잖아요.
시안에 있는 시황의 무덤을 까보고 유전자 검사라도 하면 속 시원히 밝혀지겠지요.
아마도 아무도 없을 때 여불위가 어린 영정을 보고 "정아~ 내가 진짜 네 아빠야~
어디 아빠라고 해봐~ 아빠~"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올랐기에 국정의 운영은 재상인 여불위와 그의 정인이었던
조희가 하니 이제부터 투자한 것보다 엄청난 것을 빼먹기 시작합니다.
빼먹을 것도 없네요.
나라를 그대로 삼키면 되니까요.
사실, 자초 장양왕이 죽었을 때 조희의 나이가 여자로는 황금기인 30살이라 합니다.
서방이 죽고 나면 황후는 자동 업그레이드되어 황태후가 됩니다.
서른 살에 황태후가 과부로 산다는 일은 본인에게는 물론 국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죄악입니다.
자유부인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처음 나왔을 때는 사회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웠지요.
왕은 여불위를 상국으로 삼고 작은아버지라고 중부(仲父라 칭했답니다.
사실 친아버지인지도 모르는 일인데....
동탁은 헌제를 장안으로 데려온 후 자신을 상부라 했다지요?
이때 여불위 집에 하인만 만 명에 사군자에 뒤질세라 불러 모은 빈객만 3천 명이라니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네요.
그러나 여불위도 영정이 나이가 들어가며 어른이 되니 예전만 못합니다.
여불위는 政을 낳은 情에 굶주린 情人이었던 조희와의 관계는 계속되고
결국, 조희의 음욕을 이기지 못한 여불위는 핀치히터라는 노애를 내세울 지경에
이르는데 잘 키운 노애 하나 열 황제 부럽지 않습니다.
거시기에 오동나무로 만든 수레바퀴를 매달아 돌리며 다니게 한다는 일은
대단한 훈련의 결과이지요.
이 정도 능력이 되지 못하며 왜 휴대전화 동영상에 나옵니까?
지금까지 그 세계에서는 노애를 명불허전이라 한답니다.
지존이라는 말일 겁니다.
이런 노애를 가짜로 궁형에 처하고 여불위는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조희,
아니.. 황태후에게 노예로 쓰라고 노애를 보냅니다.
이러면 환관 노조에서 그냥 두고 봅니까?
자격이 없는 자를 노조원으로 가입시킬 수 없잖아요.
이렇게 황태후 조희의 사랑과 보호로 노애는 무럭무럭 자라 하인이 수천 명에
빈객이 천여 명이라..
술상무는 술만 잘 먹으면 되는데 사업까지 이러쿵저러쿵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愛상무는 그냥 사랑의 힘으로만 살아가야 하잖아요.
드디어 노애는 장신후라는 벼슬에 오르고 사람들은 노애와 여불위의 가세에 대해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가지 않는 법.
드디어 세상에 비밀이 하나씩 벗겨지며 노애는 삼족을 멸하고 어머니인 조희는
"열심히 즐긴 당시 떠나라!"라고 옹 땅으로 추방되고 여불위는 상국의 자리에서 내려오며
"열심히 해 먹은 당신도 떠나라!"라고 하남 땅으로 보내버립니다.
1년 후 여불위 주변에는 또 많은 빈객과 풍류객이 모이자
시황제는 변란이라도 일어날까 불안합니다.
그래서 편지 한 통을 친서라고 여불위에게 보냅니다.
"그대는 진나라에 무슨 공이 있기에 하남의 10만 호의 식읍을 갖고 있는가?
그대는 진나라와 무슨 친척 관계가 있기에 중부라는 호칭을 얻었는가?
그동안 열심히 해 먹은 그대는 가족을 데리고 촉 땅으로 떠나라!"
당시 편지를 받은 여불위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합디다.
"따식 많이 컸네~ 건방지고 웃기는 자식이네? 장사꾼이 이문을 남기지 않고
사람을 남긴다고? 내가 전 재산을 털어 아비를 왕으로 만들어 겨우 식읍
10만 호를 받았기에 뭐가 잘못인가?
친척 관계? 그래 유전자 검사라도 받아보자. 니 친애비가 진짜 누군지.
너를 낳아 준 어미는 또 누구냐?
자식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후레자식처럼 굴고 있네...
그리고 열심히 해 먹은 당신 촉 땅으로 떠나라고?
내가 그동안 투자한 게 모두 얼만데 그거 조금 해 먹었다고 나를 비난해?
내가 사냥개냐? 토사구팽당하게.
많이 컸다고 위아래도 구분 못 하고...."
그러나 여불위는 시황제의 칼날이 점점 자신의 목을 향하여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처형당할 것이 두려워 독주를 마시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합니다.
죽기 전에 여불위가 제게 상의를 합디다.
佳人 어른... 그래도 한 순간은 모든 사실을 밝혀볼까 합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만약 지금까지의 일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집혀
진나라만 아니라 중원 전체가 발칵 뒤집힐 일입니다.
그런 일을 여불위 당신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모든 비밀을 가슴에 혼자 안고 가야 합니다."
그런데 처형당해 죽으나 독주를 마셔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 아닌감유?
죽긴 왜 죽어?
그리고 혼자만 가슴에 담고 갔던 일들이 드라마처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어쨌든 여불위는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그는 많은 재산을 한 사람에게
모두 투자를 한 세기의 도박꾼인가?
아니면 선견지명이 있는 전형적인 벤처 정신이 투철한 장사꾼인가?
그로 말미암아 진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으며 또한 많은 제도와
유적과 유물을 남긴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색쇠이애이(色衰而愛弛)...
'아름다운 용모로 총애를 받는 사람은 용모가 쇠잔해지면 총애도 시든다.' 라는 말로
그가 화양부인에게 한 말이지만 마찬가지로 권력도 실체가 무상하여
구름과 바람 같은 것이 아닐까요?
여불위는 자신이 자초를 장양왕을 만들고 그 아들인 영정을 진시황으로 만들어
권력의 중심에서 한 시대를 구름처럼 그리고 바람처럼 살아왔지만,
나이가 들어 쇠잔해지며 권력의 끝자락을 놓고 마지막 남은 생명의
끈마저 스스로 놓게 됩니다.
두 명의 왕을 모시고 전국칠웅의 막바지에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진나라에서
여불위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승상과 중부로서 세상에 부러울게 없는 권력을
휘둘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권력도쇠잔해지며 세상의 티끌로 돌아갑니다.
아마도 여불위는 역사상 최고의 장사꾼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런 장사꾼이 있었기에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룬 진시황이
태어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진시황의 힘은 바로 여불위의 힘입니다.
진시황은 살아생전 주술사를 자주 찾고 우리가 이번 여행을 시작한 친황다오라는
곳에서 본 불로초라는 허황한 꿈을 찾아다녔고 분서갱유에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일 중에는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하기 위한 일이라든지 도량형의 통일,
마차 바퀴 폭의 통일, 도로 운하 등 엄청난 일을 짧은 시간에 이룩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중원에 수많은 나라를 통일한
최초의 중앙집권 국가라는 점이 아닐까요?
그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친 아비일지 모르는 여불위를 제거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후 등용한 이사를 승상에 올리며 당시 합종연횡을 하며 주변 국가를 하나씩 정리하며
그의 꿈이 영글어 갔나 봅니다.
이곳 무덤은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고 36년간 공사하여 만든 황릉은 수은의 바다라
하는데 백 년도 살지 못하고 죽으면서 천 년을 살 것처럼 야망과 이상을 지닌
사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의 무덤은 우주를 형상화했다고 합니다.
주변을 둘러싼 병마용의 규모만 보더라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아마도 사면으로 된 피라미드 형태의 틀 안에 그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겁니다.
생전에 살았던 아방궁보다 더 화려한 지하궁전을 만들어 언제나 병마용을 호령하며...
혹시 무덤 속에서 알라들처럼 진흙 병정놀이하려고 만든 것은 아니겠죠?
"노동자들은 아주 깊은 지하까지 파고 들어갔다. 그들은 청동으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시황의 관을 안치했다. 그들은 궁전, 누각, 집무실의 본을 만들고 멋진 그릇, 값진 석재,
진귀한 물건들로 묘 내부를 가득 채웠다.
기술자들은 도굴을 위해 침입자가 나타나면 석궁이 저절로 발사되도록 장치했고
무덤이 훼손되면 중국의 황하 양자강 심지어는 동중국해와 남중국해까지
수은이 흐르고 순환되도록 장치했다.
반짝이는 진주로 성좌(星座)를 설치하고 금과 은으로 새를 만들고 옥을 쪼아 소나무를 만들었다.
마차는 바닥에 진열했다. 등불은 고래기름을 연료로 사용하여 영원히 탈 수 있게 하였다."
사마천이 기록한 진시황릉에 관한 이야기랍니다.
물론,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사마천은 진시황이 죽은 지 100년도
지나지 않아 살았던 사람으로 어느 정도는 믿음이 가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진시황이여 일어나라!
어찌 수은의 바다 위에 누워있는가?
기극비란 봉소서(枳棘非鸞鳳所捿)라는 말이 있다 합니다.
탱자나무와 가시덤불 속에서는 봉황이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일 겁니다.
모두가 봉황이라 했지만, 진시황이 누워 있는 수은의 바다는 봉황이 누워있을 곳이 아니네요.
그곳은 딱 참새가 사는 곳으로 보입니다.
마작애상봉황(麻雀愛上鳳凰)이라고 참새도 오래도록 그곳에 누워 있으면 봉황이 되려나요?
내일은 이제 진시황이 병정놀이를 위해 생전에 준비했다는 병마용으로 가보렵니다.
함께 가시렵니까?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이런 대단한 나라는 여불위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사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결국,
조고에 의해 개털이 되고 맙니다.
그 시간이 불과 15년...
위대한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였던 진나라를 시작부터 털어먹고
말아드시는데 걸린 시간이 말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아방궁도 모래 위에 짓는다면 사상누각인가 봅니다.
천하를 얻기 위해 영웅으로 행세했지만, 천하가 원치 않은 영웅은
무늬만 영웅이었나 보네요.
오늘 시황릉 무덤 위에 올라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네요.
그러나 이게 모두 아무 의미도 없는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한 세상을 요란스럽게 살아온 사내.
이렇게 천하를 손아귀에 넣었다 생각한 사내는 겨우 49살의 나이로 순행 길에서 숨을 거둡니다.